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서대문 독립공원에 ‘광복문’도 세우자

독립문서 광복문까지 이어지는 ‘광복의 길’

추석 연휴 때 서대문형무소 맞은편,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며 삯바느질까지 했던 옛 ‘옥바라지 골목’ 터에 자리한 한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숍 가까이에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두 역사의 현장을 번갈아 생각해보니, 중국 중심 질서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위계와 굴욕, 그 질서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던 몸부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땅을 덮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가 한 장면처럼 겹쳐졌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눈물과 기다림이 서린 옥바라지 골목이 이어지는 이곳은 과거의 흔적만 남은 공간이 아니다. 사대에서 자주로, 국권 상실에서 항일 저항으로, 그리고 마침내 광복에 이른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한자리에서 체감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는 ‘독립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흔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운 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독립문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13년 전인 1897년 완공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독립문과 독립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보다 먼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고 명이 멸망한 뒤에는 청나라와 관계를 이어갔다.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중국 사신이 오면 국가적 의전으로 맞이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모화관과 영은문이다.

모화관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오늘날 주권국가의 눈으로 보면 낯설지만 당시 중국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한 장면이다.

조선은 명·청과 위계적인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지만 자체 정부와 군대, 법률과 조세제도를 운영했고 대부분의 내정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다. 일본이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주권을 직접 빼앗은 식민 통치와는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국 중심 질서 속에서 조선이 겪었던 굴욕과 부담까지 지울 필요는 없다. 역사는 과장해서도 안 되지만 불편하다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1636년 병자호란은 그 아픔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었고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은 고향에서조차 ‘환향녀’라는 멸시를 받아야 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다시 상처받은 비극이었다. 일제의 침략을 기억하듯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역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수백년 동안 이어졌던 중국 중심 국제질서가 결정적으로 흔들린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청이 충돌했고 일본이 승리했다. 이듬해 4월 17일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인정하고 종래의 조공·의례 관계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 사이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도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청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 빈자리를 일본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바로 이 무렵 독립문이 등장한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철거됐고, 독립협회는 그 인근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다. 기존 모화관도 고쳐 1897년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협회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완공됐다.

따라서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해 만든 문이 아니다. 중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어느 외세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열망이 담긴 문이다.

그런데 독립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또 하나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다. 일제는 1907년 감옥 건설을 시작해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독립문이 완공된 지 불과 11년 만이었다. 이후 이곳에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갇혔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수감됐다가 1920년 순국했다. 중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겠다며 독립문을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을 외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서대문 독립공원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이곳의 역사를 지금보다 더 큰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는 없을까. 현재 옛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이 복원돼있다. 그렇다면 독립관과 주변 공간을 활용해 조선시대 모화관의 모습과 중국 사신을 맞던 당시 의례를 디지털·모형·전시 등으로 재현하면 어떨까. 모화관을 오늘의 가치로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국제질서 속에 있었는지를 후손들이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역사 그대로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광복을 상징하는 새로운 문 하나를 세웠으면 한다. 이름은 가칭 ‘광복문’으로 하면 좋겠다. 독립문도 있고 서대문형무소도 있는데 정작 그 고난의 역사가 어디에 도착했는지를 상징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우리 역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감방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민족의 독립 의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국제정세가 만나 마침내 광복을 맞았다. 그 기쁨과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국가보훈부와 서울시, 서대문구가 역사·건축 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모으고 국민적 공론화와 설계 공모를 거쳐 광복문의 위치와 형태를 결정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면 한다. 특정한 역사관을 일방적으로 새긴 기념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주권을 되찾은 날의 의미를 국민 모두가 함께 되새기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 공간을 연결하면 ‘모화관 역사공간-독립문-서대문형무소-광복문’이라는 하나의 역사길이 완성된다. 모화관은 중국 중심 국제질서 속에 있었던 조선을, 독립문은 자주국가를 향한 의지를 상징한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아픔과 그에 맞선 독립운동을 보여주고, 광복문은 마침내 나라를 되찾은 8·15를 상징한다. 사대에서 자주로, 국권 상실에서 저항으로, 그리고 광복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한 길 위에 펼쳐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길에 ‘광복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학생들이 모화관 역사공간에서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배우고 독립문을 통과하면서 19세기 말 자주독립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자. 이어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을 돌아보며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체험하고, 마지막에는 광복문을 통과하며 8·15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자. 교과서 수십 페이지에 담긴 역사를 몇백 미터의 길을 걸으며 몸으로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이 될 수 있다.

