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도 잠시, 극심한 식량난에 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한국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후 모든 걸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던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박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우 박사는 조선인이라 차별 받으면서도 힘겹게 쌓아올렸던 일본의 모든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바로 한국행에 올랐는데요.
한국에서는 성금을 모아 가족 생계비로 100만엔을 보냈습니다.
우 박사는 이 돈으로 우량 종자를 비롯한 연구 서적을 사서 귀국했는데요.
열악한 연구 환경과 심각한 농촌 상황, 입국 두 달만에 발생한 6·25 한국전쟁.
그 상황에서도 묵묵히 연구를 하며 엄청난 품종 개량에 성공했습니다.
속이 꽉 찬 결구배추와, 제주도 감귤, 병충해에 강한 감자와 무까지 한국의 식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요.
도중에 어머니의 중태 소식을 들었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한국 정부는 출국을 막아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지 못하고 사망 전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고, 수술까지 받았던 지병은 결국 악화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위독하단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제자들에게조차 개발 중인 벼는 어떻게 되었냐 물었는데요.
정부는 애국자에게 수여하는 문화 포상을 내렸습니다.
건국 이래 두 번째 포상이었죠.
떨리는 손으로 상장을 받은 우 박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었군요. 기쁩니다.
그리고 3일 뒤 세상을 떠나시며 한국의 산기슭에 잠드셨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만 가능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뿌리인 성을 버리지 않았던 한 평생 경계선 위에서 살다 죽기 직전에야 '조국'을 부를 수 있었던 우장춘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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