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차 150만대 시대 ‘빛과 그림자’

  • 박민우 기자 pmw@ilyosisa.co.kr
  • 등록 2016.12.26 10:03:11
  • 호수 10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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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면 그만’ 온갖 꼼수로 한국 국민 무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6년은 수입차 업계에 혹독한 한해였다. 당장의 이윤만 추구하고 온갖 꼼수로 소비자를 농락하다 결국 성장세가 꺾이는 신세가 됐다. 한마디로 사필귀정, 인과응보란 지적이다.

수입차 150만대 시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수입차는 2009년 이후 매년 10만대 이상씩 늘어 2014년 100만대를 돌파했다. 지난 6월 말 현재 수입차 시장 개방 29년 만에 국내 등록된 수입차는 152만5654대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혈세 먹는
무늬만 회사차

잘나가는 수입차 시장. 그러나 앞으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비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계속되는 악재가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탈세 논란이다. 오너나 경영진이 고가의 차를 법인 명의로 구입해 세금을 탈루하는 편법이 도마에 올랐다. 관련법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등 정부와 정치권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수입차 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수입차 판매 증가는 법인차 증가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경제정의실천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서 사업자 업무용으로 팔린 차량은 10만5720대로 조사됐다. 이렇게 팔린 찻값만 모두 7조4700억원에 달한다. 1억원 이상 수입차 1만4979대 중 83.2%(1만2458대), 2억원 이상 수입차 1353대 중 87.4%(1183대)가 업무용으로 판매됐다.


국내서 판매되는 포르셰,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이른바 ‘슈퍼카’의 90% 이상이 업무용 차량으로 등록된다. 업무용 차량은 현행 소득세법과 법인세법에 따라 차량 가격은 물론 취득세 등 각종 세금과 보험료, 기름값 등 유지비를 5년간 무제한으로 사업자 경비로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오너나 그 일가, 또는 경영진이 고가 수입차를 회사 명의로 구입해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 있다. 대부분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 명의로 수입차를 구매한 뒤 개인용도로 타는 것은 결국 세금 탈루란 지적이다.

서민이 더 내는
이상한 자동차세

찻값이 달라도 세금은 똑같이 낸다. 동일 배기량의 1000만원대 국산차와 억대에 달하는 수입차에 매기는 자동차세가 다르지 않다. 서민에게 불리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자동차를 보유하는 동안 매년 납부하는 자동차세는 배기량 크기에 따라 세율을 차등화하고 있다.

배기량 1000㏄이하 승용차는 ㏄당 104원, 1600㏄ 이하는 ㏄당 182원, 배기량 1600㏄를 초과하는 자동차는 ㏄당 260원의 세율이 매겨진다.(세율은 지방교육세30% 포함 금액)

“우리만 차별” 우습게 보고 농락

당장 이윤만…한국고객 봉 취급

차량가격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배기량만 적으면 자동차세가 적게 부과되는 것이다. 때문에 최소 가격이 1억3000만원이 넘는 벤츠 S클래스(350d, 2987㏄)의 자동차세가 3320만원에 불과한 그랜저(HG300, 2999㏄)보다 오히려 적게 부과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마치 아파트에 대한 재산세를 아파트 가격이 아니라 넓이(㎡)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 중저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는 서민 납세자들에게 상당히 불합리한 조세제도라고 할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시판 자동차 중 1970만원짜리 준중형차 아반떼2.0(1999㏄)보다 자동차세를 적게 내는 4000만원 이상 고급승용차 모델은 무려 142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아반떼와 자동차세가 동일한 4000만원 이상 고급차 모델도 14개나 됐다.

142개 모델 중엔 수입차 판매 상위에 오르내리는 벤츠 C클래스와 E클래스, BMW 3시리즈와 5시리즈, 아우디A4와 A6는 물론 최고급 스프츠카 브랜드인 포르쉐 718박스터와 마칸까지 포함돼있다.
 

