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바꾼 일상 ‘천태만상’

대한민국 주인은 국민이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냄비 근성. 우리 국민들의 국민성을 표현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다. 쉽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는 냄비의 특성처럼 이슈에 따라 빠르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외면해버린다는 뜻으로,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다.

지난 10월29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지난 3일 6차에 이른 촛불은 ‘냄비 근성’을 비웃듯 더욱 크게 타오르고 있다. 대한민국은 촛불집회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주 역사를 쓰고 있는 상황이다. 촛불이 바꾼 일상, 대한민국을 들여다봤다.

집회를 주최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은 지난 3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6차 촛불집회에 전국 232만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이번 집회는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촛불집회를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고, 헌정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됐다.

가족 연인 학생↑
연말모임 광장서

매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토요일 집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정치 상황, 날씨 등을 고려해 ‘전주보다 감소’ ‘유지’ ‘증가’ 등 의견이 나온다. 언론 역시 촛불집회 참여 예상 인원에 따라 정치권에 가해질 압박, 사회 변화 등을 언급한다.


촛불로 가득한 광화문 광장의 전경이 월요일 조간신문 1면을 채운 지도 한 달이 넘었다. 100만명이 광장으로 뛰쳐나온 3차 집회 후 한풀 꺾일 것이라고 진단했던 몇몇 정치인들은 점점 늘어나는 촛불에 주눅이 든 상태다. 과거 광장에서만 울리던 외침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촛불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동창회를 광화문서 하기로 했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아이디 fe***씨는 지난 2일 한 커뮤니티에 ‘저희 동창회 연말모임 광화문입니다. 25명 참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친구들과 광화문서 모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30대 직장인 한모씨는 “친구들과 금요일에 송년모임을 하고 토요일에 함께 집회에 가기로 했다”며 “광화문이 2차 송년회 장소가 될 것 같다”며 웃었다. 20대 대학생 장씨는 매주 토요일 광화문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장씨는 “처음 집회에 가자고 했을 땐 싫어했지만 지금은 데이트 코스로 굳어졌다”며 “연인과 함께 온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고 놀랐다. 지난달 12일, 3차 촛불집회 당시 사회를 맡았던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서 “밑바닥 민심 보셨잖아요. 동창회, 동호회를 광화문서 합니다”라고 말했다.

시민들 가운데 집회나 시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심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를 보고 ‘빨갱이들’ ‘데모하는 놈들’ 등의 말이 여과 없이 언론 인터뷰로 나올 정도였다. 1∼6차 촛불 집회는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 시민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전문가들은 촛불집회가 6차에 이르는 동안 광장은 ‘만남의 장’ ‘자기치유의 장’ ‘축제의 장’ 등으로 발전했다고 진단했다.

정의석 지역사회심리건강지원그룹 모두 대표는 <광주일보>에 기고한 칼럼서 “이번 촛불집회는 외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양극화되고 불안하고 외로운 한국사회서 경험한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국민 치유의 장”이라고 분석했다.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부모,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자녀 등 가족 단위 참가자들은 집회를 구성하는 인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크게 호응해주는 광경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노동조합위원장, 시민단체 회원, 대학교 학생회장, 정치인 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광장의 발언대도 중·고등학생,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등 각계각층의 구성원에게 개방되고 있다.

일상으로 파고든 집회
회차 거듭될수록 진화
송년 모임도 거리에서

지난달 5일, 1차 대구 시국대회 무대에 오른 송현여고 조모 학생은 “평소라면 자습실 책상에 앉아 역사책을 읽으며 11월 모의고사를 준비했을 것”이라며 “허나 저는 부당하고 처참한 현실을 보며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에 오늘 살아있는 역사책의 현장에 나오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학생은 “56년 전, 1960년 2월28일 대구 학생들이 불의와 부정을 규탄해 민주주의를 지켰듯 우리 대구 시민들이 정의의 기적을 일궈야 할 때”라며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민주주의여 만세!”로 발언을 마쳤다. 대구 시민은 학생의 당찬 발언에 아낌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촛불집회 구성원이 다양화된 데에는 비폭력·평화 시위 기조가 크게 작용했다. 6차 촛불 집회에 전국서 232만명의 시민이 대통령 퇴진을 외쳤지만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0명이었고 충돌도 없었다. 6차 집회 때는 법원이 청와대 경계 100m 지점인 효자치안센터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청와대 100m 이내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집회 행렬이 청와대 100m 앞까지 간 것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법원으로서 이례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평가도 나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촛불 행렬은 청와대서 1.3㎞ 떨어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멈췄다. 이후 900m(3차), 500m(4차), 200m(5차)로 집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청와대와 가까워졌다. 매주 조금씩 북상한 민심이 청와대 코앞까지 온 것이다.
 

