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거론은 시기상조…정계개편 후 고민할 것”

<대한민국 이끄는 유력 정치인 릴레이 인터뷰⑧> 이인제 의원

오는 2012년 대선을 2년여 앞둔 시점에서 <일요시사>는 ‘유력 정치인 릴레이 인터뷰’라는 기획으로 편집국장 대담을 진행한다. 지난 세월 대한민국 정치발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앞으로도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판단되는 여야 유력 정치인, 정계 원로와와 만남을 통해 차제의 시대정신과 정치발전 과제 등에 관한 철학과 지혜를 담아낼 예정이다. 그 여덟 번째로 5선의 무소속 이인제 의원을 만나봤다.

"정치자금법 개정안 시기와 방법에 문제 있어 난관"
"과학벨트 문제는 대통령이 정도로 풀어 나가야"

무소속 이인제 의원(충남 논산 금산 계룡)은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2~3차례 정도 지역 민심을 살피러 ‘지역구 탐방’에 나선다. 이 의원은 그동안 중앙 정치에 몰두해 지역 일에 약간 소홀히 했던 게 사실이라며 “지역민들께 송구스럽고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3번의 대권 도전에 실패하고 무소속으로 남아 고뇌에 찬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이 의원. “무소속이 오히려 의정 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에 편하다”는 그는 차기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정계 개편에 참여한 뒤…”라는 답변으로 슬쩍 비켜갔다. 다음은 일문일답.

- 정치자금법 개정을 둘러싼 최근의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
▲ 내용의 정당성은 미뤄놓고 국회가 갑자기 개정안을 들고 나오니 기소돼 있는 동료 의원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 한다는 얘기가 나와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국민이 의심하는 상황이고 그런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공청회 등을 통해 내용의 정당성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측면이 있는데, 무모했다. 절차를 밟아 신중하게 추진하는 게 옳다고 본다.

- 개헌 얘기가 많은데 추진 가능하다고 보는가.
▲ 개헌을 하기는 꼭 해야 한다. 현행 헌법은 87년 6월 항쟁으로 권위주의 세력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직선제 개헌 헌법이다.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다. 최근의 대통령들은 전부 임기 1~2년 앞두고 식물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가 아닌 국가의 실패로 직결된다. 경제 헌법도 손질하고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도 보충할 필요가 있고 남북 관계도 질적인 변화가 있으니 통일을 대비해 일부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 초기 국민을 상대로 개헌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정파 간 이해를 구하며 추진했으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대통령도 앞장서지 않고 여당도 단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야당도 정략적이라고 의심하니 개헌 동력이 떨어져 힘들다.

- 충청권을 지역구로 둔 의원으로서 과학비즈니스벨트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는 게 맞다고 보는지.
▲ 세종시법 수정안이 처리가 됐으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됐을 텐데 그게 안 되다 보니 다른 지역이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통령도 이상한 이야기를 해 충청권이 분노하고 상황이 점차 악화돼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정도(正道)로 풀면 된다. 대통령이 표만 얻으려 공약을 한 게 아니라 전문가의 견해를 얻어 충청권이 적지(適地)라 공약을 한 거다. 더욱이 세종시는 24조원을 들여 건설하고 있다. 과학벨트는 첨단 과학 도시가 필요한데 충청권이 아닌 곳에 벨트를 유치한다면 또 다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과학 도시를 건설해야 되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 현재 세종시에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데 정부 부처 일부만 이전하면 희망이 없다. 그러나 세종시가 과학벨트의 거점 도시가 되면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곧 국익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본다.