심지어 1억원이 넘는 최고급 차량도 준중형급 아반떼보다 연간 자동차세가 적게 부과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판매 가격이 1억1000만원에 달하는 볼보의 최고급 SUV ‘XC90 T8 AWD’는 2000만원이 채 안 되는 아반떼2.0보다 배기량이 30cc작기 때문에 자동차세가 적게 부과되고 있다.

비싸기만 하지…
불안한 안전

자동차의 기본적인 덕목은 ‘안전’이다. 국내 소비자들이 수입차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산차와 비교되는 탁월한 성능이 꼽힌다. 한 설문에선 수입차 구입계획자 5명 중 3명은 안전성과 성능 면에서 ‘수입차가 낫다’고 답했다. 실제로도 그럴까.

그러나 ‘수입차가 안전하다’는 얘기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국내서 판매되는 12개 차종을 평가한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쏘울EV·K5·그랜저HEV·아슬란·투싼·티볼리 등 국산차 6종과 폴크스바겐 폴로·미니쿠퍼·아우디 A3·포드 토러스·인피니티 Q50·BMW X3 등 수입차 6종을 평가했다.

국토부는 ‘안전한 차’ 최우수상에 현대차 아슬란을 선정했다. 또 12종 가운데 가격이 가장 저렴한 쌍용차 티볼리가 우수상을 받아 가격 대비 안전성이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잇달아 터지는 화재 사건만 봐도 수입차 안전에 의문부호가 달린다. 자칫 인명 피해 등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발생한 수입차 화재는 10건이나 된다. 자동차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더구나 리콜까지 늘면서 고객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기업으로선 자사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라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지만, 브랜드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진 소비자 불안을 키우는 역효과가 있는 게 사실이다.

피해 신고↑
부실한 A/S

수입차 업체들의 A/S도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비싼 돈을 주고 차량을 구입했다면 그에 걸맞은 A/S가 주어져야 맞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수입차 관련 소비자 피해 신고는 2011년 172건에서 2014년 210건으로 늘어났다. 210건 가운데 정비 관련 민원은 176건이나 된다.

이는 부족한 정비시설과도 직결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22개 수입차 업체가 등록한 공식정비센터는 모두 376개. 이 중 사고 처리가 가능한 정비센터는 174개밖에 안 된다. 당시 수입차 등록대수(127만여대)를 감안하면 1개 센터당 7000대를 담당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리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다반사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수입차의 평균 수리기간은 8.8일로, 국산차(4.9일)보다 1.8배 긴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 긴급출동서비스 차량을 보유하지 않은 수입차 업체도 상당수다.


무조건 풀옵션
비용 부풀리기

뻥튀기 된 각종 비용도 도마에 오르내린다. 먼저 수리비.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사고 수입차 1대당 지급된 미수선 수리비는 평균 279만원이었다. 이는 국산차(83만원)의 3.4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부품값 역시 외제차를 독점 수입하는 업체들이 마음대로 정하기 때문에 거품이 잔뜩 끼어 있다.

렌트비와 보험료도 차이가 있다. 보험사들이 수입차 사고 1건에 지급하는 평균 렌트비는 134만원으로, 국산차(37만원)에 비해 3.6배나 비쌌다. 반면 수입차 보험료는 비슷한 가격대의 국산차에 비해 2배도 채 되지 않는다.

수입원가 논란도 그대로다. 정부는 수입차 업체들에게 수입원가를 공개하도록 했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업체들은 영업상 비밀이란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관세법에 따라 관세청장이 대신 수입가격을 공개할 수 있지만, 수입업체의 사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가 길목을 막고 있다. 수입원가를 공개한 한 업체의 경우 마진율이 무려 50%에 달해 바가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비, 탈세, 결함, 수리비…
잇단 논란에 비관론 고개

수입차는 판매 가격에도 거품이 끼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왜 그럴까. 바로 옵션 때문이다. 국내서 팔리는 수입차는 대부분 ‘풀옵션’이다. 소비자는 가솔린·디젤, 2륜·4륜 중 하나를 고르는 것 외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고객이 원할 경우 세부 옵션을 고를 수 있지만, 출고가 6개월 이상 걸린다는 단서에 대부분 포기하게 된다.
 

