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경기를 시청하다 보면 선수들의 승부 못지않게 자주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하나 있다. 조직위원회 관계자와 대회 운영요원들이 입은 파란색 공식복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 ‘361°’다. 처음에는 아시안게임을 상징하는 어떤 숫자인가 싶었지만 알아보니 중국 스포츠 브랜드 로고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대회가 열리는 곳이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 스포츠 축제의 공식복에 왜 중국 스포츠 브랜드 361°가 새겨져 있을까.
361°는 중국 푸젠성 진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스포츠용품 기업이다. 2024년 매출이 100억위안, 우리 돈 약 2조원에 이르는 중국 4위권 스포츠웨어 브랜드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처럼 세계 어디에서나 익숙한 브랜드는 아니어서 우리에게는 숫자 ‘361’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361°는 이번 아이치·나고야대회의 최고 등급 후원사인 ‘프레스티지 파트너(Prestige Partner)’로 이름을 올렸고 후원 분야는 스포츠웨어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공개한 명단에서도 도요타·JR도카이·이온 등 일본의 굵직한 기업들과 나란히 최고 등급 후원사에 들어가 있다.
361°와 아시안게임의 인연은 2010년 중국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시작됐다. 이후 2014년 대한민국 인천,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으로 이어졌다. 항저우 대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실제로는 2023년에 열렸지만 공식 명칭은 ‘항저우 2022’였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항저우 대회를 앞두고 361°가 광저우·인천·자카르타에 이어 네 번째 연속 아시안게임 파트너가 됐다고 밝혔다. 이번 아이치·나고야까지 참여했으니 정확히 다섯 대회 연속이다.
그래서 필자는 361°를 ‘아시안게임 5관왕’이라고 부르고 싶다. 경기에서 금메달 다섯개를 딴 5관왕이라는 뜻은 아니다. 광저우에서 시작해 인천과 자카르타·팔렘방, 항저우를 거쳐 아이치·나고야까지 16년에 걸쳐 다섯번 연속 아시안게임 무대에 오른 기업이라는 의미다.
개최국도 중국에서 한국으로, 인도네시아로, 다시 중국으로, 이번에는 일본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관계와 경제 상황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361°는 자리를 지켰다. 선수에게 5회 연속 출전이 대단한 기록이듯 기업 마케팅에서도 5회 연속 공식 파트너는 눈여겨볼 만한 기록이다.
361°가 우리에게 아주 낯선 브랜드만은 아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361°는 최고 등급인 프레스티지 파트너였다. 당시 삼성·신한은행·대한항공·SK텔레콤·현대기아자동차 등 한국 대표 기업들과 같은 후원 등급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중국 스포츠 브랜드가 국내 굴지의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당시 경기장이나 대회 관계자들의 옷에서 이 숫자를 본 사람이라면 이번 나고야대회를 보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더 주목할 점은 361°가 개최국에 따라 일회성으로 후원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 스포츠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이다. OCA에 따르면 361°는 아시안게임뿐 아니라 2012 하이양 아시안비치게임과 2013 난징 아시안유스게임 등에도 참여했다.
한번의 대형 광고보다 국제 스포츠대회와 장기간 관계를 맺으며 브랜드를 반복해서 노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중국에서 알려진 브랜드가 한국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까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 배경에는 이런 장기 스포츠 마케팅이 있다.
브랜드 이름도 독특하다. 운동화를 만드는 회사가 왜 360°가 아니라 361°일까. 회사 측 설명에 따르면 361°는 한 바퀴를 뜻하는 360도에 한 도를 더해, 완성에 머물지 않고 혁신과 창의성을 더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숫자는 언어의 장벽도 비교적 적다.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과 일본인, 인도네시아인도 ‘361°’라는 세 숫자는 그대로 읽고 기억할 수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하나의 시장으로 공략하려는 스포츠 브랜드에 숫자로 만든 이름 자체가 국제화에 유리한 자산이 된 셈이다.
이번 대회에서 361°가 더욱 상징적으로 보이는 것은 개최지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식스·미즈노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를 보유한 나라다. 실제 이번 대회 프레스티지 파트너 명단에도 도요타·중부전력·JR도카이·이온 등 일본 기업들이 올라 있다. 그런데 스포츠웨어 분야에서는 중국 기업 361°가 최고 등급 파트너 자리를 차지했다.
중국 기업이 일본 안방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 종합스포츠대회의 공식 무대를 통해 자신의 상표를 아시아 전역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 후원의 힘은 광고판 하나를 설치하는 것과 다르다. 경기장 광고는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지만 공식복은 사람이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다닌다. 조직위원회 관계자가 기자회견을 해도 로고가 보이고 시상식과 공식행사에서도 노출된다.
TV 카메라가 사람을 비추는 순간 기업 로고도 함께 화면에 들어온다. 필자 역시 경기를 지켜보다 대회 관계자들의 파란색 공식복에 찍힌 ‘361°’를 보고 이 브랜드를 다시 찾아보게 됐다. 기업이 스포츠대회에 막대한 후원금을 투입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중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중국 제품에는 ‘값싼 제품을 많이 만들어 수출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기차·배터리·전자상거래·스마트폰에 이어 스포츠용품에서도 브랜드 자체를 앞세워 해외 소비자를 만나고 있다.
제품을 수출하는 데서 브랜드를 수출하는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스포츠는 국적과 언어를 넘어 젊은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통로다. 국제대회와 유니폼, 운동화를 통해 이미지를 꾸준히 축적하면 소비자는 어느 순간 기업의 국적보다 상표를 먼저 기억하게 된다.
우리 기업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한국에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제조업과 콘텐츠 기업이 많지만 스포츠 소비재 분야에서 국제대회를 장기간 자기 브랜드의 무대로 활용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번 후원하고 끝내는 방식과 10년, 20년 동안 같은 분야를 붙잡고 브랜드 이미지를 축적하는 방식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361°가 광저우에서 출발해 인천과 자카르타를 지나 항저우와 나고야까지 온 과정은 브랜드도 결국 시간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수많은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할 것이다. 2관왕과 3관왕, 어쩌면 5관왕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는 이미 또 하나의 ‘5관왕’이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광저우·인천·자카르타·항저우를 거쳐 마침내 일본 나고야 대회 관계자들의 가슴까지 들어온 숫자 세 개, ‘361°’다.
선수들이 메달을 놓고 경쟁한다면 기업들은 소비자의 기억을 놓고 경쟁한다. 361°의 아시안게임 5관왕은 중국 스포츠 브랜드가 지난 16년 동안 그 보이지 않는 경기에서 어떻게 달려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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