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민의힘 장외집회에 가면 온통 빨간색이다. 의원과 당직자들은 빨간색 점퍼와 조끼를 입고, 지지자들은 빨간색 모자와 손팻말을 든다. 무대와 현수막, 정당 로고까지 빨간색으로 뒤덮여 멀리서도 국민의힘 행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빨간색은 이제 국민의힘을 상징하는 색깔이 됐지만, 그 붉은 물결을 바라볼 때마다 필자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국민의힘은 언제까지 빨간색을 고집해야 할까.
정당의 색깔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당명과 로고, 상징색에는 그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담긴다. 선거 때 후보의 옷과 유세 차량, 현수막과 홍보물의 색깔을 통일하는 것도 유권자의 기억 속에 정당의 정체성을 심기 위해서다. 기업이 브랜드 색깔을 통해 신뢰와 이미지를 쌓듯 정당도 상징색을 통해 자신이 어떤 정당인지 설명한다. 당색은 말없이 전달되는 정치적 언어다.
세계 정치의 오랜 전통에서 빨간색은 노동·사회주의·진보를 상징해 왔다. 노동자의 피와 혁명의 열정을 뜻하는 색으로 출발해 사회민주주의와 좌파정당의 대표색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파란색은 안정·질서·전통·신뢰를 나타내며 보수 정당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됐다. 영국 보수당은 파란색을, 노동당은 빨간색을 사용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대체로 보수는 파랑, 진보는 빨강이라는 정치적 문법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한국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은 주로 파란색을 사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은 초록색을 사용했고, 노동·진보정당은 빨간색을 앞세웠다. 제6공화국 대통령 가운데 노태우·김영삼·이명박 대통령은 파란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한 보수 정당 후보로 당선됐다. 보수 정당의 파란색은 안정과 신뢰, 국가 운영 능력을 강조하는 색이었다.
이 흐름을 뒤집은 것은 2012년 새누리당이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파란색 대신 빨간색을 선택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주도한 변화였다. 낡고 차가운 보수의 이미지를 벗고 열정과 변화,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새로운 보수를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시로서는 보수 정당의 이름과 색깔을 한꺼번에 바꾼 파격적인 정치 실험이었다.
빨간색의 효과는 강렬했다. 새누리당은 201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박근혜 후보는 같은 해 대선에서 당선됐다. 보수 정당이 진보의 색깔을 가져와 변화의 이미지를 선점한 전략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이후 자유한국당과 미래통합당을 거쳐 국민의힘이 된 뒤에도 빨간색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빨간색만큼은 14년 동안 보수 정당의 대표색으로 남았다.
그런데 제6공화국 대통령들을 당선 당시 소속 정당의 색깔로 나누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파란색 정당에서 당선된 대통령이 5명, 초록색 정당이 2명, 빨간색 정당이 2명이다. 정치적 계보로는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이 5명, 민주당계가 4명이지만 당색으로 보면 청·녹색 계열 7명, 빨간색 계열 2명이다. 빨간색 정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박근혜·윤석열 대통령뿐이다.
더 공교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인용 결정으로 2017년 파면됐고,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절차를 거쳐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회에서 탄핵소추됐지만 헌법재판소가 기각해 직무에 복귀했다. 따라서 우리 헌정사에서 국회의 탄핵소추를 거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파면된 대통령은 박근혜·윤석열 두 사람이며, 모두 빨간색 정당 후보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물론 두 대통령이 파면된 원인이 빨간색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색깔과 탄핵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두 사람의 파면은 헌법과 법률, 권력 행사와 정치적 책임의 문제였지 당색 때문이 아니었다. 빨간색은 죄가 없고 어떤 색깔을 사용하느냐는 정당의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서 상징은 현실과 만날 때 의미를 얻으며, 같은 색깔로 당선된 두 대통령이 같은 결말을 맞았다는 사실은 국민의힘이 가볍게 넘길 장면이 아니다.
빨간색 시대의 국민의힘은 열정만큼 분노와 대결의 정치도 키웠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적으로 규정하고, 중도층보다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에 끌려가는 일이 반복됐다. 국회에서는 타협보다 충돌이 앞섰고 당내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배신으로 몰았다. 빨간색은 변화를 상징하기 위해 선택됐지만 어느 순간 진영 대결과 정치적 격앙을 보여주는 색처럼 비치기 시작했다. 보수 정당이 지켜야 할 안정과 책임, 절제와 신뢰의 이미지는 오히려 희미해졌다.
국민의힘은 왜 자신들이 배출한 대통령 두 명이 연이어 파면됐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대통령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리면 집권당이 권력의 일탈을 견제하지 못한 책임은 사라진다. 대통령이 헌법의 경계를 넘을 때 제동을 걸기는커녕 침묵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지지층 결집에만 매달린다면 세 번째 집권에서도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 두 번의 파면은 두 대통령만의 실패가 아니라 집권당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다시 파란색으로 돌아가야 할까. 파란색은 오랫동안 보수의 안정과 신뢰를 상징했고, 노태우·김영삼·이명박 대통령도 파란색 정당 후보로 당선됐다. 그러나 단순히 빨간색을 벗고 파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국민의 신뢰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 색깔보다 그 안에 담긴 정치의 내용과 태도를 본다. 빨간색을 버리라는 말은 파란색으로 되돌아가라는 주문이라기보다 빨간색 시대에 굳어진 낡은 정치와 결별하라는 요구다.
국민의힘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당명을 바꿨다.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자유한국당과 미래통합당을 거쳐 국민의힘으로 간판을 바꿨지만 체질까지 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이름과 색깔을 바꾸고도 인물과 사고방식, 의사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혁신은 포장지 교체에 불과하다. 국민의힘이 빨간색을 버리기로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디자인 변경이 아니라 권위주의와 불통, 계파정치와 강성 지지층 의존을 끊겠다는 선언이어야 한다.
최근 장외집회를 뒤덮은 빨간색 물결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같은 구호를 외치면 결속력은 커지지만 그 안에서 다른 생각이 들어설 공간은 좁아진다. 정당의 목적은 이미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흥분시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까지 설득하는 데 있다.
빨간색만 보이고 민생 대안은 보이지 않는 집회라면 국민의힘에는 힘이 남아도 국민은 빠질 수 있다. 장외의 함성보다 국회 안의 실력으로 야당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다시 집권하려면 무엇을 지킬 보수인지부터 밝혀야 한다. 헌법과 법치, 시장경제와 안보를 지키면서도 국민의 삶과 약자를 보호하는 책임 있는 보수여야 한다. 고물가와 주거 불안, 청년 일자리와 자영업자의 위기에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고 민주당보다 더 민주적인 당내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에는 같은 편이라도 제동을 걸고, 반대편의 옳은 주장에는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두 대통령의 파면에서 배워야 할 진짜 교훈이다.
필자가 국민의힘에 빨간색부터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색깔에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빨간색으로 당선된 두 대통령이 모두 파면된 것은 우연일 수 있지만, 그 시대의 보수가 국민에게 남긴 상처까지 우연은 아니다. 국민의힘이 빨간색을 계속 사용하려면 그 안에 쌓인 분노와 대결, 불통과 권력의 오만부터 지워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색깔부터 바꾸고 완전히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빨간색보다 먼저 바꿔야 할 것은 두 대통령을 파면으로 몰고 간 ‘빨간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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