미국 시장은 다르다. 소위 ‘깡통차’라고 불리는 옵션 없는 차량부터 세세한 옵션 가격을 모두 공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BMW 528i를 놓고 보면 한국에선 6740만원이라는 한 가격으로 정해져 있는 반면, 미국에선 4만9245달러(5365만원)부터 선택해 구매할 수 있다.

20∼30대 유혹
속보이는 할부

수입차들은 파격적인 할부금융 프로그램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유독 20∼30대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동차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현금(일시불)보다는 할부·대출 등 파이낸싱을 이용해 수입차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주요 수입차 업체들이 할부금융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경제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 할부금융의 유혹에 넘어가 ‘카푸어(무리하게 비싼 차를 구입해 신용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할부기간 원금과 이자를 매월 상환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할부금융과 달리 수입차 할부금융사는 원금유예할부 프로그램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다. 원금유예할부는 차량구입과 동시에 찻값의 30%를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 원금 중 10% 가량을 할부기간 이자와 함께 상환한 뒤 할부기간이 끝나면 60%에 이르는 원금을 한꺼번에 갚는 식이다.

차량을 구입하고 3년 후 차를 되팔아 또 다른 차량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프로그램이지, 돈이 없는 사람이 고가의 차를 사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인색한 경영
쥐꼬리 기부

인색한 경영도 도마에 오르내린다. 자국 대주주에 파격적인 배당을 하면서도 국내 기부는 개미 눈곱만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 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주요 8개 수입차 업체의 지난해 배당금은 836억1000만원이었다. 벤츠코리아의 지난해 주주 배당액은 585억6000만원으로 가장 많다. 이어 배출가스 스캔들의 주인공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 160억1000만원, 포르쉐코리아 60억4000만원, 볼보자동차코리아 30억원 등이다.

반면 8개 수입차 업체의 기부금은 42억2000만원에 불과했다. 벤츠코리아 20억5000만원, 한불모터스 2억1000만원, 포르쉐코리아 1억5000만원 등이다. 문제의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와 FCA코리아, 볼보자동차코리아, GM코리아는 기부금이 전혀 없었다.

수입차 업체들은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적이지 않다. BMW코리아(175명), 벤츠코리아(168명),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167명) 등 지난해 8개 업체가 고용한 임직원 수는 749명이 전부였다.

배출가스 조작 파문을 빚은 폭스바겐은 유독 한국에만 무성의한 태도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환경청(EPA)이 폭스바겐 디젤차의 배출가스가 조작됐다고 발표한 이후 폭스바겐은 해당 차량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약속했다.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조작 파문이 전세계로 확산되자 미국과 유럽 등에서 발 빠르게 수습에 나섰지만, 국내에선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리콜도 뭉그적거렸다. 국내 소비자들은 뒷전으로 밀렸다. 폭스바겐은 미국, 독일, 중국, 브라질 등 다른 나라에선 대대적으로 리콜 조치했지만, 국내엔 “해당 차량이 없다”고 버티다 정부에 제출한 시정계획서로 거짓말이 들통났다.

배출조작 외면
정부까지 농락

폭스바겐은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 정부까지 농락했다. 환경부는 폭스바겐 15개 차종 12만5500대가 임의 조작을 통해 배기가스의 배출량을 속인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리콜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폭스바겐이 제출한 결함시정계획서는 ‘배기가스 저감장치의 동작을 저해하는 소프트웨어 장치로 인해 일부 환경서 도로 주행시 질소산화물(NOx)의 배출량이 증가될 가능성이 있다’는 단 한 줄.

부실한 리콜 계획서는 여론은 물론 정부의 심기도 건드렸다. 환경부는 보완을 요구했고, 폭스바겐은 다시 제출했지만 이 역시 핵심사항이 빠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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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