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가리는 글로벌 유리 천장

그래미 보이콧 “BTS 굿잡”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지난달 29일 방탄소년단이 SNS에 게재한 메시지가 전 세계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올해 ‘그래미 어워즈’에 음악을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 대규모 글로벌 팬덤을 거느린 그룹이 세계 최고 권위 음악 시상식으로 꼽히는 그래미에 보이콧을 선언한 것. 리더 RM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나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기를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지난 3월, 전 세계가 기다려온 방탄소년단(BTS) 완전체가 3년9개월 만에 컴백했다.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수록곡은 최근까지도 빌보드 200과 핫 100 순위권을 드나들며 세계적인 이들 인기를 실감케 했다.

‘아시안 부문’
출품 거부 선언

BTS는 지난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미국 뉴저지주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월드 투어 ‘아리랑’을 공연했다. 북미 월드 투어를 통해 도시 전체를 거대한 테마파크로 만들었다며 전 세계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BTS는 응당 가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인 그래미 어워즈 ‘올해의 앨범상’까지 노려볼 만하다는 평가를 받던 중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래미에 보이콧을 선언했다. 세계 최정상 자리를 공식 인정받을 기회를 앞에 두고, BTS는 스스로 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왜였을까?

그래미를 주관하는 레코딩 예술과학아카데미(NARAS)는 지난 6월16일, 내년에 진행하는 제69회 시상식에 5개 부문을 새로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문이 바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였다.

이 상은 아시아 음악 퍼포먼스가 지닌 예술적 우수성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K팝, J팝(일본 팝), C팝(중국 팝) 등 하나 이상 아시아 언어를 의미 있게 사용한 작품만 따로 모아 수상자를 가린다”는 취지다.

아시아 시장에서 유래했거나 널리 알려진 현대 대중음악이 심사 대상이다. 수상 자격으로는 ▲각 시장에서 인정받는 멜로디 중심 주류 팝에 속하며 ▲상업을 지향해 제작하고 ▲장르를 혼합해 편곡하고 ▲역동적인 구조 변화가 있는 음악 등을 특징으로 제시했다.

꽤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아시아 음악 시장에 잠재하는 전 세계적 영향력과 파급력을 인정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었기 때문. 현재까지 그래미 본상 수상 K팝 아티스트는 단 한 명(혹은 한 팀)도 없었다.

BTS조차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 연속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트로피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그래미가 새로운 부문을 신설했다는 소식은 얼핏 K팝 아티스트에게 첫 수상 가능성을 열어주겠다는 소식처럼 반갑게 들려왔다.

그래미가 해당 부문 신설을 발표한 이후, 전 세계인들은 격렬한 문화 논쟁을 펼치고 있다. 백인이 아닌 아티스트를 주류 경쟁 부문에서 소외하고 특정 장르·지역 부문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니냐는 것. 일각에서는 전형적 ‘장르 덤핑(Genre Dumping)’이라며 비판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한때 비욘세, 켄드릭 라마, 배드 버니 등 거장들 역시 R&B·힙합·라틴 카테고리에 갇혀 본상 수상이 불발한 적이 있다. BTS가 이와 마찬가지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거세졌다.

세계 1위 그룹이 걷어찬 수상 영예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길”

영국 대중음악 잡지이자, 음악 시상식을 주관하는 <NME> 등 외신 역시 이번 그래미 신설 부문을 부정적으로 봤다. 매체는 이 부분을 “비서구권 음악의 주류 진입을 가로막는 ‘유리 울타리(Glass Fence)’”로 규정했다. 수상 부분 신설 취지는 ‘다양성 포용’이라는 포장지에 가려졌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시아 아티스트를 본상 경쟁 부문에서 밀쳐내는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유감스럽게도 BTS는 이 새로운 수상 부문에 곡을 출품하기가 어렵다. <아리랑> 앨범 타이틀곡 ‘스윔(SWIM)’을 비롯한 대부분 수록곡이 영어 가사로 채워졌기 때문. 출품 자격 요건에 ‘언어’를 포함한 것을 두고, ‘BTS를 저격한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BTS가 강한 행동력을 보인 이후, 그래미는 하루 만에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해명에 나섰다. 그래미는 지난달 30일 공식 SNS에 하비 메이슨 주니어 CEO의 입장문을 게시했다.

