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밤늦게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 산새 소리에 깨어나곤 했다. 겨울새들은 봄을 바라고 있겠지만 아직은 추운지 목청이 좀 떨렸다. 가끔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얼어 죽은 새도 보였다.
싸늘한 백설 위에 누운 새는 언뜻 꿈을 잃어버린 천사 같기도 했다. 짧은 삶 동안 푸른 하늘을 아마 인간보다 더 많이 보았을 새의 눈은 얇고 하얀 막으로 덮여 있었다.
마치 천상으로 날아간 자신의 영혼을 원망하는 듯싶기도 하고 축복하는 성싶기도 한 눈이었다.
원망과 축복
청운은 그 작은 시체에 하얀 눈을 모아 무덤처럼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건물 뒤꼍으로 가서 장작을 패어 차곡차곡 쌓았다.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려와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그건 청아했지만 새소리는 아니었다. 사람 목소리 같지 않은 탈속적인 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무슨 초탈적인 귀신이나 정령 같진 않았고 그저 순진무구한 미지의 존재였다.
새울음 같던 그것은 점점 앳된 소녀의 속삭임으로 변해 갔다.
“파랑새~내 파랑새는 어디 갔나?”
소녀는 작고 가냘픈 몸을 곧게 펴곤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이것만은 변치 않을 거야. 내가 만일 공주라면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쳤다고 해도 마음은 공주처럼 지닐 수 있어. 곱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공주처럼 행동하기가 한결 쉽겠지만, 아무도 몰라 줄 어려운 때에 늘 참다운 공주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훨씬 더 가치가 있을 거야. 음, 내가 만약 공주라면, 참된 공주는 혹시 자리에서 쫓겨나 비참해졌더라도,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비참한 백성을 만난다면 즉시 그들에게 가진 걸 나누어 주겠지. 언제나 자신보다 남들의 고통을 중히 여기고 베푸는 사람이 진짜 왕자고 공주야. 오, 하느님, 제 마음이 늘 참답고 또한 따스함을 지니도록 도우소서!”
소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청운은 잠시 일손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하얀 가운을 걸친 여자가 나비인 양 두 팔을 흔들며 팔랑팔랑 율동적으로 날아왔다.
“여기서 뭐해요? 운이 오빤 노예야?”
여자가 물었다. 청운은 대꾸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풋이 웃고 있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아담스런 몸매였다.
새벽빛이 차츰 밝아와 그 큰 언제나 눈물이 어려 있는 눈을 비추자 무슨 보석처럼 한순간 신비스레 반짝였다.
“운아, 여기서 뭐 하니?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멍하니 서 있니, 응?”
청운은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그녀도 그를 꽉 껴안았다.
“아유, 내 귀염둥이. 엄마가 보고 싶은데 오지 않아 미웠니?”
“응.”
청운은 어린 여덟 살 때 서울역에 버려진 채 엄마를 기다리던 그 안타깝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속으로 작게 대꾸했다.
정답던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교단에 헌납하곤 빈궁을 못 견딘 나머지 자식마저 차가운 객지에다 버렸던 것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안아 주니 좋아?”
“으응.”
청운은 처음엔 애처로운 여자의 말에 대꾸하는 척 짐짓 연기를 했었는데 어느새 감정이입이 돼 흐느끼고 말았다. 여자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운을 품속에 따스하게 껴안고는 등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아가, 아가.”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청운의 턱 밑에 닿을락말락한 아담한 체구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성모 마리아의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열아홉 살의 클럽 아가씨였다.
잘 울고 잘 웃는다는 사실만이 문제일 뿐 그 수용소의 요정 같은 존재였다.
소녀 기억은 먹칠 필름보다 더 캄캄
마음속 물음 영원한 비밀로 묻히다
그녀가 살짝 한 마디 걸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얼결에 미소로 화답하고, 무언가에 원한 맺혀 악독한 욕설을 퍼붓던 여자들마저도 회한의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삶의 악조건 속에 놓인 어느 누구도 그 요정을 부러워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정인은 반쯤 미친 듯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녀들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음속의 풍경화에 숨어 있는, 미치고 싶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상념이 변해 요정을 꿈꾼 건 아닐까?
그렇긴 해도 미친 요정보다는 현실의 양공주가 더 낫다고 자위하진 않았을까. 혹은 정인의 가여운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들은 자신의 신산스런 삶을 되새기면서 내심 울거나 웃으며 위안을 받진 않았을까.
또는 아마도 애처로운 요정을 가엾게 여김으로써 자기 마음을 높이고 정화시키고 밝게 하고픈 여심이 은근히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정인의 인생 여정은 사실과 달리 변화되거나 각색되고 있었다. 마치 요정의 내력을 빌려 자신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극화시키듯. 하지만 허황되진 않고 자신들의 실화를 담고 있었다.
다만, 사정이 그렇다 보니 한 여자의 인생극 속에 서로 상충되는 점이 섞여 들기도 했다. 그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이러했다. 정인은 충청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도시라곤 해도 변두리라 시골과 별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빈민들만 모여 사는 어두운 지역이었다.(그런 곳에서라도 태어난 게 좋을지, 아예 생겨나지 않는 게 좋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터였다.
아무튼 태어났으니 살아가야만 했으리라.)
약간 정신박약 증상이 있었다. 혹은 공주 몽상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뻥튀기 장수에 엄마는 변두리 다방 얼굴 마담이었다.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났는데 둘 다 술 중독자에다가 노름을 즐겼다.
아버지가 아주 미남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둘은 꽤나 정다웠지만 외딸 정인이 두세 살쯤 된 무렵부터 생활고 등으로 인해 싸움이 잦았다.
한편 아버지가 자가용 운전수였고 엄마는 부잣집 사장의 막내딸이란 설도 있다. 누가 먼저 상대를 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사랑의 도피 행각으로 부잣집 부모와 연이 끊어진 이후론 점차 가난해지고 말았다.
알코올 중독에 도박 성향까지 있는 그들의 둥지가 평온했을 리 없다. 정인은 늘 외로움과 불안에 떨며 자랐다. 대여섯 살 때 그 불안들은 하나의 거대한 공포로 변해 눈앞에 나타났다.
곤드레 만드레가 된 채 서로 할퀴고 때리며 싸우던 중 아빠가 무슨 짐승처럼 괴상스런 소리를 내지르며 엄마를 밀쳤다.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던 엄마는 마치 목에 용수철이 달린 인형마냥 머리를 세게 흔들더니 벽에 뒤통수를 박곤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힌 채 입에 거품을 물곤 사지를 파르르 떨었다. 정인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그 소녀의 눈동자는 크게 뜨여 있었지만 고정된 유리구슬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어린 소녀의 기억은 먹칠된 필름보다 더 캄캄했다. 엄마는 대체 왜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런 마음속의 물음은 영원한 비밀로 묻히고 말았다.
요정과 공주
인생극의 새로운 막이 오르고 계모가 등장했다. 다른 사람에겐 ‘여우의 좋은 점을 지닌 현모양처’로 보였지만 적어도 정인에게는 악녀 역을 맡은 주연 여우였다.
때리고 할퀴고 말라깽이가 되도록 굶기는 게 아니라 지독한 욕설을 통해 어린 소녀의 영혼을 멍들게 만들었다.
개쌍년이니 멍텅구리니 미친년이란 말보다는 “아가야, 똑똑히 따라서 해봐. 히히, 난 창녀야, 매춘부야, 양공주야 빨리 해!”라는 미친 듯한 은근짜의 강요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