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광복절특사 노림수

‘때는 이때다’ 국면전환 히든카드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 옥중에서 죗값을 치루는 재벌 총수들에게 ‘광복절특사’라는 동아줄이 건네졌다. 역시나 매년 이맘 때마다 되풀이되는 ‘대통령바라기’를 그냥 지나칠 정부가 아니었다. 어떤 총수가 간택 받을지 벌써부터 뒷말이 무성하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이 마냥 호의적인 건 아니다. 해방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광복절을 경제사범의 죗값 탕감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비난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형국이다.

특별사면은 특정 범죄인에 대한 형벌 집행을 면제하거나 유죄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대통령의 조치를 뜻한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사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주로 연말·연초나 국경일, 명절 등 특정 계기가 있을 때 특사를 단행했던 게 관례.

표면 국민화합
실상은 봐주기

특사를 단행했던 역대 정권들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집권 말기에 접어들면 여지없이 특사 카드를 뽑았다는 점이다. 표면상 ‘국민화합’이라는 대명제를 앞세우지만 임기가 끝나기 전에 정치적 부담을 털고자 하는 취지가 숨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가석방 허용 범위에 미달하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통상 가석방은 형법 72조에 따라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은 이들 중 무기의 경우 20년, 유기의 경우 형기의 3분의 1을 넘긴 모범수형자를 대상으로 한다. 다만 이 기준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닌데다 대통령의 특사 결정은 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특징을 감안해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실시한 특사 명단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을 올렸다. 2002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기 말 특별사면에선 거물급 경제인들이 대거 혜택을 받았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김선홍 전 기아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이 부류에 포함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승인한 마지막 특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과 참여정부의 인사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파이시티 인허가와 관련해 8억원을 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47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천신일 세중 회장을 특사로 풀어준 전례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떨까. 일단 박 대통령이 특사를 최대한 자제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김영삼(9차례), 김대중(8차례), 노무현(8차례), 이명박(7차례) 등 전임 대통령들이 10차례 가까이 특사를 시행한데 반해 박 대통령은 지금껏 단 두 번 특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무분별한 특사를 지양하겠다던 약속만큼은 충실히 지킨 셈이다. 물론 약 18개월가량 남은 임기 동안 몇 차례 대규모 특사가 단행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 8일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과의 의원단 오찬에서 “국민 통합 분위기를 진작하기 위해 분야별로 규모 있는 특사 조치를 해주시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당내에서 특사의 필요성을 두고 의견이 모아지자 박 대통령은 즉각 수용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은 지난 11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광복 71주년을 맞이해 국민들의 역량을 모으고 재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사면을 실시하고자 한다”고 피력했다.

엄벌? 선처?
난처한 회장들

이번 광복절특사는 민생에 초점을 맞춰 서민과 영세업자, 중소기업인 등 생계형 사범을 위주로 단행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다만 세계 경기의 장기 침체와 함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 여파, 산업·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나라 안팎의 경제 위기가 겹쳐 특사 폭이 커질 수도 있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들이 광복절특사 명단에 이름을 올릴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핵심은 경제사범, 즉 재벌 총수들의 특사 대상 포함 여부이다. 특히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의 이름이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다. 형기를 거의 채웠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부각된 총수가 대다수.


