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舌禍)에 데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세무조사, 회장님 혀끝에서 시작됐나?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국세청 조사가 한창인 지금, 삼성의 표정엔 고민이 가득하다. 세무조사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조사가 ‘회장님 혀끝’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어서다. 지난달 10일 전경련 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의 ‘낙제점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삼성은 95년에도 ‘설화’로 큰 타격을 입은 전력이 있어 지난 악몽이 되살아날까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다.

삼성물산, 호텔신라, 삼성중공업 세무조사가 ‘한창’
현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낙제점은 아닌 것 같다”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호텔신라, 삼성중공업 등 삼성 계열사를 대상으로 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한창이다.

서울지방국세청은 지난 2월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호텔신라, 삼성중공업 등 삼성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나섰다. 국세청 조사2국은 4일부터 호텔신라에 대해 2개월가량의 일정으로, 조사1국은 삼성중공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사에 대해 삼성그룹은 통상적으로 있는 4년 주기의 정기세무조사라는 입장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재계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삼성그룹의 계열사가 일제 세무조사를 받는 배경에 이 회장의 “(현 정부가) 낙제는 면했다”는 발언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됐다는 것이다.

낙제점 발언에
MB 괘씸죄 적용?

이 회장은 지난달 10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지난 10년에 비해 상당히 성장을 했으니 낙제점을 주면 안 되겠죠.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 회장 발언에 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 정부정책의 지원을 받은 대기업 총수가 낙제점 운운하는 것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수출을 많이 하는 삼성그룹은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가장 큰 수혜를 누렸는데, 배은망덕하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비판도 이어졌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 회장이 청와대 성적을 평가하는 채점자냐. 너무 오만하다”는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정부와 여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자 삼성은 즉시 진화에 나섰다. 김순택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이 회장은 ‘발언의 진의가 그게 아니었다’며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삼성 정부 간 냉기류 세무조사에 영향 미쳤을 것”
“이 회장 특유의 화법과 리더십 때문에 생긴 오해”

결국 이 회장이 직접 나섰다. 이 회장은 지난달 31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활동을 위해 출국하면서 “내 뜻은 그게 아니다. 완전히 오해하신 것 같다”고 적극 해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통하지 않은 듯하다. 정치권은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이 회장을 바라봤다. 이 회장의 출국을 두고 “정치권의 반발과 세무조사 등 삼성그룹을 둘러싼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고 도피성 출국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4일 뒤, 국세청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하다. 삼성은 “이 회장의 발언과 어떤 관련도 없으니 확대 해석하지 말아 달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회장의 발언 이후 정부와 삼성그룹 간에 형성됐던 냉기류가 이번 세무조사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으리란 게 재계의 공통된 견해다. 특히 이번 세무조사에서 포착된 몇 가지 특이사항은 이 같은 의혹에 무게를 더했다.

삼성중공업의 경우 세무조사 기간이 105일로 통보됐다. 통상적인 조사 기간이 2개월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뭔가 석연치 않다. 조사인력도 대폭 증원돼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하고 있다. 국세청이 같은 그룹 계열사 2곳(삼성중공업·호텔신라)에 대한 세무조사를 같은 날 동시에 착수한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세무조사 기간 105일
조사인력 대폭 증원


이 회장의 발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삼성은 되살아나는 악몽에 치를 떨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중국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한국의 정치는 4류, 행정과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격노했고, 급기야 고강도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삼성은 상당기간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결국 삼성은 이 회장의 발언 5일만에 정부에 고개를 숙였다. 이후 이 회장은 정부정책에 대해 입을 꽉 다물었다. 지금껏 전경련 회장 후보로 가장 많이 추천된 이 회장이 한사코 회장직을 맡지 않은 것도 참모진들이 설화를 우려해 반대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삼성은 이 같은 오해가 빚어진 건 이 회장의 독특한 화법과 리더십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삼성그룹 측 관계자는 “그룹 안과 밖에서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내부에서라면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하는 말 자체는 상당히 고무적인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03년 삼성 사장단과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이 회장은 삼성전자 휴대폰사업을 맡고 있던 이기태 사장에게 “이제 겨우 졸업했군”이라고 말한 게 그 일례라는 설명이다. 당시 이 사장은 위기에 처한 휴대폰사업을 정상화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품질개선과 독창적 모델 개발에 힘써 애니콜 브랜드 인지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애니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이 사장은 삼성전자의 간판 최고경영자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 회장이 이 사장에게 한 발언은 휴대폰사업부문이 현재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절대 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서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라는 의중에서였다. 이번 낙제점 발언과 뉘앙스가 비슷하다.

달리는 말 채찍질
주마가편 리더십

이 회장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계열사 CEO들이 뛰어난 실적을 내도 좀처럼 다독여 주는 일이 없다. 되레 혹독한 매질을 한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의 리더십이다.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대대적인 경영혁신에 나선 당시 “앞으로 5년, 10년 후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해 사장단을 잔뜩 긴장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가 최근 수년간 반도체 휴대폰 LCD등의 호조로 사상 최고의 실적을 매년 갈아치울 때도 “지금이 중대고비다.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보고 신수종사업을 키워야 한다”며 담금질했다.

이 회장은 계열사들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유화 중공업 등 계열사에 대해선 ‘암3기 환자’ ‘선천성 불구자’ 등의 격한 표현도 서슴지 않으며 품질 혁신과 구조조정, 신수종 사업 등을 통해 환골탈태할 것을 촉구했다.

삼성특검 이후 일선에서 퇴진했다 지난해 경영으로 복귀하면서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전자의 주력제품들이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며 위기 경영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낙제점’ 발언 사태 일지>

♦2010년 11월, 국세청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삼 에버랜드 세무조사 착수

2011년 2월, 국세청 삼성물산 세무조사 착수


2011년 3월10일, 이건희 회장 “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히 성장을 해 왔으니, 낙제점을 주면 안 되겠죠. 흡족하다기 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 비판

3월11일, 여권 관계자 “이 회장이 청와대 성적을 평가하는 채점자냐. 너무 오만하다”

3월14일,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 정부정책의 지원을 받은 대기업 총수가 낙제점 운운하는 것이 서글프다”

3월16일, 김순택 삼성 미래전략실장 “이 회장은 ‘발언의 진의가 그게 아니었다’며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3월29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 “동반성장 위해 15대 대기업총수 만나겠다”

3월31일, 이 회장 “골치가 좀 아팠다. 이런저런 면에서 (정부가) 잘했다는 뜻이었다”

4월4일, 국세청, 삼성중공업·호텔신라 세무조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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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