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때 추석의 중심에는 성묘가 있었다. 송편도 먹고 새 옷도 입고 친척들도 만났지만 어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벌초를 하고 성묘 갈 준비를 했다. 단순히 산에 올라 묘소 앞에서 절을 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자손이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부모를 찾아가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 시절 집안 어른들은 성묘를 앞두고 목욕재계하듯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었다. 추석날 아침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차례를 지내고 나면 온 가족이 함께 성묘 길에 올랐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 산길을 걸으며 조상의 이름과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 성묘는 예법이면서 가족의 역사를 배우는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
그때 어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성묘를 가기 전과 다녀온 뒤의 표정이 달랐다. 성묘를 앞두고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마음이 분주하면서도 기대가 있어 보였다. 묘소 주변을 정리하고 술 한잔을 올린 뒤 한참을 머물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오히려 말수가 줄었다.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고 돌아서는 이에게 남는 아쉬움 같았다.
어린 필자에게는 그것이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묘소에는 말하는 사람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른들은 왜 그렇게 정성을 다해 찾아갈까 싶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됐다. 성묘는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을 있게 해준 사람을 기억하고 그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요즘 추석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성묘를 하지 않는 가정도 늘었고, 하더라도 명절 당일을 피해 미리 다녀오거나 가능한 한 짧게 끝내기도 한다. 교통 체증과 가족들의 일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변화다. 화장과 봉안당, 자연장이 늘면서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는 문화도 달라졌다. 시대에 따라 성묘의 형식이 변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필자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형식보다 성묘를 대하는 마음의 변화다. 예전에는 성묘를 가기 전의 표정에 기대가 있었다면 요즘에는 다녀온 뒤의 표정에 해방감이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올해도 성묘 끝냈다”는 말을 들으면 밀린 숙제 하나를 처리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조상을 찾아간다기보다 명절에 해야 할 의무 하나를 마쳤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만나기 전부터 행복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설렌다.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며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즐겁다. 하지만 만남이 끝나고 헤어질 때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만남이 소중할수록 가기 전에는 기대가 크고 돌아설 때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대로 개인의 희망과 관계없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는 다르다.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가 입대하는 날보다 제대하는 날 더 기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군 복무의 가치와 필요성과는 별개로 개인에게는 일정 기간 자유를 내려놓고 감당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입대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이 무겁고 제대 날짜가 가까워지면 하루하루를 손꼽는다. 의무는 시작할 때보다 끝났을 때 마음이 가벼워진다.
필자는 오늘날의 성묘가 이 두 모습 가운데 어디에 가까운지 묻고 싶다. 조상을 찾아가는 성묘라면 떠나기 전부터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야 할 의무로만 받아들인다면 빨리 다녀오고 싶고 끝난 뒤 홀가분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성묘를 가기 전보다 다녀온 뒤가 더 즐겁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성묘를 ‘기다림’에서 ‘의무’로 바꿔놓은 것은 아닐까.
물론 과거의 성묘 문화를 그대로 되돌릴 수는 없다. 가족은 작아졌고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도 많아졌으며 종교와 가치관도 다양해졌다. 수백㎞를 이동해야 하는 가정도 있고 묘소 자체가 없는 가정도 늘었다. 자녀와 손주들에게 옛날 방식의 성묘를 강요한다고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강요는 오히려 성묘에 대한 거부감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성묘의 형식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의미를 다시 알려주는 일이다. 묘소에 가든 봉안당을 찾든 집에서 사진을 보며 추억하든 중요한 것은 ‘왜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고 할머니가 가족을 위해 무엇을 견뎠는지 부모가 자녀에게 이야기해줘야 한다. 조상의 이름조차 모른 채 절만 하고 돌아온다면 성묘의 정신은 이어지기 어렵다.
성묘는 세상을 떠난 조상과 살아 있는 자손이 만나는 자리이면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자리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있었고 그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었으며 수많은 세대의 삶이 이어져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성묘는 그 긴 시간의 연결고리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일이다. 조상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뿌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묘는 미래 세대에게도 의미가 있다. 손주의 손을 잡고 증조부모의 묘소를 찾아 “이분들이 계셨기에 네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생생한 가족 교육도 드물다. 가족의 역사는 교과서나 인터넷 검색만으로 배울 수 없다. 부모와 조부모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다시 자녀와 손주의 기억으로 넘어갈 때 이어진다. 성묘는 그 기억을 전달해 온 오래된 가족의 교실이다.
추석도 여행과 휴식의 명절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긴 연휴에 해외여행을 떠나고 가족이 함께 휴식을 즐기는 것도 이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시대가 변하면 명절을 보내는 방법도 변한다. 다만 쉬고 즐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추석에 우리가 누구를 기억해왔는지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올해 추석에는 ‘언제 성묘를 다녀오지’보다 ‘누구를 만나러 가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차가 막힐까 걱정하기 전에 그곳에 잠든 부모와 조부모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할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올해 있었던 기쁜 일도 이야기하고 힘들었던 일도 마음속으로 털어놓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묘소 앞의 몇 분은 의례를 치르는 시간이 아니라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시간이 된다.
성묘의 위기는 사람들이 묘소에 가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위기는 묘소에 가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마음이 사라진 데 있다. 몸은 성묘를 가는데 마음은 빨리 돌아올 생각부터 한다면 성묘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반대로 조상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만 살아 있다면 성묘의 모습이 달라져도 그 정신은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지켜야 할 것은 절하는 횟수나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이번 추석에는 성묘를 마치고 돌아올 때보다 성묘를 떠날 때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듯 부모와 조부모를 찾아가는 길에 작은 설렘이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돌아서는 길에는 “끝났다”는 홀가분함보다 “내년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아쉬움이 남았으면 한다.
성묘가 끝내야 할 의무가 아니라 기다려지는 만남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석의 중심에서 다시 찾아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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