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그런 말을 하는 계모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예전에 겪은 갈보의 추악성을 아이의 마음속에 주입하려는 야수의 얼굴이었다.
오래 묵은 화장독으로 인해 푸르스름한 낯가죽을 다시 진한 화장으로 가리고 입술엔 늘 빨간 루주를 바르고 있었다.
그런 정신적인 세뇌와 영혼에 대한 폭력은 열 두세 살이 되어 초경을 치른 후론 훨씬 더 심해졌다.
야수의 얼굴
“넌 할 수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구! 너 같은 반푼이, 반달이 오히려 매력적일 수도 있어. 제 잘났다고 뻐기는 년놈들은 젬병이야. 알았지? 넌 반푼이가 변신한 반달이야.”
그녀는 세뇌의 감옥에 갇혀 시시각각 괴로워하며 파르르 떨었다. 만일 그 무렵 의붓오빠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가출이나 자살을 감행했을지도 몰랐다.
의붓오빠는 계모의 친아들로 정인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몇 년 전에 불쑥 가출했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오빠는 코밑에 수염이 거무스름하게 돋고 오른쪽 눈가엔 전에 없던 흉터가 나 있었다.
계모와 달리 오빠는 정인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정인이 해죽 웃으며 다가가면 문득 싸늘히 돌아서 가 버렸다.
그래도 때론 머리카락을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하얀 손을 꼭 잡아 주고 포근히 껴안아 주기도 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어린 눈망울로 말없이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오빠의 메마른 입술이 눈가에 닿았을 때는 천국에 오른 듯했다. 그리고 예쁜 꽃이 달린 머리핀이나 일기장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오빠는 책 한 권을 책상 위에 놓아두곤 집을 나가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채색된 삽화도 들어간 그 아담한 책을 보며 정인은 밤새도록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여기서부터 몽키하우스에 수감된 여자들의 얘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정인과 의붓오빠가 육체 접촉을 거쳐 성관계까지 나아갔는가, 정신적인 사랑에서 멈췄는가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늘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는 작은 자물통이 달린 일기장을 누군지 슬쩍 훔쳐봤으나, 이 의문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므로 여자들의 공상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었다.
“아마 했겠지. 그 나이 땐 마음보다 몸이 쪼금 더 먼저 움직이잖아. 사내놈이 훌훌 떠난 뒤 계집애가 그리워 울고 짰다면 뻔한 걸 뭐.”
“그래도 순정파였을 수도 있잖아. 예쁜 동화책을 몰래 선물로 두곤 밤안개를 헤치며 묵묵히 떠났으니 얼마나 멋져. 아, 내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으면….”
“지랄허고 자빠졌네. 양갈보 생활 십년에 아직도 백마 타고 올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니 꽤나 꼴사납다야. 명자 넌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탈이라니까.”
“호홋, 마약보다는 더 건전하지 뭘 그러니?”
“저 XX년. 대체 언제 철이 들꼬?”
“세상이 추악해도 민들레는 핀단다. 노란 꽃도 귀엽지만, 무거운 씨앗을 매단 채 훨훨 날아오르는 하얀 날개를 보면 너무 경이로워. 난 순수한 영혼을 느껴. 더구나 걔들은 오누이 사인데.”
“오누이는 무슨 오누이래. 의붓 남매라곤 해도 따지고 보면 전혀 남남인걸. 그리고 민들레 꽃씨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게 꿈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꽃씨들은 척박한 땅에 더 많은 씨를 뿌려 생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거라구.”
“젊은 언니들, 보리밥 먹구 괜히 목청 높이 덜덜 말구 그냥 한숨 주무셔. 이런들 어떻구 저런들 어떡할 거야. 이미 양갈보가 돼 버렸는걸.”
결국 성관계까지 나아갔는가
정신적인 사랑에서 멈췄는가
“그래, 맞어.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인데 너무 심각하면 재미도 콩맛도 없지롱.”
그렇게 해서 남매간의 근친상간 의혹은 일단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고운 손때가 묻은 그 책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먼 이어도에는, 내리흐르기도 하고 치흐르기도 하는 바닷가 오두막에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 강씨가 이어도의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다가 이씨 처녀의 눈에 들어 정분을 맺고 쌍둥이 남매를 낳으니 이들이 바로 오라비인 은우와 누이 별이였다.
세월이 흘러 부모는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바로 이 별이가 세상 아가씨들에게, 사랑해도 좋을 상대가 있고 결코 안 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열댓 살이 된 처녀 별이가 제 오라비인 은우에게 품어서는 안 될 사랑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처음에는 별이도 자기 마음에 깃들어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는, 당연한 듯 여기고 오빠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추거나 그의 목을 팔로 감아 안거나 했다.
별이는 자신의 행동에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꽤 오랫동안 남매간이라는 것을 기화로 제가 하는 짓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오라비에 대한 별이의 사랑은 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오빠를 만나야 할 때면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차려 입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턱없이 애쓰거나, 자기보다 예쁜 여자가 오빠 곁에 있으면 터무니없이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별이는 제 느낌을 말로 나타내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별이의 욕망은 안으로 타들어갔다.
이윽고 별이는 남매라는 것을 나타내는 오라버니라는 호칭 대신에 ‘자기’라는 호칭을 더 즐겨 썼고, 은우가 자기를 누이라고 부르기보다 별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별이는 깨어 있을 때면 곧잘 부끄러울 만큼 탐욕스런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잠이 들면 그보다 더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
그녀는 제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잠자는 상상을 하고는 꿈속에서도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깬 별이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꿈에서 경험한 것을 되새겨보다가는 속으로 푸념을 했다.
사랑의 선
‘나같이 불쌍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어째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이며, 이 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다시는 이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래 내 오라버니가 심지어는 좋게 보지 않으려는 여자들의 눈에도 절세의 미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오라버닐 존경한다. 그래, 오라버니가 아니었더라면 사랑의 상대로 삼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의 누이이니 이 팔자가 사납구나! 아니야, 깨어서는 그분이 내 연인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없으니, 잠들어 꿈이야 좀 꾼들 어떠랴! 누가 내 꿈을 엿볼 것이며, 누가 꿈속에 누리는 기쁨을 탓하랴! 아, 오라버니여, 내가 만일에 이름을 바꾸어 오라버니와 혼인한다면 아버님의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또한 만일 오라버니가 나와 혼인한다면 아버님의 좋은 사위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아, 맞아, 우리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지. 아, 차라리 오라버니가 나보다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절세의 미남인 오라버니는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이들을 낳게 할 테지. 신께서 우리를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오라버니의 누이로 남아 있어야 할 테지. 우리가 나누어 가진 것이 우리를 남남으로 나눌 테지. 그런데 왜 나는 이런 아무 소용도 없는 꿈은 꾸는 것이지요? 아, 신이시여, 더 이상 이런 꿈은 꾸지 않게 하소서. 바라건대 이 금단의 욕망을 저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떠나게 하지 못하신다면 금단의 욕망에 굴복하기 전에 저를 죽이소서. 죽어 관 속에 들면 제 오라비로 하여금 저의 볼에 입 맞추게 하소서.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다 하고 있지? 내가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것이지? 대체 내가 어쩌려는 것일까? 안 된다, 이런 부정한 생각은 안 돼! 내 사랑은,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먼저 나를 살아했다면? 아마 나는 오라버니의 부정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을 테지. 그렇다면 나는 왜 먼저 호의를 보이면 안 되는가? 하지만 네 입으로 이 말을 고백할 수 있을까? 네가 오, 사랑이 나를 물러서지 못하게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부끄러워서 말을 못한다면, 은밀하게 써서 뜻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