- 북핵으로 국민이 불안해 한다. 우리도 핵을 보유해야 하나.
▲ 북은 지금 핵을 개발하고 있는 중이다. (북이) 완성된 핵무기가 있느냐, 또는 핵무기를 운반할 수단을 갖고 있느냐는 문제에 내 개인적 판단은 ‘완성은 안 됐다’이다. 지금이라도 북한 핵 포기를 위해 우리가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된다. 북이 저러고 있으니 우리도 보유해야 된다는 얘기는 말은 쉽지만 좋은 정책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의 핵 보유를 정당화시켜 줄 위험이 있다. 한반도는 비핵화로 가는 게 옳다. 남과 북이 핵 무장을 하면 통일은 요원해진다. 북핵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만 우리가 핵을 갖는다 해도 북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와 협력해 최후 순간까지 북핵 저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핵 보유는 하책이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 얼마 전 재벌 총수가 ‘낙제점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던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실업난과 빈부 격차다. 중산층 붕괴로 인한 빈부 격차는 이 정권 들어 완화됐다고 볼 수 없다. 사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정책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너무 나쁘게만 이명박 정부를 평가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게 없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긍정적 평가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세론이 돌고 있는데.
▲ 현재 국민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민들은 지금 선택의 시간(대선)이 가깝지 않기에 편한 마음으로 이미지에 의존해 과거 지식을 기반으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단지 반응에 불과하다. 선거가 가까워오면 후보가 결정되고 이슈도 폭발하고 밀도가 높아지면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 이미지를 떠나 내용을 보며 (결정)할 것이다. 그에 따라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 무소속으로 정치하기 힘들지 않나.
▲ 무소속이 너무 편하다. 소속된 정당이 없다보니 편하게 공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에는 대통령을 목표로 중앙 정치에 몰두해 지역 주민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는데 지역 정치도 열심히 했다. 무소속은 예산안 등에서도 정파적 오해를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오로지 주민 입장만 반영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당에 있을 때보다 편했고 더 유리했다.

- 그럼 다음 선거도 무소속으로 나갈 건가. 자유선진당 입당 얘기도 돌던데.
▲ 다음 선거는 무소속으로 할 수 없고 올해 말에 상당한 정계 개편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때는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할 것이다. 어떤 내용으로 정계 개편이 일어날지 아직 모르니 마음을 비워놓고 있다. 마음은 88년 초선 당시 그대로지만 정치의 마무리를 해야 되는 시점이라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한다. 선진당 입당 얘기는 전혀 들은 바 없다. 의원들 개인 차원에서는 있을지 모르지만 선진당 차원에서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 세 차례의 대권 도전 실패로 고충과 아쉬움이 적잖았을 텐데.
▲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너무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좌절·실패를 겪으며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정치권 내부도 비교적 균형있는 시각을 견지하고 통일을 대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빈부 격차나 실업난 등 국민이 고통받는 상황을 돌파해야 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정치 리더십이 부족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을 높이는 부분에서 내 역할이 있기를 소망한다.



- 정치권에서 보수다 진보다 말들이 많은데 이 의원께선 보수인가 진보인가.

▲ 나는 중도 우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시대 변화에 뒤지지 않는 개혁, 자유에 대한 믿음, 통일 지향 등의 나의 정체성이다. 현재 진보를 내세우는 야권의 중심은 너무 좌편향이고 통일에 대한 비전도 비현실적이다. 반면 보수를 내세우는 우파의 중심은 과거 냉전 의식이나 권위주의로부터 실용주의, 개혁주의로 많이 이동한 상태다. 차기 대선의 아젠다는 통일이다. 다음 정권 기간 동안 결정적인 통일의 기회가 올 것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좌편향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면 그 기회를 그냥 흘러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다음 정권만은 건강한 우파세력이 결집돼 정권을 잡고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과거 ‘3김 시대’에서 정·관계를 두루 섭렵하셨는데 회고 부탁드린다.
▲ 3김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시작·성숙됐으며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시대로 이끌었고 김종필 전 총재는 산업화의 주역이면서 평화적인 민주화 이양에 상당한 협력과 기여를 한 지도자다. 나무가 크면 그림자가 큰 것처럼 양면성이 있지만 그 분들이 우리 역사에 기여한 공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세 분 지도자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세 분 모두의 인간적 면모를 볼 기회가 있었기에 행복하게 생각한다. 세 분의 장점을 배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충청권 유력주자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이제껏 지역 맹주를 꿈꿔 본 일이 없다. 87년에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지역 맹주를 꿈꿨으면 오히려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에 갔을 것이다. 대학 때부터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양김 분열 전 민주당에 발을 들여놨다. 출마도 경기도 안양에서 했고 도지사도 경기도에서 했다. 지역 맹주나 파벌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 정치를 해왔다. 지역 맹주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도 계신데 체질에 안 맞는 이야기다.
정치를 직업으로 지분을 가지고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체질에 안 맞는다. 파벌이나 지역이 맹렬하게 힘을 쓰다보니 내가 좌절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중앙 정치를 시작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 어느덧 5선 국회의원이신데 다음 총선과 대선에 출마할 의향은 있는지.
▲ 정치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다. 좀 더 크고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지역민들께 송구스럽고 부끄럽다. 6선 의원으로 만들어 주신다면 나라를 통일시키고 실업자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헌신할 생각이다. 다선이 없어지는 이유는 공천제도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국회는 다양한 선수가 섞여 있어야 좋다. 아울러 차기 대권 도전 여부는 좀더 시간을 가지고 고민할 부분이다. 정계개편 이후에나 어떤 그림이 완성되지 않을까 아직은 뭐라 말할 단계가 아니다.

