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세태> 열대야가 바꾼 밤문화 천태만상

밤새 좀비들처럼 ‘흐느적~흐느적’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반갑지 않은 손님 열대야가 찾아왔다. 불볕더위와 열대야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밤 문화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때아닌 특수에 새벽 시간 영업을 하는 점포들이 늘어난 것. <일요시사>에서 특별하게 열대야에 맞서는 사람들을 취재했다.

계속되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열대야는 전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최저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일 최저기온이 2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무덥고 짜증 나는 밤을 말한다. 이에 저마다 목적지를 정하고 집을 나선다.

아예 술먹고
뻗어버리자?

매년 여름 인기를 끌었던 호프집과 영화관, 찜질방 등이 북적이는 것은 물론이고 시원한 마트에서 장을 보며 더위를 식히는가 하면 대형 서점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동굴과 산으로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매년 불볕더위로 인해 가장 큰 특혜를 누리는 업종은 편의점 및 주점업계다. 날씨가 더울수록 갈증 해소를 위해 시원한 맥주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 차가운 음식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기 때문. 한밤중 기온이 올라갈수록 이들의 매출도 함께 상승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 친구들과 만나 식사나 음주를 즐기는 일도 많아졌다. 실내 더위를 참기 힘든 열대야인 만큼 가정에서 저녁을 먹기보다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하며 찌는 더위를 달래고자 한다. 이에 고깃집이나 치킨집 등지에서도 1인분 주문 시 1인분 추가 증정 이벤트를 여는 등 열대야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아파트 단지의 한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회사원 한준탁(30)씨는 “너무 더워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면서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맥주 한 잔을 함께 하니 가족들도 너무 좋아한다”며 웃었다.

호프집·극장 등 전통 피서지 북적
시원한 대관령 인근 캠핑족들 붐벼

영화관의 심야 관람객도 크게 증가했다. 늦은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들과 에어컨 바람도 쐬고 영화도 관람할 겸 극장을 찾는 것. 평일 심야는 평소 한가한 시간대지만, 무더위 시즌엔 낮 못지않게 붐빈다.

최근에는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 식당들의 심야영업이 확대되면서 한밤중 소비자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부인과 영화관을 찾은 회사원 김지만(28)씨는 “시원하고 쾌적해서 더운 줄도 몰랐다”고 즐거워했다.

여의도 한강 공원에도 돗자리를 펴고 강바람을 쐬거나 가벼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빈다.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김상윤(31)씨는 “날씨가 너무 더워 더위를 식히러 나왔다”면서 “집에는 못 있겠다. 강바람이라도 쐬어야 살만하다”고 말했다.
 

남편과 13개월된 아들과 함께 나온 회사원 배유미(30)씨는 “종일 일하고 공원에 나오는 게 피곤하긴 하지만 더운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무더위가 시작된 지난달 하순 이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10∼20%가량 늘었다. 시원한 곳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최고의 피서지로 느껴진다.


대형 서점에는 독서를 위해 마련된 작은 의자와 난간도 설치돼있다. 책으로 빽빽한 책장 아래 자리를 잡고 독서 중인 사람들이 많다. 영화관과 마트, 실내 쇼핑몰처럼 대형 서점도 매출이 20% 가까이 늘었다.

일산에 있는 한 대형 서점은 야간에도 문을 닫지 않는 심야 책방을 운영할 계획이다. 저자와의 만남, 번역가와의 북 토크, 그리고 영화 상영 등 재미있는 즐길 거리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심지어 서점 내에 텐트까지 마련돼 이색 캠핑을 즐길 수도 있다.

심야 마트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마감이 진행될 시간에도 고객이 빠지기는커녕 북적거린다. 한 마트 직원은 “날씨가 더워지니까 야간에 고객들이 많이 오는 것 같다. 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말했다.

마트 인산인해
빈손 쇼핑 늘어

직원 말대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주류코너다. 맥주를 구매하기 위해 마트를 찾았다는 직장인 김기원(43)씨는 “집도 근처고 올림픽 경기도 밤새 볼 겸 겸사겸사 맥주와 안줏거리 사려고 찾았다.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현아(24) 씨도 “친구들이랑 한강 가서 맥주 마시려고 마트에 들렀다. 마트에 오니까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집 근처 대형할인점을 찾은 신경식(49)씨는 “떨이로 파는 물건도 싸게 사고 모처럼 아내와 데이트 기분도 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대관령으로 캠핑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한여름에도 주요 내륙도시보다 낮은 기온과 불쾌지수를 기록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주요 시·군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어선 날에도 대관령면은 27도를 기록했다.

평창군의 브랜드는 ‘HAPPY700평창’으로 평창의 평균 고도는 사람의 생체리듬에 가장 적당해 살기 좋다고 알려진 해발 700m이다. 특히 대관령지역은 대부분이 해발 700m 이상이어서 여름철 한낮에도 뜨겁지 않고 밤에는 서늘해 주민들이 긴팔을 입고 생활하기도 한다.

대관령면의 한 관계자는 “1년 중 에어컨은 1주일 정도밖에 가동하지 않는다. 동해안 주민들도 여름철 열대야가 있는 밤에는 더위를 피해 대관령으로 올라온다”고 말했다. 실제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캠핑족들이 대관령면의 한 휴게소로 몰려 차량 옆에 텐트를 치고 피서를 즐기는 모습도 진풍경이 됐다.

