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때 서대문형무소 맞은편,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머물며 삯바느질까지 했던 옛 ‘옥바라지 골목’ 터에 자리한 한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숍 가까이에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두 역사의 현장을 번갈아 생각해보니, 중국 중심 질서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위계와 굴욕, 그 질서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던 몸부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땅을 덮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가 한 장면처럼 겹쳐졌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눈물과 기다림이 서린 옥바라지 골목이 이어지는 이곳은 과거의 흔적만 남은 공간이 아니다. 사대에서 자주로, 국권 상실에서 항일 저항으로, 그리고 마침내 광복에 이른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한자리에서 체감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는 ‘독립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흔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운 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독립문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13년 전인 1897년 완공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독립문과 독립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보다 먼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고 명이 멸망한 뒤에는 청나라와 관계를 이어갔다.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중국 사신이 오면 국가적 의전으로 맞이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모화관과 영은문이다.
모화관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오늘날 주권국가의 눈으로 보면 낯설지만 당시 중국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한 장면이다.
조선은 명·청과 위계적인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지만 자체 정부와 군대, 법률과 조세제도를 운영했고 대부분의 내정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다. 일본이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주권을 직접 빼앗은 식민 통치와는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국 중심 질서 속에서 조선이 겪었던 굴욕과 부담까지 지울 필요는 없다. 역사는 과장해서도 안 되지만 불편하다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1636년 병자호란은 그 아픔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었고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은 고향에서조차 ‘환향녀’라는 멸시를 받아야 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다시 상처받은 비극이었다. 일제의 침략을 기억하듯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역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수백년 동안 이어졌던 중국 중심 국제질서가 결정적으로 흔들린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청이 충돌했고 일본이 승리했다. 이듬해 4월 17일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인정하고 종래의 조공·의례 관계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 사이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도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청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 빈자리를 일본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바로 이 무렵 독립문이 등장한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철거됐고, 독립협회는 그 인근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다. 기존 모화관도 고쳐 1897년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협회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완공됐다.
따라서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해 만든 문이 아니다. 중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어느 외세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열망이 담긴 문이다.
그런데 독립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또 하나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다. 일제는 1907년 감옥 건설을 시작해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독립문이 완공된 지 불과 11년 만이었다. 이후 이곳에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갇혔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수감됐다가 1920년 순국했다. 중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겠다며 독립문을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을 외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서대문 독립공원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이곳의 역사를 지금보다 더 큰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는 없을까. 현재 옛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이 복원돼있다. 그렇다면 독립관과 주변 공간을 활용해 조선시대 모화관의 모습과 중국 사신을 맞던 당시 의례를 디지털·모형·전시 등으로 재현하면 어떨까. 모화관을 오늘의 가치로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국제질서 속에 있었는지를 후손들이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역사 그대로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마지막에는 광복을 상징하는 새로운 문 하나를 세웠으면 한다. 이름은 가칭 ‘광복문’으로 하면 좋겠다. 독립문도 있고 서대문형무소도 있는데 정작 그 고난의 역사가 어디에 도착했는지를 상징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우리 역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감방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민족의 독립 의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국제정세가 만나 마침내 광복을 맞았다. 그 기쁨과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국가보훈부와 서울시, 서대문구가 역사·건축 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모으고 국민적 공론화와 설계 공모를 거쳐 광복문의 위치와 형태를 결정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면 한다. 특정한 역사관을 일방적으로 새긴 기념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주권을 되찾은 날의 의미를 국민 모두가 함께 되새기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 공간을 연결하면 ‘모화관 역사공간-독립문-서대문형무소-광복문’이라는 하나의 역사길이 완성된다. 모화관은 중국 중심 국제질서 속에 있었던 조선을, 독립문은 자주국가를 향한 의지를 상징한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아픔과 그에 맞선 독립운동을 보여주고, 광복문은 마침내 나라를 되찾은 8·15를 상징한다. 사대에서 자주로, 국권 상실에서 저항으로, 그리고 광복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한 길 위에 펼쳐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길에 ‘광복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학생들이 모화관 역사공간에서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배우고 독립문을 통과하면서 19세기 말 자주독립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자. 이어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을 돌아보며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체험하고, 마지막에는 광복문을 통과하며 8·15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자. 교과서 수십 페이지에 담긴 역사를 몇백 미터의 길을 걸으며 몸으로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이 될 수 있다.
이 길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라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청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일제강점기와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침략만 기억하면서 중국과의 불편한 역사를 외면해서도 안 되고, 중국의 침략과 압박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축소해서도 안 된다.
어느 나라가 더 나쁜지를 겨루기 시작하면 역사는 정치의 도구가 된다. 중국의 잘못은 중국의 잘못대로, 일본의 잘못은 일본의 잘못대로 기록하면 된다.
8·15 광복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내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도 독립국가를 향한 의지를 이어갔다.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이라는 국제정세가 광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독립 의지와 희생도, 국제정세가 가져온 현실도 함께 바라볼 때 역사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서대문의 이 네 공간을 원한과 증오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모화관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오늘의 중국인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고, 서대문형무소를 보존한다고 오늘의 일본인을 미워하자는 것도 아니다. 광복문을 세운다고 어느 나라의 은혜를 찬양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 길이 가르쳐야 할 것은 나라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대한민국은 130년 전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세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췄고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역사와 외교 문제만 나오면 친중과 친일, 친미와 반미로 편을 가르곤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원수도 없다. 중국과 일본, 미국이 각자의 국익을 앞세우듯 대한민국도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원수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광복의 길’은 사대와 자주, 국권 상실과 항일 저항, 광복으로 이어진 역사를 한자리에서 성찰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머지않아 서울 한복판에서 수백년의 역사를 몇백미터에 담은 ‘광복의 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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