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범법국가로 추락하고 있다. 경제 불황 탓이다. 이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범죄에서 이같은 변화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돈 될 것은 무조건 훔치고 보는 ‘생계형 범죄’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가 하면 불황기면 늘어난다는 청소년범죄도 날로 흉포화되고 있다. 죄를 지은 것이 들통난 뒤 처리하는 법도 바뀌었다. 몇 만원의 벌금만 내면 풀려날 수 있는데도 돈이 없어 노역형으로 대신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끝을 모르는 불황기 속에서 달라진 ‘2008 범죄유형’을 분석했다.
지난달 초, 20대의 젊은 아버지 윤모씨는 열흘 전 세살배기 아들을 집에 버려두고 달아났다며 경찰서에 자수를 했다. 그가 장애를 가진 아들을 싸늘한 집에 방치한 이유는 분유 값도 없는 어려운 경제형편 때문이었다.
일용직으로 용접 일을 하던 윤씨는 석 달 전 직장을 잃었다. 살길이 막막했던 그는 부인을 처가에 보내고 아들과 둘이 살고 있었다. 생활비조차 없어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겨우 끼니를 해결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돈을 빌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보증금 1백만원까지 모두 찾아 썼다. 분유 값마저도 없는 빈곤이 찾아왔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분유 값이 없어서…”
뿐만 아니다. 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훔치는 생계형 절도범죄도 증가시키고 있다. 몇 만원도 되지 않는 식품이나 물품을 훔치다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
지난달 23일 오후에는 서울 관악경찰서에 주부 김모(51)씨가 절도죄로 붙잡혀왔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토마토 등 과일 4만원어치를 훔치다 적발된 것. 생활이 어려워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호소한 그는 결국 불구속입건됐다.
길거리에 있는 각종 철근들이 하룻밤새 사라지는 일은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된다. 맨홀뚜껑, 승용차 바퀴, 소방호스 노즐, 등산로 펜스, 가로등 덮개 등 가리지 않고 싹쓸이를 해가는 절도범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농어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어촌에서는 남의 배에서 기름을 빼가거나 잡아 놓은 물고기를 훔치는 일도 다반사다. 해양경찰청이 국회 국토해양위 소속 신영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남의 어선에서 기름을 빼내 자신이 쓰거나 판매한 유류 절도 혐의로 적발된 경우가 지난해 한 해 동안 5건에서 올 8월까지 12건으로 늘었다.
올해 8월까지 물고기 값을 치루지 않은 채 물고기만 받아 가로챈 사례도 1백30건 발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5회에 비해 26배가량 증가한 것. 선박 매매 사기 사건도 8배가량 늘어났으며 국고 보조금을 가로챈 사기 역시 1백37회로 지난해 32회에 비해 4.2배나 증가했다.
이같은 생계형범죄의 증가는 경찰청이 발표한 ‘2008 범죄백서’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대표적 생계형 범죄인 절도범죄가 지난해 처음으로 20만 건을 넘어선 것.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절도범죄는 21만2천4백58건으로 1년 새 2만건(10.3%) 가까이 증가했다. 절도범죄는 2004년 15만5천3백31건, 2005년 18만8천7백80건, 2006년 19만2천6백70건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경기침체가 만든 또 한 가지 현상은 벌금형 대신 노역형을 택하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늘고 있다는 것. 대검찰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 노역장에 수용된 사람은 모두 2만7천5백74명이었다.
하루 평균 노역장에 수용되는 사람의 수도 늘고 있다. 하루 평균 노역장 수용자는 현재 2천8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6%나 늘었다. 현행 형법은 벌금형을 선고받고 벌금을 내지 못할 경우 노역장에서 일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벌금을 낼 돈마저 없는 이들이 몸으로 때우는 일이 증가하면서 여느 때보다 노역장이 북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불황기 범죄의 또 다른 단면이다. 청소년 범죄는 가정의 불안정과 연관성이 많다는 점에서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범죄백서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감소하던 소년범은 최근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14만3천18명이었던 소년범은 꾸준히 줄어 2005년 8만3천4백77명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이후 증가세로 돌아서 2007년에는 전년 대비 27.6% 늘어난 11만5천6백61명으로 껑충 뛰었다. 특히 연령별로 보면 15세 이하 범죄가 2006년 2만9천3백80명에서 지난해 3만9천백858명으로 35.6% 급증해 소년 범죄의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어른 뺨치는 10대 범죄
문제는 청소년들의 범죄가 어른들의 범죄와 별반 다르지 않을 만큼 흉포화되고 있다는 것. 용돈벌이를 위해서 성매매에 나서거나 친구에게 성매매를 시키는 포주 짓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7월에는 여고 중퇴생 강모(18)양 등 2명이 후배 박모(16)양에게 하루 1∼4차례씩 20일 동안 50여 차례나 성매매를 강요한 뒤 화대 수백만 원을 모두 가로채다 경찰에 적발됐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돈을 번 청소년 범죄도 발생했다. 고등학생 김모(17)군 등 2명은 학교 후배 등 60여명에게 순천의 한 양식장에서 일을 하게한 뒤 이들의 임금 수백만원을 가로채 경찰에 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사채놀이로 돈을 번 고등학생도 있었다. 군산에서 후배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온 10대가 경찰에 붙잡힌 것. 전북 군산경찰서는 지난 9월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들에게 돈을 빌려 준 뒤 두 배로 받아낸 유모(18)군을 공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유군은 동네 후배인 김모(13)군 등 2명에게 수천원씩을 빌려주고 변제 기일을 정한 뒤 갚지 못할 경우 두 배로 받아내 모두 60여만원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
유군은 후배들을 데리고 PC방과 찜질방을 다니며 돈을 계산한 뒤 이 돈에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수법으로 돈을 빼앗았다. 또 후배들이 돈을 갚지 못할 때에는 부모님의 귀금속을 훔쳐 오게 한 사실도 경찰조사에서 드러났다.
이처럼 경제 불황은 범죄의 수법과 유형까지 바꿔놓으며 씁쓸한 세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경제회복의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