총선 참패 남은 임기 레임덕 가능성↑
사면초가 대통령 8·15 사면 만지작

지난해 광복절특사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됐던 최재원 SK그룹 부회장은 형인 최태원 회장의 사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 최 회장은 징역 4년 중 2년6개월가량을 복역했고, 최 부회장은 3년6개월 중 2년3개월가량을 마친 상태였다. 형기가 거의 끝나간다는 점에서 최 부회장의 특사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2012년 10월 사기성 기업어음(CP) 발행 혐의로 구속된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은 징역 4년형을 받고 3년9개월 째 수감 중이다. 형기 이행 여부로 평가하자면 최 부회장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최 부회장이나 구 전 부회장의 경우 지난해 광복절 사면부터 꾸준히 사면 여부에 관심이 쏠린 인물”이라며 “엄격한 심사기준이 적용되지만 여러 차례 두 사람의 사면이 좌절된 만큼 특사가 되면 가장 유력할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면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 회장은 현재 대법원에 재상고한 상태다. 다만 재상고 포기 여부에 따라 특사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현재 이 회장은 신장이식수술 부작용과 유전병 등으로 구속집행정지에 놓여 있다. 비슷한 혐의(1000억원대 배임)에도 불구하고 감형 판결을 받았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사례를 감안하면 동정론까지 더해진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2014년 수감생활을 마쳤지만 집행유예 기간(5년)에 걸려 활동이 제한적이다. 경영 복귀 이후에도 대표이사 등 경영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 공식 행사 참석을 자제하고 있다. 사면을 받으면 책임경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재계에서는 재벌 총수들의 특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총수가 사면될 시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광복절특사 결과를 두고 희비가 엇갈렸던 SK그룹과 한화그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특사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재계 인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1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재벌 총수 사면 폭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고 최 회장을 제외한 대다수는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특사 한다면…
즉각적인 효과

특히 김승연 회장의 사면을 내심 기대했던 한화그룹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 회장이 사실상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완전한 경영복귀로 해석하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현재 김 회장은 공식적인 대표권이 없으며 해외출장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룹 차원에서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해외 사업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크다.

반면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사면의 혜택을 제대로 누렸다. 광복절특사 대상에 최 회장의 이름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던 지난해 8월13일 SK그룹 관련주들은 일제히 뛰어올랐다. SK이노베이션(6%), SK하이닉스(3%), SK(2%) 등 당일 SK관련주 가운데 SK텔레콤(-1.38%)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 주가가 올랐다.

‘동아줄’ 잡는 사람들 누구?
정치인·총수들 대거 포함될 듯

SK그룹 관련주들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큰 결단이 필요한 대규모 인수합병과 글로벌 진출 등 굵직한 경영 의사 판단에 속도가 붙을 거란 관측도 계속됐다. 최 회장이 복역 중이던 지난 2년7개월간 M&A시장에서 번번이 쓴맛을 봐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경제사범의 특사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취한 엄청난 폭리는 서민들이 평생을 일해도 모으기 힘든 천문학적인 액수임이 분명한 만큼 특사가 이뤄지면 엄청난 반대 여론을 감내해야 한다.

광복절특사 소식이 전해진 지난 12일 이정미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박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통해 올해도 비리 기업인들을 구제하려는 발상이 아닌지 우려된다”며 “박 대통령은 사면권 제한 약속을 떠올려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국면전환용 임시방편이라는 인식까지 겹치면 광복절특사의 의미는 한층 퇴색된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조만간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성급한 예측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급락하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를 뒷받침한다.

<리얼미터>가 7월4일부터 8일까지 조사한 주간집계에서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전주보다 2.25포인트 떨어진 33.0%로 3주 연속 하락세를 나타냈다. 이정현 전 홍보수석의 보도개입과 서별관회의 논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등 연속적으로 이어진 악재가 박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악재가 됐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재벌 총수들에게 무작정 법의 잣대를 내세우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 재벌 총수들의 허물을 덮어줘야 할 필요성마저 부각되기 때문이다. 일단 재벌 총수 사면은 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필요악으로 비춰지곤 한다. 더욱이 당초 계획했던 올해 국내총생산(GDP) 3%대 성장 목표는 공수표로 변질된 지 오래고 목표치 하향조정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필요성을 생각해봄직한 분위기가 조성된 셈이다.

가석방 요건을 갖추었다면 재벌 총수라고 해서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대내외 리스크가 커질수록 총수들이 기업경영에 매진하고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이다.


허점투성이
일종의 필요악

재계 관계자는 “경제 전반에 현재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역량이 극대화되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라며 “서민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정부의 의중이 명확히 부각되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현실을 일정 부분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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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