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억울하게 세상 떠난 고 백남기

평범한 농부 누가 죽였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달 25일, 농민 백남기씨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대회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중태에 빠진 지 317일 만이다. 백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과 정치권 인사, 경찰까지 나섰다. 사인 등 그를 둘러싼 여러 문제가 아직 봉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망 이후에도 영면에 들지 못한 채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백씨의 삶을 <일요시사>가 조명했다.

1947년 전남 보성서 태어난 백남기씨는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으나 1971년 위수령 시위 혐의로 1차 제적됐다.

위수령은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대통령령이다. 이 법에 따른 최초의 위수령은 1971년 10월15일 각 대학에서 반정부시위가 격화됐을 때 서울 일원에 발동된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비롯한 10개 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무장군인이 진주했다.

쌀값 폭락 항의
보성서 상경해

백씨는 1973년 10월 교내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고, 다음 해 수배돼 1975년까지 명동성당에 피신했다. 같은 해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했다가 학교서 2차로 제적됐다. 그 이후 수녀원서 잡부, 수도사 등으로 지내다가 1980년 3월 ‘서울의 봄’ 당시 복교했다.

백씨는 학교로 돌아간 뒤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고, 도보행진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던 중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서 계엄군에 체포됐다. 그 후 다시 퇴학처분이 내려졌다. 같은 해 8월에는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3·1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백씨는 그 이후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갔다.


1986년에는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했다. 이듬해에는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 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연합회장,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가톨릭 농민회 전국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우리밀살리기 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을 주도했고, 1994년에는 우리밀살리기 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으로 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14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전남동지회 회장, 지난해에는 우리밀살리기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물대포 사태가 일어났다.

백씨는 지난해 11월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남 보성서 상경했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노동, 학생 등 50여개 단체가 모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서울 대학로, 서울역, 서울광장 등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3만명이 모였다(경찰 추산 6만8000명). 당시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2008년 6월 서울 광화문 일대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주최 측 추산으로 70만명(경찰 추산 8만명)이 모인 이래 가장 많았다.

백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이행 촉구를 위해 120여명의 농민들과 버스를 타고 상경해 집회에 참석했다. 쌀 시장 개방으로 쌀값이 폭락하고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 쌀 한 가마니에 21만원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였던 당시 쌀값은 17만원이었다. 하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쌀값은 한 가마니에 10만원도 되지 않는 9만6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민중총궐기대회 경찰 물대포 맞고 중태
입원 317일 만에 사망…책임 공방 가열


백씨를 비롯한 농민들의 항의는 공허한 외침이 됐다.

백씨는 집회 당일 저녁 6시50분경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약 2m 정도를 날아가 쓰러졌다. 주변 시민들은 발견 당시 백씨가 입과 코, 귀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했다. 백씨는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4시간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지만 의식불명 상태로 사경을 헤맸다.

백씨를 치료해온 서울대병원 측은 지난달 25일 오후 2시15분경 백씨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백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을 비롯해 경찰 병력까지 서울대병원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씨의 사인을 두고 입장이 엇갈리면서 부검 여부를 두고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실제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지난달 26일,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백남기 농민 상황 및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부검을 통해 사인을 바꿔 책임을 모면하려고 한다”며 “유족과 대책위는 이런 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씨의 장녀 도라지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경찰이 병원 주변에 진을 치고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길 때도 방해하고 밤중에 부검영장을 신청했다고 들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 가족을 괴롭게 하는 경찰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백씨의 사망 다음날인 지난달 26일, 경찰이 신청하고 서울중앙지검이 청구한 영장에 대해 “부검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없다”며 기각한 바 있다. 경찰은 영장을 재신청했고 법원은 부검 사유 등에 대해 더 구체적인 소명자료를 요구한 채 판단을 보류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달 28일, 부검 영장이 발부됐다.

법원은 영장을 발부하면서 부검 장소는 유족의 의사를 확인하고 서울대병원서 부검을 원하면 서울대병원으로 할 것 등 조건을 내걸었다.