촛불집회에 모인 민심은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까지 집회에 네 번 참여했다는 40대 강모씨는 “우리가 박 대통령에게 권력을 준 건 나라를 잘 이끌어 달라는 뜻이었지, 일반인과 나눠가지라는 게 아니었다”면서 “너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막 수능을 끝낸 고3 학생 이모양은 “수능을 보기까지 정말 엉덩이가 아프도록 공부했다”면서 “그 사이 누군가는 잘못된 방법으로 명문대에 갔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일각에선 시민들의 분노 수위가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말도 있다. 6차 집회서 그간 등장하지 않았던 횃불이 나왔고, 대통령에 대한 구호도 하야, 퇴진, 탄핵, 체포, 구속 등으로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참가자들은 평화 시위 방식을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충돌을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경찰을 보듬어 안아주는 방식으로 시위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은 고 백남기 농민을 향해 직사 살수했다. 백씨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후 깨어나지 못한 채 지난 9월25일 세상을 떠났다. 백씨의 사망으로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촛불 집회 1차 참가자 수가 2만명서 1주일 만에 20만명으로 폭발했을 때 시민들은 공권력의 탄압이 자행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 2차 집회까지만 해도 살수차 등장 여부가 관심을 모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살수차에 물을 공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세웠지만 공권력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던 때였다.

평화·비폭력
의경 안아주기도

지난달 7일, 2차 집회 직후 이철성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서 “경찰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3만명에 불과한데 10만∼20만명이 모이고 시위가 격화될 경우 막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며 “최후방에서 불가피하게 살수차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현재 이 청장의 우려는 기우가 됐다. 오히려 이 청장은 지난달 21일 기자간담회서 19일 4차 집회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붙인 꽃 스티커를 떼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경찰 버스에 붙인 꽃 스티커는 평화 집회의 상징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26일, 5차 집회 때 서울 종로구 통인동 사거리서 선두에 서있던 집회 참가자 20여명은 두 팔을 벌려 대치 중이던 의경들을 끌어안았다. 이들은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경찰이 무슨 죄냐. 다 같은 국민이다”며 시민들의 말에 의경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촛불집회 사진을 보면 의경이 시민들의 집회 인증샷을 찍어주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의경과 팔씨름을 하는 집회 참가자의 모습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주말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일종의 대형 공공축제 같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한국 국민이 평화롭고 축제 형태로 집회의 새 장을 열었다”고 강조하는 등 외신도 평화적인 집회 분위기에 찬사를 보냈다.

봉사 나눔 배려
스마트 집회도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지난달 1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서 “촛불은 촛불일 뿐이지 바람이 불면 다 꺼진다. 민심은 언제든 변한다”고 말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김 의원의 말에 스마트폰과 LED 촛불을 들어 보이며 눈·비가 몰아쳐도 꺼지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실제 지난달 26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서 19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참가자들은 ‘순순촛불’ 등 각종 촛불 앱으로 주변을 환히 밝혔다. 바람이 불어도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민들이 증명했다.

스마트폰, SNS의 발달은 집회도 ‘스마트’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박항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은 ‘카이스트 대오 위치 보기’ 앱을 만들었다. 광장에 나부끼는 수많은 깃발로는 대오를 찾기 어려운 학생들의 불편함을 보고 고안했다.

박씨가 만든 앱은 대오 인솔자의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지도에 표시해 주는 방식이다. ‘집회출석’ 앱도 있다. 집회 당일 광화문 반경 2km 안으로 들어오면 자동으로 출석체크가 된다.

