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과 뜨거운 함성. 2002년 한일월드컵의 풍경이다. 전에 없던 호사를 누렸기 때문일까. 그때 달궈진 우리 국민의 열정은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개최권을 따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모두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구평회 E1 명예회장이다. 구 회장은 당시 월드컵유치위원장을 맡아 그야말로 ‘밑창이 닳도록’ 뛰었다. 일본 단독 개최로 굳어지던 초판 판세를 뒤집을 수 있던 것도 구 회장의 열정이 있어서였다.
구 회장 제출한 유치신청서에 집행부 ‘군침’
국민 성원도 더해져 일본 단독개최 뒤집어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구 회장은 1951년 락희화학 지배인으로 경영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4년 뉴욕에서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 LG의 첫 해외주재원으로 기록됐다. 락희화학 전무시절인 1965년 GS칼텍스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84년에는 국내 최초의 LPG수입사인 여수에너지(현 E1)를 설립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 회장은 한국인 최초로 태평양 경제협의회(PBEC) 국제회장을 지냈고 한·미경제협의회 회장, 무역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독보적인 영어실력과 국제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재계원로 가운데 ‘재계의 외교관’으로 통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재계의 외교관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경력은 따로 있다. ‘2대 월드컵유치위원장’이 바로 그것. 구 회장은 일본 단독 개최로 기울어 가던 분위기를 반전시켜 한ㆍ일 공동 개최를 이끌어 낸 숨은 공신으로 꼽힌다.
시간은 2002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6개월여 앞둔 지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축구관계자들을 비롯한 온 국민의 관심사는 한국이 과연 개최권을 따낼 수 있을지에 쏠렸다.
그러나 한국의 개최권 획득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무려 4년이나 앞서 유치활동을 시작한 일본은 각종 국제대회의 스폰서 활동 등을 통해 집행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한국의 추격이 가속화되자 총리까지 직접 나서 범국가적 차원에서 유치활동을 지원하는 등 격차 벌리기에 나섰다.
그러다보니 1995년초 일본의 대회 유치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든 한국은 당시로서는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구 회장의 역할이 빛났다. 구 회장은 FIFA에 유치신청서를 제출하면서 “2002월드컵을 유치하면 수익금중 25%를 세계축구발전 기금으로 배정해 이 중 10%를 FIFA에, 90%를 각 대륙연맹에 내놓겠으며 대회개최에 앞서 15일간의 훈련비를 각 국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제안은 집행부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버튜얼 경기장’을 만들어 그 수입으로 축구발전기금을 만들겠다”는 일본의 불투명한 제안보다 훨씬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민적 성원도 더해졌다. FIFA조사단의 한국 방문 첫날인 10월말, 비와 강추위 등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한국-사우디전을 보기위해 잠실주경기장에 7만인파가 모여든 것. 조사단은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경기장 숙박시설 등은 보지도 않고 합격 도장을 찍어 버렸다는 후문이다.
경영일선서 물러나
드디어 결전의 날인 1996년 5월31일이 밝았다. 이날 회의가 열리는 스위스 취리히 돌더그랜드호텔에는 적막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회의는 당초 마라톤으로 진행되리란 예상을 깨고 4시간여 만에 끝났다.
회의장을 나선 구 회장의 모습은 당당했다. 아시아 최초이자 21세기 첫 월드컵이 될 2002년 월드컵축구가 한일 공동개최로 확정 된 것. 기자회견장에서는 세계 인사들의 축하인사가 이어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이후 구 회장은 갈채를 뒤로하고 현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지난 2001년부터 한미협회장역을 맡으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현재 명예회장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을 뿐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전언이다. 대신 차남인 구자용 회장이 E1에서 경영능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