법원은 “사망 원인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부검을 실시하되, 부검의 객관성과 공정성, 투명성 등을 제고하기 위해 방법과 절차에 관해 구체적인 조건을 명시했다”고 설명했다.

조건의 세부사항은 ▲유족이 희망할 경우 유족 1∼2명, 유족 추천 의사 1∼2명, 변호사 1명의 참관을 허용할 것 ▲부검 절차 영상을 촬영할 것 ▲부검 실시 시기, 방법, 절차, 경과에 관해 유족 측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것 등이다.

집회 물대포 직사
뇌수술 후 의식불명

법원의 조건 제시는 그동안 부검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온 유족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영장 발부 후 열린 기자회견서 도라지씨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의 손을 다시 받게 하고 싶지 않다”며 “절대 부검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경찰과 대책위가 백씨의 시신 부검을 두고 대립하는 이유는 양측이 주장하는 고인의 사인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은 지난달 25일 백씨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사인을 급성신부전증이라고 밝혔다. 백씨의 사망진단서에 급성신부전증은 중간선행사인으로 기록돼 있다. 선행사인은 급성 경막하출혈, 직접 사인은 심폐기능정지다.


급성 경막하출혈은 외부 충격으로 두개골과 뇌 사이 경막이라는 얇은 막 아래 출혈이 생겼다는 말이다. 하지만 서울대병원 측이 사인을 급성신부전증으로, 사망의 종류도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고 발표하면서 유족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유족과 대책위는 백씨가 뇌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는 과정에서 급성신부전이 생겼을 뿐 사인은 뇌출혈로 봐야하며 병사가 아니라 외인사라는 입장이다.

'병사냐 외인사냐' 하는 문제는 백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가 원인이 돼 숨진 것인지, 개인적인 질병 때문에 숨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중요한 쟁점 사안이다.

경찰은 사태가 벌어진 직후부터 물대포 운용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물대포 사태 발생 직후인 지난해 11월16일 구은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서 “불상사가 발생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빠른 쾌유를 빌 뿐”이라면서도 “집회 당일 경찰의 살수차 운용은 전반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민중총궐기대회는) 유례없는 폭력집회였다”면서 “이번을 계기로 집회 문화가 바뀌었으면 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같은 해 11월18일 백씨의 가족과 전농 등 단체들은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지방청장, 제4기동단장 등 7명에 대해 살인미수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등으로 처벌해 달라고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살인미수가 적용되지 않을 경우엔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해 달라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경찰, 병원에 몰려”

2011년에도 경찰의 무분별한 물대포 사용에 대한 위헌소송이 헌법재판소에 청구됐던 적이 있었다. 박희진 당시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는 2011년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박씨는 집회서 경찰이 직사 살수한 물대포에 맞아 고막이 찢어졌고, 함께 참가했던 당시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이강실 목사 역시 물대포에 맞아 뇌진탕 부상을 입었다. 이후 두 사람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청구했다.

헌재는 2011년 제기된 청구에 대해 2년 반이 지난 2014년 6월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물포 발사 행위는 이미 종료돼 심판청구가 인용되더라도 권리 보호의 이익이 없다고 해석했다.

또 집회 및 시위 현장서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근거리에서 물포 직사살수라는 기본권 침해가 반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물포 발사 행위의 위법성은 법원이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정해 판단할 문제일 뿐 헌법적 해명을 통한 심판 청구의 이익도 없다고 봤다.

당시 헌재 결정은 재판관 6대3의 의견으로 갈렸다. 반대의견을 낸 재판관은 “집회 및 시위 현장서 물포가 반복적으로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소수 의견 재판관들의 예상처럼 근거리 물대포 직사살수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박씨는 민중총궐기 집회 물대포 사태에 대해 “경찰의 물대포 사용 방식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백씨의 사고는 언젠가는 나올 수밖에 없던 참사였다”고 비판했다.
 