이 길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라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일제강점기와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침략만 기억하면서 중국과의 불편한 역사를 외면해서도 안 되고, 중국의 침략과 압박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축소해서도 안 된다.

어느 나라가 더 나쁜지를 겨루기 시작하면 역사는 정치의 도구가 된다. 중국의 잘못은 중국의 잘못대로, 일본의 잘못은 일본의 잘못대로 기록하면 된다.

8·15 광복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도 독립국가를 향한 의지를 이어갔다.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이라는 국제정세가 광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독립 의지와 희생도, 국제정세가 가져온 현실도 함께 바라볼 때 역사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서대문의 이 네 공간을 원한과 증오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모화관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오늘의 중국인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고, 서대문형무소를 보존한다고 오늘의 일본인을 미워하자는 것도 아니다. 광복문을 세운다고 어느 나라의 은혜를 찬양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 길이 가르쳐야 할 것은 나라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대한민국은 130년 전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세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췄고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역사와 외교 문제만 나오면 친중과 친일, 친미와 반미로 편을 가르곤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원수도 없다. 중국과 일본, 미국이 각자의 국익을 앞세우듯 대한민국도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원수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광복의 길’은 사대와 자주, 국권 상실과 항일 저항, 광복으로 이어진 역사를 한자리에서 성찰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머지않아 서울 한복판에서 수백년의 역사를 몇백미터에 담은 ‘광복의 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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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설계사 발목 잡는 ‘포괄양수도’ 함정