- 지역구(논산·계룡·금산) 사랑이 대단하다는 평이 있던데.
▲ 다른 지역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지역은 정말 자랑스러운 지역이다. 논산은 농업이 강하고 유교 문화 유산이 풍부하다. 딸기 등 첨단 과학적 농업이 발달했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조선 500년은 유교가 국교였다. 논산시 연산면에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본산인 돈암서원(遯巖書院)이 위치해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유교 문화가 산재해 있다. 또 육군훈련소가 위치하는 등 군사 도시이기도 하다. 계룡시는 원래 논산시 부마면에서 3군 본부가 들어오면서 시로 승격됐다. 3군 본부가 있는 군사특별시로서 첨단국방과학교육도시의 비전을 키워나가는 신생 도시다. 세계 군 문화 축제 등의 행사도 잘 추진되고 있다. 중앙에서 예산도 지원됐으며 최우수 문화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금산은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인삼 약초의 메카로 건강·바이오·환경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지향하고 있다. 세계 인삼 엑스포도 많이 열리고 있다. 생약을 이용한 바이오를 선보였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 2011년 국회의원 이인제의 개인적 목표는.
▲ 우선 올해 안에 정계 개편이 이뤄지면 좋은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중앙 정치 무대에 복귀하는 게 소망이다. 내년에는 일단 총선에서 당선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내가 속한 정파 세력이 승리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차기 대선에서는 다음 정권의 가장 큰 아젠다가 통일이기 때문에 통일을 멋지게 이뤄내고 통일 이후 국민적 통합을 슬기롭게 추진하는 정치인이 되겠다. 강력한 에너지로 경제성장을 이끌고 고용도 창출하고 실업자 없는, 그래서 무너져가는 중산층을 보강해낼 수 있는 리더십을 만들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 끝으로 지금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이 대지진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위로의 메시지를 남긴다면.
▲ 가까운 이웃인 일본에게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아픔을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고 본다. 평소 일본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모두 잊어야 된다. 우리도 언제 그러한 자연 재앙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일본이 결국 다시 일어선다고 확신한다. 일본 국민들은 시련을 잘 견디며 세계 일류 국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잘 극복할거라 본다. 또한 일본이 빨리 일어서는 게 우리에게도 유리하다. 우리는 일본과 가장 밀접한 국가다. 경제 교역량으로도 두 번째다. 또한 상호의존적이다. 일본이 빨리 재건돼야 우리 국익에 유리하다. 앞으로 동북아는 급속하게 협력 관계로 바뀌어 갈 것으로 본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한·중·일보다 자기들끼리 전쟁도 많이 하고 적대적 관계였지만 시대 변화에 맞춰 살기 위해 통합을 했다. 통합된 화폐, 의회와 대통령을 만들었다. 동북아시아도 살기 위해 어쩔 도리가 없다. 통일된 대한민국과 일본과 중국은 그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 뜨거운 인류에로 함께 하면 더 가까운 이웃이 되고 신뢰도 커지게 된다. 아마도 미래의 초석을 놓는 다리가 될 것이다.