이외에도 공권력감시대응팀과 진보네트워크센터서 만들어 배포한 집회 시위 매뉴얼에는 처음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한 준비물, 법률 등이 담겨있다. 화장실, 응급시설, 촛불, 피켓 배포 장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편의시설 안내 앱도 등장했다.
 

집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을 위한 앱도 있다. ‘오천만 촛불’은 개인사정이나 근무, 육아 등으로 집회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촛불 사진을 SNS에 공유하면 참석 인원으로 체크해 해당 지역별로 분류했다. 그렇게 몰린 인원이 37만명에 달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등 각종 인터넷 생중계 채널에도 시민들이 몰렸다. 이들은 현장 참가자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등 뜨겁게 호응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
의원에 카톡 제보도

외국에 살고 있는 국민들도 온라인 촛불을 켜는 등 국내서 일어나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LA에 거주 중인 문모씨는 “매주 한국서 열리는 집회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참여할 수 없어 안타깝다”며 “일단 카카오톡 프사(프로필 사진)를 촛불로 해놓고 교민들끼리 진행하는 촛불집회에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나눔과 봉사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26일, 새마을금고 광화문 본점 근처에선 한 상인이 추운 날씨에 집회에 참가한 시민을 위해 따뜻한 물을 제공했다.

지난 3일, 김진태 의원의 지역구인 강원도 춘천에선 무료 ‘하야 커피’를 주는 푸드트럭이 등장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핫팩, 방석, 촛불, 종이컵 등을 무료로 나눠주는 시민의 손길이 집회가 거듭될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13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쓰레기봉투를 여러 장 사서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사람을 봤다며 글을 올렸다.

그 학생은 33만2000원을 들여 쓰레기봉투 100L 100장, 50L 100장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매번 집회 때마다 광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쓰레기 줍는 등 주변을 청소하는 시민들 덕분에 광화문 광장은 집회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없는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시민들의 촛불 퍼포먼스나 피켓 문구 등도 집회의 또 다른 볼거리로 떠올랐다. 3차 집회 때 100만명의 촛불 파도타기는 장관을 이루며 외신에 보도됐고, 5∼6차 집회 때 이뤄진 1분 소등행사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문구를 실현했다.

촛불집회는 10대 어린아이부터 70대 노인까지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하는 촉매제로도 작용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 8일 라디오 프로그램 <KBS 공감토론>에 출연, “저는 촛불민심의 국면에 대해서 전혀 겪어보지 못한 주권재민의 실체하는 힘을 느끼고 있다”면서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 역사의 순간을 보고 있다는 것에 정말로 가슴 떨리는 외경심이나 두려움마저 느낀다”고 말했다.

촛불민심은 최순실 게이트가 열린 이후 중요한 국면마다 정치권을 압박했다. 촛불을 통해 전달된 시민들의 요구에 놀란 정치권은 화답했다. 의회는 시민의 대리인이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원칙이 현실화된 것이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국회의원의 휴대폰 번호가 무더기로 뿌려졌다. 시민들은 의원들에게 탄핵 관련 입장을 밝히라며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의원들은 시민 개개인의 요구에 답변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동안 민심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촛불이나 문자, 카카오톡을 통해 직접 듣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공개된 전화번호는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 7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에 카카오톡 캡처 게시글이 올라왔다. 주갤러가 올린 캡처에는 2007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청문회 영상과 관련 사안을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에게 제보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촛불 이후…
직접민주주의

제보를 받은 박 의원은 이를 영상 자료와 시각 자료로 만들어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에 참여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몰아붙였다.

김 전 실장은 그 때까지 최순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했다가 증거가 나오자 “기억을 잘 못했다. 내가 최순실을 모른다고 한 것은 전화를 하거나 만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등으로 해명하며 진술을 번복했다.

박 의원은 질의가 끝난 이후 “네티즌 수사대와 함께한 일”이라며 SNS를 통해 감사를 표했다. 누리꾼들은 “직접 민주주의의 쾌거” “온오프 합작 성공”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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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