[단독] 설계사 발목 잡는 ‘포괄양수도’ 함정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보험설계사가 회사를 떠나더라도 자신이 모집·관리해 온 고객의 보험계약을 함께 옮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이른바 ‘포괄양수도’. 한 대형 보험대리점 산하 조직이 설계사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퇴사 시 기존 관리계약을 양수도 방식으로 이관해 주겠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작성했다. “나가도 기존 계약을 가져갈 수 있다”는 약속은 실제로 지켜질 수 있었을까. 보험설계사가 회사를 옮길 때 자신이 기존 회사에서 모집·관리하던 보험계약을 새 소속에서도 계속 담당할 수 있도록 넘겨받는 것을 업계에서는 흔히 ‘포괄양수도’라고 부른다. 설계사 입장에서는 이직 이후에도 기존 고객을 계속 관리할 수 있고, 계약 유지에 따라 발생하는 수수료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어 소속을 옮길 때 중요한 조건으로 꼽힌다. 양수도 약속 실행 미지수 다만 보험계약 자체가 설계사의 소유물인 것은 아니다. 보험계약의 당사자는 보험회사와 보험계약자이고, 보험설계사는 고객에게 상품을 설명하고 계약 체결을 중개한 대가로 보험사나 법조인보험대리점(GA)으로부터 약정된 수수료를 받는 구조다. 따라서 설계사가 자신이 모집한 계약에 대해 법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어 회사를 옮길 때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설계사가 한 법인보험대리점에서 근무하면서 고객 100명의 보험계약을 모집했다고 가정해 보자. 설계사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보험대리점으로 옮긴다고 해서 고객 100명의 보험계약이 자동으로 설계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보험계약 자체는 기존 보험사와 고객 사이에 그대로 유지되고, 설계사가 퇴사하면 기존 회사가 해당 계약을 관리하거나 다른 설계사를 담당자로 지정할 수 있다. 반대로 기존 회사와 설계사 사이에 계약 이관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설계사가 새 보험대리점으로 이동한 뒤에도 자신이 모집했던 계약을 계속 담당할 수 있도록 기존 회사에서 새 회사로 관리관계를 옮기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신규 보험대리점 간 협의와 수수료 정산, 보험사 전산상 담당자 변경 등 실무적인 절차가 뒤따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같은 계약 이관을 보험업법 등이 일률적으로 보장하거나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보험설계사의 이직에 따른 계약 이관을 직접 규율하는 법령이 없어, 실제로 계약을 넘겨줄지 여부는 기본적으로 보험대리점과 설계사 사이의 계약이나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영역으로 해석된다. 설계사 영입 ‘계약 이관’ 약정 본사는 양수도 불허…엇갈린 방침 이 때문에 보험대리점이 설계사를 영입할 당시 “향후 다른 회사로 옮기더라도 기존 계약을 이관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해당 약정이 중요해진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인카금융서비스 내 인카다이렉트 산하 사업단은 설계사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향후 퇴사할 경우 기존 관리계약을 양수도 방식으로 이관해 주겠다는 내용을 약정서에 담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인카금융서비스(주) 사업단 부속 약정서’에는 인카다이렉트 사업단과 설계사 김모씨 사이의 구체적인 계약 조건이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퇴사 이후의 계약 처리 방식이다. 약정서에는 “조직의 이동(퇴사) 시, 전체 관리계약의 양수도 조건으로 원활한 계약 이관 조치한다”고 명시돼있다. 설계사가 향후 조직을 떠나더라도 기존에 관리하던 계약을 이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계약 이관뿐 아니라 퇴사 이후 남아 있는 수수료에 대한 내용도 포함됐다. 약정서에는 조직 이동 또는 퇴사 시 “미정산 잔여 유지수수료는 월지급 또는 퇴사 시점부터 1년이 되는 시점에 정산해 지급한다”고 적혀 있다. 영입 당시 지급 수수료율과 일부 시책 등 구체적인 보상 조건도 함께 약정됐다. 앞서 작성된 또 다른 부속 약정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 역시 조직 이동 또는 퇴사 시 전체 관리계약을 양수도 조건으로 이관하고, 남은 유지 수수료를 별도로 정산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약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설계사에게 계약 이관을 약속한 주체는 인카금융서비스 본사가 아니라 인카다이렉트 산하 사업단이다. 인카다이렉트는 인카금융서비스 내에 편입된 영업 조직이다. 기존 다이렉트119가 인카금융서비스에 합병되면서 인카다이렉트라는 조직으로 편입됐고, 그 아래 다시 사업단과 본부 등 영업 조직이 구성돼있다. 계약 옮겨도 정산은 별개 앞서 김씨와 부속 약정을 체결한 사업단 역시 이 같은 인카다이렉트 산하 조직 중 하나다. 문제는 인카다이렉트 산하 사업단이 체결한 이 같은 약정이 인카금융서비스 본사의 방침과 맞아떨어졌느냐다. 인카금융서비스 본사는 지난 2024년 소속 조직에 포괄양수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방침을 전달했다. 김씨는 이후 본사의 방침과 자신이 체결한 약정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본사에서는 안 된다고 하는 포괄양수도를 사업단이 어떻게 약정할 수 있는 것이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본사가 포괄양수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면, 사업단이 설계사에게 향후 퇴사 시 전체 관리계약을 이관해 주겠다고 약정할 수 있었는지가 쟁점인 셈이다. 