그는 “슬프지만, 음악 창작가로서 그들이 한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며 “아시안 팝 부문은 아시아에서 나오는 팝 예술의 깊이와 다양성, 탁월성을 기리기 위해 신설됐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아시안 팝 부문은 격리가 아닌 조명 장치다. 그는 이 부분에 포함된다고 해서 본상(General Field) 수상에서 배제되는 것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래미 투표인단 1만5000명에게 인정받는 대상을 넓히기 위한 취지라고도 설명했다. 이런 입장문에도 불구하고 음악계 동요는 가시지 않았다.

K팝 팬,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감독 매기 강, 그룹 에픽하이 타블로 등이 BTS를 지지하며 그래미 SNS 구독과 게시물 차단 등 행동을 보여줬다. BTS 공식 팬클럽 아미(A.R.M.Y)는 기습 ‘음원 스트리밍’ 총공세를 다지기 위해 집결했다. 이들은 이번 BTS 앨범 <아리랑>에 수록된 ‘에일리언스(Aliens)’를 전 세계 78개국 아이튠즈 ‘톱 송’ 차트 1위로 밀어 올렸다.

‘에일리언스’는 BTS가 글로벌 팝 시장에서 한국인으로서 겪은 정체성의 번민, 이와 대조되는 포부를 이방인에 빗댄 노래다. 다른 모습과 생각, 행동이 곧 BTS의 특별함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기준을 만들고 세계인으로부터 관심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도 엿볼 수 있다.

“태생부터 다른 일곱 외계인(Seven aliens)” “우리는 외계인(We aliens)” “김구 선생님 기분이 어떠신지 알려주세요(Tell me how you feel)” “시대가 우릴 원해” 등 가사로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기울어진 무대
유감과 해명

BTS가 그래미 보이콧을 선언한 다음 날, 소속사 빅히트뮤직은 이들 히트곡 ‘아이돌(IDOL)’ 뮤직비디오가 유튜브 조회 수 14억회를 돌파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이로써 BTS 14억뷰 이상 뮤직비디오는 총 다섯 개가 됐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 Feat. Halsey)’ ‘디엔에이(DNA)’ ‘마이크 드롭(MIC Drop)’ 리믹스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미와 별개로, 잘나가는 아티스트의 위상을 수치로 증명함으로써 그래미 옷을 입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CEO 성명과 별개로, 그래미는 찝찝한 뒤끝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BTS 2021년 ‘다이너마이트’와 2022년 ‘버터(Butter)’ 무대 영상이 모두 삭제된 것. 이에 대해 그래미는 별도 입장도 내지 않고 있다.

그래미가 시상 부문에 새로운 장르를 추가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래미는 힙합, 라틴팝 등 주류 음악 밖에 속하던 곡이 인기를 얻으면 새로운 장르를 추가하곤 했다.

실제 1980년대부터 그래미는 새로운 시상 장르를 여러 번 추가했다. 1984년 제26회 시상식에서는 ‘베스트 라틴 팝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했다. 1985년부터는 ‘베스트 레게 레코딩’을 새로 추가, 재편했다.

1989년에는 ‘베스트 랩 퍼포먼스’ 부문 신설해 힙합 장르를 아우르고, 1996년 ‘베스트 랩 앨범’ 부문을 추가해 힙합 장르를 세분화했다. 1992년 ‘베스트 월드 뮤직 앨범’ 부문을 신설했고, 2021년부터 해당 부문을 ‘베스트 글로벌 뮤직 앨범’으로 재편했다.

2022년엔 ‘뮤지카 우르바나’ 부문이 신설됐다. 2024년엔 아프로비츠와 아맙리아노 등 아프리카 대륙 음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추가했다.

그런데도 이번 ‘아시안 부문’은 “주류 부문으로 다루지 않고 카테고리를 만들어 분리해서 다룬다”고 해석할 만한 여지가 있다. 이 점에서 그래미가 “전 세계 음악계와 팬덤에 혼란을 주고 있다”는 것이 다수 대중문화 평론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음악 잡지 <언더 더 레이더(Under the Radar)>가 “그렇다면 왜 유러피안 팝은 없고, 아시안 팝만 있나”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미는 창설과 동시에 60여년 동안 ‘백인 중심’으로 시상식을 이끄는 ‘보수성’으로 지적받아 왔다. 2021년 그래미 후보에서 제외된 위켄드는 “그래미는 부패했다”며 출품을 거부했다. 2020년 내내 빌보드를 석권한 그로서는 심사 기준이 석연찮다고 여길 만했다.

