연임 확실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글로벌 프레지던트’…세계가 ‘반’하다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연임의지를 공식 발표했다. 세계의 뜨거운 지지 행렬이 이어졌다. 취임 초 들려오던 비판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다. 격려와 찬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 반 총장의 리더십과 재임 중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이변이 없는 한 연임은 떼 놓은 당상이다. 대체 세계가 반한 반 총장의 매력은 무엇일까.

각국 뜨거운 지지 행렬에 반 총장 눈시울 붉어져
가난한 국가의 인도주의적 일에 양팔을 걷어붙여

지난 6일 유엔 본부가 술렁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연임에 출사표를 던진 데 따른 것이다.

반 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다중적인 범세계적 위기 속에 유엔이 직면해 있는 여러 현안을 완수하기 위해 회원국들이 지지해 준다면 영광된 마음으로 5년 더 이 위대한 기구를 이끌고 싶다”며 연임 출사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어 반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지난 4년 반을 돌이켜보면 유엔과 국제사회에 큰 도전의 시간이었으나 우리가 함께 이룬 성취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며 기후변화 의제 선도, 미얀마·아이티·파키스탄 위기에 대한 대처 등을 성과로 뽑았다.

“현안 완수 위해 5년 더 이끌겠다”

반 총장은 또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권과 국제 정의를 향상시키며,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며 “ 모든 국가와 유엔 가족들이 함께 일해야 유엔의 고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함께 일해야 세상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고 ‘변화속의 통합’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미국, 중국, 프랑스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과 아시아 주요국 등이 잇따라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미국 백악관은 지난 7일 성명을 통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반 총장의 연임 출마 발표를 환영한다”며 “미국은 그의 출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리바오둥 유엔 주재 중국 대사도 반 총장의 재선 도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알랭 쥐페 프랑스 외무장관도 성명을 통해 “매우 환영할 만한 뉴스”라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역시 반 총장에게 연임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 오전 유엔본부에서 열린 아시아그룹 조찬회의에서도 53개 회원국 가운데 중국, 일본, 인도,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아프가니스탄 등 30여개국 대사들이 앞다퉈 발언하는 등 회원국들의 지지 의사 표시가 이어졌다.

심지어 북한도 반 총장의 연임을 적극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신선호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반 총장과 인사말을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는 총장님의 재선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러나 공개 지지 연설은 안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지지 행렬에 반 총장은 눈시울까지 붉혔다는 후문이다.

돌발 변수가 없는 한 반 총장이 연임에 성공하리란 게 외교국의 공통된 견해다. 유엔사무총장 인선의 키를 쥐고 있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모두가 반 총장의 연임을 찬성하고 있는데다 다른 경쟁 후보도 없기 때문이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투명성이 부족하고 책임감도 결여됐다”는 등의 비판에 시달리던 취임 초와는 180도 달려진 상황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인류의 미래 위협하는 기후변화에도 엄청난 집념
겸손함, 특유의 친화력으로 ‘적 없는 사람’ 통해

반 총장이 2007년 1월 1일 임기를 시작한 이래 2009년 6월 30일까지 2년6개월 간 출장을 다닌 거리는 무려 116만2635Km다. 지구를 30바퀴나 돈 셈이다. 이 기간 중 장관급 이상 회담이 880회, 이동거리가 45만Km, 각국 정상 및 총리를 포함한 장관급 이상 면담 350회, 정상과의 전화통화만 해도 400회다.