사업단 자체 판단만으로 계약 이관을 약속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인카다이렉트나 인카금융서비스 차원의 권한이나 승인이 전제돼있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약정서에 ‘계약을 이관한다’고 적었다고 해서 실제 포괄양수도가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계약을 넘기는 과정에서는 기존 소속 회사와 새로 옮길 회사, 보험사 등 여러 주체의 협의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설계사가 A법인보험대리점(GA)에서 B 대리점으로 옮기면서 기존에 관리하던 계약을 함께 가져가려 한다면, 우선 기존 GA가 해당 계약을 내보내는 데 협조해야 하고, 새 GA 역시 이를 받아 관리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이후 실제 보험계약을 보유한 보험사 전산에서도 담당 조직이나 설계사 변경 등 필요한 절차가 이뤄져야 한다. 근저당 걸고 3년 만 이관 계약을 넘기는 과정에서는 돈 문제도 함께 정리해야 한다. 설계사에게 지급되는 수수료는 계약 체결 시점에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지 기간에 따라 나눠 지급되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자체 재원으로 일부 수수료를 먼저 지급했거나 정착 지원금·시상금 등을 지급했다면, 퇴사 시 이를 어떻게 정산할지를 두고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실제 보험업계에서는 설계사가 다른 GA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 소속 회사가 계약 이관에 협조하지 않아 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반복돼 왔다. 계약 이관 여부를 일률적으로 정한 법적 기준이 없는 만큼, 기존 GA가 계약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판단할 경우 설계사가 이를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기존 GA 입장에서도 계약이 빠져나가면 향후 해당 계약에서 발생하는 수수료 등 수익이 줄어들 수 있다. 설계사의 이직과 함께 기존 고객 계약까지 다른 회사로 넘어갈 경우, 회사가 관리하던 계약과 수익 기반을 함께 내주는 셈이어서 계약 이관에 소극적일 유인이 있다는 설명이다. ‘포괄양수도’가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 진행은 쉽지만은 않다. 계약의 관리만 넘겨주는지, 남은 수수료까지 함께 정산하는지, 기존에 지급된 지원금이나 시상금에 환수 조건이 붙는지 등에 따라 설계사가 체감하는 조건은 크게 달라진다. 인카다이렉트 측 관리자들은 이와 관련해 포괄양수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지난 8월 김씨와의 카카오톡 대화에서 한 관리자는 “인카다이렉트 양수도 100% 된다”며 “W금융이 대표적이고, 개인이든 지점이든 자신들이 계속분을 받기 위해 안 한 거지 원하는 분들 다 해드렸다”고 말했다. 이들의 설명대로라면 포괄양수도가 이뤄지지 않은 사례는 회사가 이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설계사나 조직이 기존 계약에서 계속 발생하는 수수료를 받기 위해 스스로 계약 이관을 선택하지 않은 경우라는 취지다. ‘100% 가능’ 철석같은 약속 실제 이관까지 절차 수두룩 하지만 <일요시사>가 확인한 W금융 측 설명은 달랐다. W금융 대표는 DM(다이렉트 메시지)에서 “포괄양수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전했다. “내가 과거 인카 측에서 해촉된 뒤 곧바로 포괄양수도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인카다이렉트 측 설명처럼 퇴사와 동시에 기존 계약과 관련 권리가 한꺼번에 넘어온 것이 아니라, 해촉 이후 약 3년이 지나서야 기존에 관리하던 계약을 이관받았다는 것이다. 대표는 계약을 넘겨받는 과정에서도 별도의 조건이 뒤따랐다고 주장했다. 계약 이관 과정에서 근저당 설정 등의 부담이 있었고, 기존 계약에서 발생하는 유지 수수료 역시 충분히 정산받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다만 계약 이관을 어디까지 ‘포괄양수도’로 볼 것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퇴사 이후 기존 계약 일부 또는 전부가 다른 회사로 이관됐다고 하더라도, 영입 당시 약속한 조건에 따라 즉시 계약과 잔여 수수료 등이 함께 이전된 것인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별도의 협의와 조건을 거쳐 이관된 것인지는 성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포괄양수도 사례로 W금융을 언급한 경위에 대해 당시 김씨와 대화를 나눴던 사업단 관리자에게도 확인을 요청했다. 해당 관리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회사에서 전해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자신이 포괄양수도 가능 여부나 과거 사례를 직접 확인해 안내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후 A씨는 인카다이렉트를 떠나 같은 인카금융서비스 내 다른 조직으로 소속을 옮겨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포괄양수도 약정과 실제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를 SNS에 제기했다. 해당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자 인카다이렉트 측은 A씨의 게시물 등을 문제 삼았고, 결국 A씨는 ‘허위 사실 유포 및 회사 평판 리스크’ 등을 이유로 해촉 통보를 받은 상태다. 결국 문제는 인카다이렉트 산하 사업단이 설계사들에게 약정한 포괄양수도가 실제 100% 가능한 조건이었는지다. 또 본사의 방침과는 달리 ‘포괄양수도’에 대해 사업단이 자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도 쟁점이다. 방침 따로 약정 따로 인카다이렉트 측은 현재 회사 내부 규정상 설계사 퇴사에 따른 타사 계약 이관과 잔여 수수료 등을 일괄 이전하는 포괄양수도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소비자가 직접 요청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개별 계약 이관을 허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산하 사업단에서 포괄양수도가 가능하다고 안내하거나 별도 약정을 체결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만약 그렇게 했다면 사업단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하며, 잘못된 안내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내부 조사와 필요시 제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