위켄드가 “비밀 위원회(Secret Committees)가 있는 한 앞으로 후보 곡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레코딩 아카데미는 해당 위원회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비밀 위원회는 보수 백인 남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 음악만?
패션·영화도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는 지난 3일, 그래미 수상 신설 부문이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음악을 세계 시장에 알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우수 아프리카 음악 퍼포먼스’ 첫 수상자인 타일라를 예로 들면서였다. 지난 2월 배드 버니가 라틴 팝 부문뿐 아니라 ‘올해의 앨범’ 상 역시 받은 사례도 근거로 썼다.

<포브스> 역시 <언더 더 레이더>와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 음악을 주류 밖으로 분리하는 인식을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두아 리파나 에드 시런을 위해 ‘최우수 유럽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을 만들지는 않는다”며 “백인 영어권 음악에는 없는 별도 범주가 아시아 음악에만 적용되는 것은 형평성 논란을 낳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BTS가 그래미 보이콧을 선언한 이후, 메이슨 CEO는 “아시아 음악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아티스트를 인정하기 위한 것”이라며 “본상 후보 자격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며 그래미를 두둔했다. BTS 영상이 내려가지만 않았더라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BTS 보이콧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에서는 K팝·아시아 스타들이 겪은 유사 ‘차별 논란’을 다시 소환했다. 백인, 서양인이 행하는 인종차별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아티스트가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에도 스스럼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2025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생로랑 2026 봄·여름 컬렉션. 블랙핑크 멤버 로제는 헤일리 비버, 조이 크라비츠, 찰리 XCX와 나란히 섰던 생로랑 유일 아시아인 앰배서더였다. 행사 다음 날 패션 매거진 <엘르> UK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단체 사진에서는 로제만 통째로 잘린 채였다.

역시 패션 매거진인 <W매거진>이 게재한 같은 구도 사진엔 로제가 멀쩡히 있었다는 점에서 “아시아인만 지운 것”이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사진에 함께 있던 찰리 XCX마저 로제만 음영 처리한 사진을 자신 SNS 계정에 올렸다가 뒤늦게 삭제하기도 했다.

블랙핑크 멤버 제니도 비슷한 무례를 당했다. 2024년 10월 파리 샤넬 패션쇼. 인사를 나누던 배우 마거릿 퀄리가 대뜸 제니 금발 머리카락을 만지며 “이거 진짜 네 머리?”냐고 물었다. 제니가 아니라고 답하자 퀄리는 “진짜 같다”며 감탄했다. 타인의 머리를 허락 없이 만진 무례에 더해, 동양인 금발을 신기해하는 태도 자체가 인종적 편견이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비백인 따로 묶는 ‘장르 덤핑’ 전형
스스로 링 밖으로 걸어 나간 슈퍼스타

세계적인 영화 시상식인 ‘칸 국제 영화제’에서도 인종차별 사례가 꾸준히 나와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최근 사례로는 영화 <호프> 기자회견을 꼽을 수 있다.

<호프>는 지난 5월 제79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 기자는 자신의 소속과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무례한 질문을 던져 인종차별 의혹을 받았다.

그는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만 인사를 건넨 뒤 “나머지는 누군지 모른다”고 말해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 이어 “마이클과 알리시아 부부를 함께 캐스팅한 이유가 뭔가” “결혼한 커플 패키지인가” 등 질문을 던졌다. 나홍진 감독은 “두 분 모두 어렵게 모신 배우들이다. 각각 캐스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진지하게 답했다. 당시 두 배우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열린 <호프> 기자회견장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나 감독은 “기분이 나빴지만 표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며,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카메라가 돌고 있어 전 세계인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공식 행사 현장에서도 크고 작은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위는 서슴지 않고 행해지고 있다. 그래미가 진정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수상 부문을 신설했다고 밝혔는데도 대다수가 그 의도에서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이유도 이 뿌리 깊은 차별의 상습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내년 2월7일, 제69회 그래미 시상식은 BTS 없이 예정대로 열릴 테다. 그래미는 시상식이 열리기도 전부터 꽤 무거운 질문을 떠안게 됐다. 음악을 지역과 언어로 나누는 것이 다양성을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익숙한 방식의 또 다른 구별 짓기인지.

