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사법부와 행정부 수장이 또다시 대치 상황에 놓였다. 대통령선거 전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는 현 정부 출범 이후 1년이 넘도록 꿰맞춰지지 않는 모양새다.
우리나라의 권력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뉜다. 권력이 한쪽에 쏠리지 않게 견제와 감시를 하기 위한 ‘삼권분립’ 형태다. 문제는 각각 독립된 기관이지만 주어진 권력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정권의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이다.
잠잠하더니
최근 사법부가 행정부와 입법부의 맹공을 받고 있다. 특히 사법부 수장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강력한 사퇴 압박에 직면했다. 대법관 제청 문제로 불거진 청와대와의 ‘기싸움’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진 모양새다.
대법원에 따르면 조 대법원장은 지난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임명 제청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조 대법원장이 이 과정을 서면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헌법상 대법관은 대법원이 제청하면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때 대법원장이 청와대와 미리 후임에 대해 논의한 뒤 직접 대통령을 만나 대면으로 제청하는 게 관례였다. 조 대법원장이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앞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1월21일 노 전 대법관 후임 제청 대상 후보자로 4명을 추천했지만 조 대법원장은 임명 제청하지 않았다. 노 전 대법관은 지난 3월3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으나 후임은 5개월 넘게 정해지지 않고 있다.
조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 임명 제청이 늦어지면서 법조계에서는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에 이견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청와대와 대법원이 각각 원하는 후보가 다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대법관 공백 상태다. 이흥구 대법관은 다음 달 7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이 시기까지 대법관 임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두 자리가 공석이 되는 셈이다. 실제 조 대법원장은 노 전 대법관과 이 대법관의 후임을 동시에 제청했다.
하지만 서면 제청 논란으로 대법관 공석 상황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여권에서 조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을 두고 ‘대통령 패싱’ 논란을 제기하면서 대법관 임명 과정이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거나, 국회가 인사청문이나 임명동의안 처리를 늦추면 인선 절차는 지연된다.
특히 여권에서 조 대법원장의 이번 행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서면서 행정부와 사법부 사이에 불거진 갈등에 입법부가 뛰어든 모양새가 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민석 신임 대표는 조 대법원장의 사임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전국에 걸도록 지시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김 대표는 지난 20일 오전 세종 은하수공원에서 고 이해찬 총리 묘역 참배 후 기자들과 만나 “어제 김남준 홍보위원장을 임명한 후 전국에 현수막 두 개를 필수 게첩하라는 첫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현수막 문구는 ‘민주의 황금시대를 열겠습니다’와 ‘법치 파괴 조희대는 물러나야 한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면 제청으로 “관례 깼다”
민주당서는 탄핵 가능성도
앞서 김 대표는 전날인 지난 19일 취임 후 첫 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조 대법원장을 향해 “퇴학을 구걸하는 불량 학생”이라며 “조희대씨 당장 나가라”라고 한 바 있다.
야당도 맞불을 놨다. 국민의힘 정점식 원내대표는 지난 19일 “이재명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으로 당 대표가 된 김민석 대표의 1호 숙제는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이 됐다”며 “이 대통령에게 보은하기 위해 대법원장 탄핵을 추진한다면 국민의 분노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청와대와 여당이 문제 삼는 것은 조 대법원장이 ‘관례를 어겼다’는 것뿐”이라며 “감히 대통령 뜻에 어긋나는 후보자를, 그것도 무례하게 서면으로 제청했느냐는 괘씸죄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관례를 어긴 것이 탄핵 사유라면 민주당 국회의원 전원이 탄핵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도 가세했다. 한 의원은 “9억2000만원 불법 자금, 뒷돈 받은 범죄로 대법원 유죄가 확정된 김민석 대표가 대법원장을 ‘조희대씨’라고 부르며 ‘자르겠다’고 협박했다”고 SNS에 적었다. 이어 “김민석씨는 민주당 대표가 되더니 왕이 된 것 같나 보다”라며 “김민석씨 정신 차리시라”고 직격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삼권분립된 민주공화국”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의 탄핵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민주당과 조 대법원장 사이에 아직 꺼지지 않은 갈등의 불씨가 이번 서면 제청 건으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민주당은 이미 조 대법원장의 거취 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해 왔다.
그 배경은 대통령선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3 비상계엄 건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조기 대선이 시행됐다. 당시 문제가 된 부분은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였다. 특히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1심과 2심의 판결이 엇갈리면서 대선 과정에서 화두로 떠올랐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해 5월1일 대법원은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의 항소심 무죄를 파기하고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은 이 대통령의 당선 이후 헌법 제84조에 따라 중단된 상태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제외하고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이 이미 기소된 형사재판에도 해당이 되는지 해석의 여지가 있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재판이 멈췄다. 당시 대법원도 유죄 취지로 재판을 파기환송하면서도 확정 판결(파기자판)은 하지 않아 선택을 유권자의 몫으로 남겨둔 바 있다.
다시 폭발
민주당은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조 대법원장과 각을 세웠다. 사법부가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으로 대선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는 지적도 여권에서 잇따라 나왔다. 조 대법원장은 민주당의 파상 공세에도 거취를 표명하지 않고 버텼다. 민주당에서 사법개혁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도 의견을 내긴 했지만 사퇴 등의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잠잠해지나 했던 갈등이 서면 제청 건으로 다시 불붙으면서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가 ‘조희대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조 대법원장의 임기는 내년 6월까지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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