<정리 = 백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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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김미영 팀장’으로 불린 보이스피싱 총책 박모씨와 함께 필리핀 구치소서 탈옥한 조직원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서 처음 만난 이들은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조직을 꾸렸다. ‘비쿠탄 마약왕’으로 알려진 송모씨는 2022년 수원서 필로폰을 소지한 채 붙잡힌 김모씨의 상선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 8일 본지가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를 최초 보도한 이후, 외교부 측은 루카스 베르사민 필리핀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탈옥한 이들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달라”는 공적 서한을 전달했다. 현재 박씨에 대한 검거 작전은 필리핀 이민청 도피사범추적팀과 필리핀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전담 경찰 부서)가 협력하고 있다. 새벽 탈출 어디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약 2년 전 비쿠탄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은 지난해 11월 필리핀 나가시(市) 카마린스 수르 주 구치소로 이감됐다. 3명 모두 불법 고용과 인신매매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서다.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1일에서 2일 새벽 사이 미리 준비한 오토바이와 차량을 이용해 탈옥했다. 필리핀 교정 당국은 지난 2일, 인원 점검 때 박씨 일당이 탈옥한 것을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마린스 수르 구치소에 대해 현지 제보자는 “담장이 낮고, 보초도 허술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에 탈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라며 “그들은 비쿠탄 교도소보다 허술하다는 점을 노리고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들어 이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탈옥한 일당이 도피하는 동안에도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2012년부터 필리핀 현지에 콜센터를 차린 보이스피싱 1세대다. ‘김미영 팀장’이라고 소개하며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금융기관을 사칭해 개인정보를 빼냈다. 박씨가 보이스피싱으로 가로챈 금액만 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8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서 근무하다가 수뢰 혐의로 해임된 경찰 출신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충격을 안겼다. 경찰 근무 당시 접했던 범죄 수법을 토대로 ‘김미영 팀장’ 사기 수법을 고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10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을 운영해 온 박씨는 2021년 10월6일 마닐라 인근서 붙잡혔다. 당시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 ‘박씨가 마닐라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대부분 중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이들에 맞서 중무장했다. 붙잡힌 박씨는 “필리핀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국내 송환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되기 위한 노림수였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박씨는)비쿠탄 내에서 식사를 판매하는 아저씨로 통했다”며 “박씨가 송씨, 신씨와 어울리면서부터 교도소 내에 마트를 인수해 장사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증언했다. 보이스피싱과 결합한 마약 유통 대포폰으로 텔레그램 마약방 개설 비쿠탄 교도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죄수들이 직접 돈을 벌거나 영치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 죄수들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조직을 꾸려 보이스피싱, 대포폰, 마약 유통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최근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 신씨가 비쿠탄 교도소 내에서 동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와 신씨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도 쏟아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신씨는 타인 명의로 개통한 유심칩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씨는 불법 유심칩 1개당 한국 돈 약 25만원을 받고 팔았다. 신씨에게 산 대포 유심칩으로 신분을 철저히 숨길 수 있게 된 송씨는 텔레그램으로 마약 전달책을 모집하고 유통하는 이른바 ‘마약방’을 개설했다. 평소 신씨가 재테크 사기, 주식 및 코인 리딩방 등을 운영해오면서 모은 수천명의 회원들은 송씨가 운영하는 마약방으로 초대됐다고 한다. 송씨는 채팅방서 ‘두목’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또 박씨는 신씨의 도움을 받아 수억원가량을 비트코인으로 환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마약과 거리가 멀었던 박씨가 송씨와 안면을 트면서 보이스피싱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 사업을 함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송씨가 필리핀 파사이 등에 있는 마약 공급책을 통해 한 달에 5kg 정도의 필로폰 유통을 지시했다”며 “송씨는 비쿠탄서 만난 중국 마피아로부터 싸게 구입한 필로폰 등을 드라퍼(전달책)에게 전달해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송씨가 드라퍼에게 준 배달료는 한화 약 1000만원가량으로 전해진다. “한국 싫어” 가짜 범죄 다수의 전달책이 송씨의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정황은 곳곳서 드러났다. 송씨가 고용한 운반책은 2022년 1월25일, 수원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하다가 붙잡힌 김모씨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당시 수원중부경찰서는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30대 남성 김씨를 긴급체포했다. 김씨는 이날 오전 8시7분께 장안구 영화동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했다. 앞서 ‘한 남성이 모텔서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했다. 경찰은 모텔 안에서 필로폰이 포장된 비닐백 30개를 발견하고 이를 압수 조치했다. 또 김씨를 상대로 진행한 마약 간이 검사서 양성반응을 확인했다. 