BTS 역시 예정대로 ‘2026 북중미월드컵’ 결승전이 열렸던 무대에 2주 만에 다시 올라 팬 15만7000여명과 함께 노래했다. 이날 공연에서도 팬들은 “그래미 꺼져” “누가 누굴 필요로 해?” 등 플래카드를 들고 BTS를 지지했다. BTS는 이제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를 밝히고, 함께 행동할 것을 주문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파급력을 가진 ‘행동하는 아티스트’가 됐다.

행동하는
아티스트

2021년 싱글 ‘버터’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BTS는 “그래미 수상 목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답했다. 동경하던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이유가 분명하다면 응원하고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BTS도 위켄드처럼 그래미와 화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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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현실판 차무식’ 사기극 전말

[단독] ‘현실판 차무식’ 사기극 전말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필리핀 골프장 투자 사기에 연루된 정종수씨가 1심 재판에서 패소했다. 필리핀 법원은 정씨가 한국인 투자자들을 삭제하고 필리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제이비 크레스타(이하, JBC)의 일반정보보고서(GIS)를 무효로 판단했다. 정씨는 한화 약 150억원을 투자한 최대주주의 지분 탈취를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인 사업가 정씨를 둘러싼 필리핀 골프장 투자 분쟁이 현지 법원의 주주 지위 회복 판결로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인 투자자 6명은 2019년 JBC 등에 총 104억원을 투자하고 회사 지분 63.98%를 확보했다. 투자자 측은 “계약에 따라 2024년 8월29일 지분을 배정받고 투자금을 입금해 JBC의 법적·실질적 최대주주가 됐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카르텔 JBC는 필리핀 클락에 위치한 스카이블루 골프 앤 리조트(이하, 스카이블루)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다. 현지인과 친인척 관계를 맺으며 필리핀에서 장기간 활동한 정씨는 ‘현지 국회의원 등 4명을 스카이블루 이사로 등재해 골프장 매각을 성사시키겠다’는 조건으로 JBC와 자회사인 스카이블루의 경영권을 요구했다. 투자자들은 정씨가 현지 인맥을 활용해 골프장 사업을 정상화하고 매각까지 성사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2024년 11월20일 정씨는 JBC의 주주와 이사진을 대거 교체하고 투자자들의 지분을 주주명부에서 삭제했다. 투자자 측은 이 과정에서 적법한 주주총회와 이사회 절차 없이 문서가 위조되고 경영권과 지분이 넘어갔다며 정씨 측의 행위를 사기·배임·문서위조 등으로 문제 삼고 있다. 이번 판결은 정씨의 사기나 문서위조 등 형사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JBC의 주주 및 이사·임원 지위와 2024년 8월29일 이후 이뤄진 지배구조 변경의 적법성이 쟁점이다. 필리핀 앙헬레스시 지방법원 제60지원은 지난달 28일 함모씨 등 6명의 주주들을 대표하는 안창현씨와 부민호씨가 정씨와 현지인 등을 상대로 제기한 회사 임원 권원 및 회사 행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JBC의 적법한 주주라고 선언했다. 함씨를 비롯해 2024년 8월29일 자 GIS에 기재된 이사·임원들을 새로운 경영진이 적법하게 선출될 때까지 원상 복구하고, 당시 GIS에 기재된 주주들의 지위도 함께 회복하라고 판결했다. 이어 법원은 정씨가 제출한 JBC의 GIS를 모두 무효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정씨의 측근 크리스티나 송미 리, 줄리 앤 벨트란, 세스난다 빌라파냐, 스테파니 러브 타데오, 리코 안젤로 정, 디오네 오호일란 안토니야 등 6명은 JBC의 적법한 주주 및 이사·임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세스난다 빌라파냐는 정씨의 아내, 스테파니 러브 타데오는 며느리, 리코 안젤로 정은 손자로 알려졌다. 2024년 8월29일 후 JBC 일반정보보고서 모두 무효 자기주식 75% 흡수한 정종수 라인⋯통지도 안 했다 정씨는 이번 소송의 피고지만 판결 주문에서 적법하지 않은 주주·이사·임원으로 특정된 6명의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씨가 불법 주주나 임원으로 판결받은 것은 아니다. 