친구와 함께 휴게소로 피서 온 김정기(36)씨는 “직장이 강릉인데 열대야가 심할 때는 일부러 대관령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바로 출근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한여름에도 추울 정도다”고 말했다.

한여름에도 내부 기온이 10도 안팎을 유지하는 동굴은 최고의 피서지로 손색없다. ‘국민 동굴’로 불리는 ‘삼척 환선굴’은 연일 북새통이다. 1997년 10월 개방 이후 지금까지 총관람객 수가 1040만명에 달한다. 관람 안내서에 ‘우리나라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동굴’로 소개된다.

환선굴은 총연장 6.2㎞로 개방 구간만 1.6㎞다. 폭 14m, 높이 20∼30m의 동굴 입구에서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폭이 최대 100m까지 넓어져 보기만 해도 시원한 내부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석회암 동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동굴 내부 온도는 10∼14도로 일 년 내내 일정하다.


잠 못 자는 밤 떠나자 ‘롸잇나우’
천연 동굴과 폐광 냉풍욕장 인기

전국적으로 농촌체험마을은 수두룩하다. 필요한 맞춤형 체험을 찾는 수고만 더한다면 재미도 느끼고 더위도 식히는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태백 용연동굴’은 국내 동굴 중 가장 높은 해발 920m에 자리 잡고 있다. 평균 내부 온도도 9∼12도로 서늘해 피서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길이 843m, 폭 50m의 동굴 내부에는 대형광장과 리듬 분수, 석순, 동굴산호, 종유석 등 풍부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2005년부터 입구 등 동굴 주변에 조성한 야생화공원은 시원한 날씨와 더불어 피서객들에게 여름 추억을 선사한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동굴’은 지난달 23일부터 귀신소굴로 변했다. 한여름에도 10도 안팎인 천연동굴에 공포체험까지 더해져 ‘색다른 피서지’로 첫손가락에 꼽힐 만하다. 조명이 완전히 꺼진 동굴 속으로 작은 손전등만 들고 들어가는 화암동굴 야간 공포체험은 매년 9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

강원도 동해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천곡동굴’도 오싹한 공포체험 장소로 그만이다. 2014년부터 운영한 야간 공포체험이 소문을 타 여름철 무더위를 식히려는 피서객이 몰려든다.

최근 멸종위기종 1급이자 천연기념물 42호인 ‘붉은박쥐’(일명 황금박쥐)도 나타나 아이들 체험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충북 단양 석회암 ‘고수동굴’과 ‘천동동굴’도 매일 2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 더위 나기 명소로 거듭났다.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냉풍욕장이나 농촌체험마을도 이색 피서지에 이름을 올렸다. 폐광을 활용해 만든 충남 보령 청라면 ‘냉풍욕장’은 여름이 되면 바깥 온도와 10∼15도 이상 차이가 나 싸늘할 정도다.

피하는 게 상책
바람 찾아 고고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부터 9월까지 관광객이 몰리는데 주중에는 하루평균 500∼800여명, 주말에는 2000여명이 찾는다. 폐광 갱도 입구서 100여m 넘게 연결된 산책로를 걸으며 냉풍욕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냉풍욕장을 찾은 직장인 김용승(54)씨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폐광이 나오는데, 매우 이색적인 체험”이라면서 “한여름에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즐거워했다.

충북 영동 ‘농촌체험마을’은 다양한 체험활동을 내세워 더위에 지친 도시민을 유혹한다. 부담 없는 가격에 머물면서 뗏목을 타고 다슬기를 잡거나 복숭아·포도·블루베리 등 농작물 수확 체험도 할 수 있다.

영동군에만 농촌 마을 8곳이 있다. 각각 두부 만들기(원촌마을), 국악기제작(금도끼 은도끼 마을), 산나물 채취(옥륵촌마을) 등 독특한 체험을 내세웠다. 지난해 피서철에만 4만여 명이 농촌체험마을을 찾아 무더위를 날렸다.

전국적으로 농촌체험마을은 수두룩하다. 필요한 맞춤형 체험을 찾는 수고만 더한다면 재미도 느끼고 더위도 식히는 일거양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최저기온은 4일 26.0도, 5일 26.5도, 6일 26.6도, 7일 27.0도, 8∼9일 26.4도, 10일 26.1도, 11일 26.4도였다. 올해 서울의 열대야는 16일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서 열대야가 가장 많이 발생한 해는 1994년(36일)이었다. 2013년이 23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지난 8일 무인 기상장비로 측정한 경남 창녕의 낮 최고기온은 39.2도로 40도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는 다만 기상청의 공식적인 통계자료는 아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올해 낮 최고기온은 지난 10일의 경주 38.2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사상 최고기온은 1942년 8월1일 대구 40도였다. 서울의 역대 최고기온은 1943년 8월24일과 1939년 8월10일 38.2도였다.

8월 내내…
한동안 찜통

이처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온다습한 공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데다 강한 일사가 기온 상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불볕더위는 일단 16일 다소 주춤하겠지만 20일까지 전국 대부분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더위는 20일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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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