192개 회원국을 아우르는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자리다. 반 총장을 옆에서 지켜본 유엔 관계자들은 “지난 4년 동안 정말 꾹 참고 열심히 일했다”고 입을 모은다. 반 총장은 특히 가난한 국가의 인도주의적 일에 양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2008년 5월 서남아시아의 미얀마에 열대폭풍 나르기스가 덮쳤을 때의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나르기스는 14만5000여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미얀마의 군부는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게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가난한 독재국가의 재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 총장은 아시아 각국 대사들을 관저로 불러 미얀마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국민의 재난에 무심한 미얀마의 군부를 설득하기 군부 실세와 직접 만나 죽어가는 당신들의 국민을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결국 미얀마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반 총장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엄청난 집념을 보였다. 2007년 발리 기후변화회의가 주요국의 이견으로 좌초할 위기에 처하자 회의 일정을 미리 끝내고 동티모르에 가 있던 반 총장이 유엔의 털털거리는 프로펠러기를 타고 다시 회의장을 찾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지난 2009년에는 전 세계 150개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적 기후변화 문제 대처에 따른 ‘제3세계 기후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반 총장은 “기후변화는 폭넓은 경제적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며 “지금 시점에서 배기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무공해 에너지 절약형 방안을 내놨다.

설득력 있는 반 총장의 설명에 이 자리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현재 각국은 ‘녹색성장’이란 국가적 슬로건 내걸고 공해 없는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 등 ‘친환경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1년에 지구 12바퀴
장관급 회담 880회

반 총장은 겸손함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적이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특히 그의 외모는 지극히 부드럽다. 미소 띤 얼굴과 신사다운 행동은 어린아이를 연상시킬 정도다. 하지만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뤄 내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게 주변인들의 평가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겸비한 ‘외유내강형’ 인물인 것이다.

반 총장은 또 ‘일에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취미도 없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고 해서 내려진 평가다.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다. 특별히 휴가를 가지도 않는다. 일요일 출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미국과 유럽?중동?아프리카 출장의 경우 시차를 감안, 이동하는 시간에 비행기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잡는 게 다반사다.

반 총장의 이런 기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실제, 반 총장은 “대학 시절 바둑에 취미를 가져보려 했지만 그보다는 학습에 시간을 더 집중하고 싶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대학 친구들은 그를 늘 공부만 하는 ‘범생이’로 기억할 정도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릴 적부터 꿈꿔온 외교관의 길 때문이다.

반 총장은 어릴 적부터 외국어 실력이 남달랐다. ‘영어신동’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러던 지난 1962년 충주고 재학 시절 미국 정부가 주최하는 영어 웅변대회에서 입상, 부상으로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리고 대회를 주최한 미국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라고 말했다. 반 총장은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을 때 외교관의 꿈을 다졌다”고 말한다.

“평화·안정·개발·인권
위해 노력할 것”

이후 반 총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 1970년 5월 외무부에 들어와 40년 가까이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외교부내에서 그는 상하좌우의 모든 인사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그러다보니 선배들은 의례 반 총장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관운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차관보, 차관과 청와대의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외교보좌관, 외교통상부 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꿰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가운데 반 총장의 능력이 빛나기 시작한 건 지난 2001년 당시 한승수 외교부 장관이 겸임했던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다. ‘9·11 사태’로 유엔 차원의 테러방지에 적극적이던 때, 그는 각 국가 간 이견 조율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 명성을 쌓았다. 특히 장관답지 않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학자적 외모로 대중에게 탁월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지난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씨 피살사건’이 벌어졌을 때 국민들의 질타가 쏟아져 한때 입지가 흔들리긴 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고 지난 2006년말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이후 반 총장은 4년6개월간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지금 첫 임기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재임이 확정적이다.

두 번째 임기의 중점 과제에 대해 반 총장은 “국제 사회가 직면한 다중적인 도전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평화·안정·개발·인권을 위한 노력을 선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2015년까지 계획돼 있는 새천년개발목표 달성을 위해 애쓰고 새천년개발목표를 넘어서는 포괄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개발 의제를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또 내년에 열릴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도 성공적인 결과가 도출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무엇보다 여성 지위 향상, 핵 없는 세상, 대규모 재난과 분쟁이 발생했을 때 유엔의 인도적 지원 능력제고 등을 중점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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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