앞서 <일요시사>는 지난 1월 ‘카지노 차무식 현실판 사기극(https://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254030)’ 기사를 통해 한국인 투자자들의 JBC 지분과 자회사 스카이블루의 경영권 및 핵심 자산이 정씨 측에 넘어갔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한국인 투자자들은 2019년 JBC 등에 100억원 이상을 투입했다. 이어 스카이블루 증자 등을 명목으로 송금한 약 47억원까지 합하면 피해를 호소하는 투자금은 150억원대에 이른다. 투자자들은 JBC 지분 63.98%를 보유한 최대주주였지만 2024년 11월20일 자 GIS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고들은 2024년 8월29일부터 11월14일까지 GIS에 ‘JBC 주주’로 기재돼있었다. 여기에 함씨는 1500주, 백씨와 김씨는 각각 500주, 한강라이프는 499주, 유씨는 100주를 보유한 것으로 신고됐다. 원고 측 대표자 부민호씨도 최종적으로 100주를 보유한 주주로 기재돼있었다. 그러나 불과 엿새 뒤인 11월20일 제출된 GIS에서 이들의 이름은 정씨에 의해 모두 사라졌다. 원고들은 자신들이 주주 및 임원 지위에서 배제되는 과정과 관련된 회의에 관해 아무런 통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 역시 피고 측이 기존 주주들에게 회의 개최 사실을 적법하게 통지했다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새 경영진의 선출 시점을 둘러싼 모순도 확인됐다. 정씨 측은 2024년 12월2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새 이사와 임원들이 적법하게 선출됐다고 주장했으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인 그해 11월20일 자 GIS에 이미 회사 임원으로 기재돼있었다. 고지도 절차도 스테파니 러브 타데오는 12월2일 재무 담당 임원으로 선출됐다고 주장했지만 그보다 앞서 기존 주주들의 지분과 회사 장부를 조사하는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타데오는 11월12일 카르멜로 라사틴 주니어로부터 주식 1주를 매입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한국인 주주들을 배제하기 위한 실사가 이뤄지기도 전이었다. 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직접 확인한 핵심은 기존 한국인 투자자들이 적법한 주주였으며, 이들의 지분을 연체 주식으로 처리해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는 피고 측 주장을 뒷받침할 적법한 절차와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2024년 11월20일 자 GIS에는 JBC가 자기 회사의 보통주 3751주를 보유한 것으로 기재됐다. 전체 발행주식의 약 75%에 해당하는 규모다. 회사가 자기주식을 취득하려면 법이 정한 사유와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해당 GIS에는 이 주식이 어떤 경위로 회사 명의가 됐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주식의 성격도 자기주식이 아닌 일반 보통주로 표시됐다. 이후 회사 측 설명은 달라졌다. 2024년 12월2일 회의록에는 당초 자기주식으로 분류됐던 3752주를 기존 주주들이 청약대금을 납입하지 않은 연체 주식으로 정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피고 측은 기존 주주들이 청약대금을 완납하지 않아 해당 주식이 연체 상태가 됐고 이후 신규 주주들에게 적법하게 매각됐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리핀 개정회사법에 따라 연체 주식을 처분하려면 해당 주주에게 개별적으로 통지하고 일반 유통 신문에 2주 연속 매각 사실을 공고한 뒤 공개경매 절차도 거쳐야 한다. 연체 주식 지정을 위한 이사회 결의뿐 아니라 기존 주주에 대한 통지, 매각 공고와 신문 게재, 공개경매, 실제 매각을 입증할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회사 장부 제출 신규 주주들이 주식 대금을 실제 지급했다는 계약서와 영수증, 세금 납부 자료 역시 제출되지 않았다. 