지난 3월 백씨의 가족은 국가와 경찰청장 등을 상대로 2억40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당시 도라지씨는 “사건이 발생한지 130일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며 “헌법소원 청구, 형사고발, 손해배상 청구까지 가족 입장에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했다”고 했다.

살수차 내부 모니터에 찍힌 영상 일부를 언론에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증거보전신청을 통해 입수한 동영상에는 백씨가 10여초가량 물대포를 맞는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게 찍혀 있다.

병사 vs 외인사…사인 두고 대립
아직 끝나지 않은 사태 결론은?

유엔특별보고관의 ‘일침’도 있었다. 집회·결사 자유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1월 한국을 찾은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하 특보)은 기자회견서 “한국의 집회의 자유가 무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키아이 특보는 경찰의 집회 관리 방식에 대해 “물대포는 백씨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우 위험한 무기이고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킬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키아이 특보는 지난 6월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21페이지 분량의 실태보고서를 내고 우리나라 집회결사 자유의 후퇴와 한국 정부의 집회시위 진압 방식에 대해 강하게 우려했다. 또 경찰의 물대포 사용이 무차별적인데다 특정인을 겨냥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부는 “한국 경찰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시위대에 물대포를 사용한 적 없고 불법 폭력 시위자를 막는 데 사용했을 뿐”이라며 반박했다.

키아이 특보는 백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부검 반대를 촉구했다. 키아이 특보는 지난달 28일 유엔 공식홈페이지에 “백씨의 유족과 지인들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며 “경찰의 물대포 사용에 대해 철저하고 독립적인 수사를 한국 정부에 요청한다”고 했다.

이어 “영상을 통해 본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 사용이 백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명확하다”며 “유족의 뜻에 반해 백씨의 시신을 부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지난달 12일에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서 물대포 사태와 관련해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는 강 전 경찰청장, 구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백씨의 가족 등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에선 경찰의 과잉진압, 집회의 폭력시위 여부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증인으로 출석한 강 전 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끝내 물대포 사태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한 후에 답변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법원 부검 영장
유족 절대 불가

한편 경찰은 일단 백씨의 부검 영장을 당장 강제 집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유족을 접촉하고 설득해 긴 호흡으로 접근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유족은 부검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영장 유효기간인 오는 25일까지 긴장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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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현지서 탈옥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현지서 탈옥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모씨와 조직원 3명이 필리핀 현지 수용소서 탈옥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와 함께 보이스피싱 등의 범행을 함께한 조직원 포함 총 4명은 최근 필리핀 루손섬 남동부 지방 비콜 교도소로 이감됐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지난 4월 말, 현지서 열린 재판에 출석한 박씨와 일당은 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서 도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 수사 당국 관계자는 “박씨와 일당 3명이 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구체적인 탈출 방식 등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던 바 있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간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왔다. 특히, 박씨는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는 후문이다. 박씨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 “박씨가 마닐라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필리핀 루손섬 비콜교도소 수감 보이스피싱 이어 마약 유통까지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또, 박씨는 새로운 마약왕으로 떠오르고 있는 송모씨와 함께 비콜 교도소로 이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비쿠탄 교도소에 수감돼있는 한 제보자에 따르면 “박씨의 텔레그램방에 있는 인원이 10명이 넘는다. 대부분 보이스피싱과 마약 전과가 있는 인물들로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씨는 본래 마약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송씨와 안면을 트면서 보이스피싱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 사업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교도소 내에서 마약 사업을 이어왔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경찰 안팎에서는 “새로운 조직을 꾸리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들이 비콜 교도소서 탈옥을 계획 중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비쿠탄 교도소 관계자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서 약 100만페소(한화 약 2330만원) 정도면 인도네시아로 밀항이 가능하다. 비콜 지역 교도소는 비쿠탄보다 탈옥이 쉬운 곳”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지난 7일 외교부와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측은 정확한 탈출 방식이나 사건 발생 일자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고 일축했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