경찰조사에서 김씨는 투약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텔레그램으로 필로폰 거래를 지시한 ‘orjinal8282’가 상선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orjinal8282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가 김씨에게 “수원으로 가서 모텔을 잡고 기다려라”며 “사탕(엑스터시) 50, 어름(필로폰) 50 좀 있다가 드랍해서 갖고 있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송씨와 비쿠탄 교도소서 함께 지냈던 제보자는 “orjinal8282는 송씨의 아이디”라며 “김씨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던 마약방 회원들은 송씨가 김씨의 고용주(상선)이었다고 적었다”며 텔레그램 채팅방 사진을 전했다. 송씨가 넘긴 마약을 유통하려고 한 사람은 또 있었다. 지난해 1월23일, 충남 서산서 아내를 살해하고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강주천이다. 그는 한국 경찰의 공조 요청으로 필리핀서 검거됐으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강주천은 지난해 6월 비쿠탄 수용소서 탈옥했다가 8일 만에 체포됐다. 탈옥 후 체포 당시 1kg의 필로폰을 소지하고 있었다. 강주천은 도피 자금을 벌기 위해 송씨의 지시를 받아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밥 먹듯… 탈옥 시도 비쿠탄 관계자들은 이른바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이 큰돈을 벌자, 박씨와 송씨 일당도 마약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봤다. 지난해 중순 박왕열은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서 “이젠 나보다 송씨가 마약왕에 가깝다”며 “한국으로 보내는 양이 내가 보낸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앞서 박왕열은 2016년 10월 필리핀 한 사탕수수밭서 한국인 3명을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의 범인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 <카지노>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에 구금됐다가 2017년 3월 탈옥해 두 달 만에 잡혔다. 2019년 10월에는 재판을 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던 중 재차 도주해 2020년 10월 다시 검거됐다. 박왕열은 이 기간에 마약왕 전세계로 거듭났다. 국내 마약 유통·판매 총책이었던 ‘바티칸 킹덤’ 이모씨에게 수억 원대의 마약을 공급했다. 이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등에게 팔렸다. 박왕열의 옥중 마약 유통 의혹은 이미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4월12일, 경남경찰청 광역수사대는 A씨 등 3명을 국내 중간 판매책에게 마약류를 판매한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유통책 중 한 명은 2022년 12월 NBP서 박왕열을 만나 국내로 밀반입해 보관 중인 마약류를 판매키로 공모하고, 지난해 1월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이용해 특정한 장소에 마약을 놓고 사라지는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엑스터시 100정, 필로폰 10g을 국내 중간 판매책들에게 600만원(도매가)을 받고 공급했다. 그동안 경찰은 박씨 일당 등 한국인 범죄자의 강제송환을 추진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다. 박씨 일당은 필리핀서 죄를 짓고 형을 받으면 국내 송환이 지연된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경찰은 현재 박씨에게 적용된 혐의 중 인신매매는 허위로 만들어낸 범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수원 모텔서 잡힌 전달책 상선” 박왕열 “이젠 송씨가 마약왕” 박씨가 쓴 꼼수는 이미 필리핀 도피 사범들 사이에 만연하다. 현재 필리핀 도피 사범은 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송환을 거부하는 범죄자들은 필리핀 현지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든다. 비용은 한국 돈으로 많게는 3000만원서 적게는 100만원 정도가 든다. 제보자에 따르면 “가짜 케이스를 만드는 건 흔한 일”이라며 “강간, 사기, 폭행 정도의 가짜 범죄를 만들어 재판에 출석하면서 국내 송환을 계속 미루는 것”이라고 전했다. 박씨가 국내로 송환될 경우, 최소 징역 15년서 25년 이상 집행될 수 있다. 지난해 6월 재판부는 2012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중국과 필리핀서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활동하며 피해자 435명에게 26억여원을 가로챈 B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송씨의 경우, 마약을 수출입·제조·매매하거나 매매를 알선 또는 그럴 목적으로 소지·소유한 것에 대한 처벌이 가해진다. 해당 혐의가 인정되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영리 목적 또는 상습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다. 필리핀 당국과 한국 정부도 탈옥범들을 추적 중인 가운데, 현지 법 적용을 고려하면 다시 붙잡히더라도 국내 송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필리핀서 저지른 다른 범죄의 조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아 한국으로 송환되려면 최소 6년이 걸린다. 특히, 탈옥 행위로 현지 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만큼 현지서 징역형을 선고받을 가능성도 크다. 송씨와 박씨에 관한 국내 송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서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국내로 이송하면 좋으나, 현재 수용자 이송 조약은 체결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무부는 “송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의 이송 요청을 지속하고 있다”며 “필리핀 이민국과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법무부의 이 같은 입장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가는 동안 이송 조약조차 체결하지 못한 점은 한국 정부의 소극 행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가 보이스피싱 혐의가 아닌 마약 유통 혐의로 송환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필리핀 정부가 ‘재량’을 근거로 거절할 가능성도 있으나 법무부는 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머나먼 국내 송환 이상화 주필리핀대사는 지난 14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필리핀 외교부 차관과 법무부 차관을 만나 박씨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요구했다. 한편, 박씨 일당 외에 인질강도 혐의로 수배돼있던 한 남성도 최근 현지 교도소를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필리핀 현지 경찰이 쫓고 있는 한국 국적의 수배범만 박씨 일당을 포함해 6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수배범들은 대부분 사기 혐의로 수배가 걸려 있었다. 이 중에는 10건 이상 수배가 걸린 수배범들도 있었다. 그만큼 교정시설 보안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