주식은 정씨 측근들에게 분산됐다. 2024년 12월21일 자 GIS에는 타데오가 1378주를 보유한 대주주로 등장했다. 카트리나 블랑카 데 레온과 아이리시 칼라구아스는 각각 550주, 이경희와 박재관은 각각 375주, 최민승은 375주를 보유한 것으로 기재됐다. 이성진과 손봉준에게도 각각 75주가 배정됐다. 재판부는 이들이 취득했다는 주식의 성격과 실제 취득 경위를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 과정에선 피고 측이 핵심 증거로 제출한 주주·주식양도 대장의 진위도 도마 위에 올랐다. 피고 측은 기존 한국인 투자자들이 JBC의 주주가 아니라는 근거로 주주·주식양도 대장 일부를 제출했다. 해당 장부에 원고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들을 JBC 주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법원이 문서를 확인한 결과 증거로 제출한 자료는 JBC의 장부가 아닌 스카이블루의 회사명이 기재돼있었고 원본대조필 표시 역시 모회사 JBC가 아닌 스카이블루 명의로 돼있었다. 타데오도 반대신문 과정에서 해당 문서가 JBC가 아닌 스카이블루의 주주명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투자자 함씨와 김씨는 2022년 정씨와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스카이블루의 증자에 참여하기로 하고 약 47억원을 송금했다고 주장한다. 투자금 일부는 스카이블루 법인 계좌로 송금됐고 일부는 골프장 카트 구매비 명목으로 정씨가 지정한 한국 계좌에 입금됐다는 게 투자자 측 설명이다. 장부라며 낸 증거, 알고 보니 스카이블루 주주명부 코레이트자산운용 별도 재판⋯뒤집힌 지배구조 쟁점 함씨와 김씨는 2년이 넘도록 증자 절차가 등록되지 않았고 자신들의 지분도 필리핀 SEC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작성된 주주명부에도 함씨와 김씨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자자 측은 투자금을 받고도 약속한 지분을 발행하지 않은 행위가 사기와 배임 등에 해당할 수 있다며 형사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허위 내용이 포함된 GIS를 고의로 인증하거나 제출한 사실이 입증될 경우 필리핀 개정회사법 제162조의 허위·부정확 보고서 인증 규정이 문제될 수 있다. 지분을 탈취했다는 의혹을 받는 정씨는 스카이블루 매각을 최대주주 동의 없이 진행하기도 했다. 투자자 측은 스카이블루 주요 자산을 처분하려면 회사 주주 3분의 2 이상의 특별결의와 스카이블루 지분 99.9%를 보유한 모회사 JBC의 적법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매각 상대방으로는 한국토지신탁 자회사인 코레이트자산운용 측이 거론됐다. 골프장 관련 공사에는 포스코더샵 아파트 건설에도 참여한 다원이 시공사로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판결이 스카이블루의 자산매각 자체를 무효로 판단한 것은 아니다. 해당 매각의 적법성은 별도로 제기된 탈락(Tarlac) 특별상업재판소 사건에서 심리되고 있다. 다만 이번 판결로 2024년 8월29일 이후 JBC의 GIS와 지배구조 변경이 무효로 판단된 만큼, 적법하지 않은 JBC 지배구조를 토대로 스카이블루의 매각 승인권이 행사됐는지가 별도 재판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특히, 스카이블루 골프장 부지는 필리핀 국유지와 관련돼있어 기지전환개발청(BCDA)의 승인이나 동의가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별도 사건에서 다뤄질 쟁점이다. 2025년 10월 매각 절차가 BCDA의 승인 아래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만큼 승인 절차의 미비만으로 거래가 당연히 무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별도 가처분 사건에는 BCDA도 피고로 포함돼있다. 골프장 매각 따로 재판 이번 판결이 정씨에 대한 형사 유죄판결은 아니다. 그러나 법원이 한국인 투자자들을 JBC의 적법한 주주로 인정하고 2024년 8월29일 이후 제출된 GIS를 모두 무효화하면서, 기존 투자자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회사 지배구조에서 배제됐다는 주장은 상당 부분 힘을 얻게 됐다. 150억원대 투자금과 골프장 자산을 둘러싸고 시작된 이른바 ‘현실판 카지노 차무식’ 사건은 이제 JBC 지배구조 복원과 스카이블루 자산매각의 적법성, 관련자들의 형사책임을 가리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