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정조관념 없는 헤픈, 정신빠진 미국병 환자. 허랑방탕한 낭비쟁이 공주. 될 대로 되라며 나태하고 부정적인 악마에 빠진 똥치, 지독한 양키 성병균을 음부 속에 지닌 암캐, 그런 것이 미국 위안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더구나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자발적으로 돈과 쾌락을 찾아 나선 매춘부라는 점에서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청운은 그 지점에서 가장 안타까웠다.
돈과 쾌락
‘물론 그런 여자들이 전혀 없진 않겠지. 하지만 자기 스스로 사악해서 한국 남자를 무시하고 미군 놈들에게 뿅가 버린 여자는 별로 없는 것 같아. 한국 놈들에게 완전히 질린 나머지 반사적으로 그런 척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거든. 특히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잔악스런 돌림빵을 당한 처녀나 의붓아비와 오래비에게 성폭행당한 어리고 가난한 소녀들은 활로를 찾지 못해 자포자기한 정신상태로 자기 자신과 모든 한국 놈들을 다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 혹시 그녀들은 미군의 몸뚱이 밑에 깔린 채 거대한 성기를 겨우 받아들이며 자신과 함께 한국 놈들을 씹어 죽이고 있진 않았을까?’
청운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보면 하루 빨리 달러를 벌어 뭔가 복수하고픈 마음에…아니, 사람처럼 살고 싶은 생각에 점점 악착같이 변해 가지 않았을까? 결과만 보고 단죄하는 건 인간, 특히 한국인의 큰 결점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 기지촌이란 건 구렁창이거나 쥐덫…일단 갇히면 끝이야. 자발적이니 강제니 하는 건 좀 여유로운 얘기지. 포주의 폭행, 눈더미처럼 불어난 빚 독촉과 엄포, 정신을 몽롱하게 변질시키는 세코날…그러다 보면 강제는 사라지고 자발만 남는다. 누군가 감아 넣은 태엽에 의해 움직이는 자동인형…기지촌에서는 강제와 반강제 그리고 자발적 행동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자발적이거나 반자발적인 경우보다 반강제적이거나 강제적인 상황에 처해 발버둥치는 여자들의 지옥이 바로 이런 기지촌 아닐까?’
청운은 고개를 들어 하얀 건물을 쳐다보았다. 외관은 깔끔해 보였지만 그 속의 수많은 누추한 방엔 인간 아닌 원숭이로 취급받는 여자들이 애먼 죄의 굴레를 쓴 채 갇혀 신음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들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잘못 사용한다는 죄목으로 비난받고 있었다. 만일 좀더 좋은 조건이 주어졌다면 그녀들은 더 나은 길을 택해 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시대엔 ‘위안부’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다. 미국 정부가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권력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이 아니라면 또 다른 여자들이 위안부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그 무렵에 수많은 처녀들이 정부의 중공업 정책으로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의 여직공이나 여차장 또는 호스티스나 매춘부로 전락했다.)
이 땅은 과연 중국을 숭모하고 일본에 침탈당했던 시대와 비교해 얼마나 다른가? 화냥년이나 왜놈 위안부 그리고 미군을 상대한 양갈보는 국력이 약해 희생당한 존재였다.
어찌 보면 대통령을 비롯해 잘 먹고 잘 산 남자들이야말로 양갈보가 아니었을까?
청운이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정조 관념이 없는 추악한 암캐라거나 미국식 허영에 빠진 게으름뱅이 암여우라는 따위의 비난은 대부분 여자들이 사냥꾼의 덫에 걸려 기지촌 사육장에 입소한 후에 생겨난 것일 뿐 그 전부터 지닌 습성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들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리 되지 않을까. 몽키하우스에서 차츰차츰 그녀들의 슬픈 인생을 알아 갈수록 청운은 그녀들이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 가련한 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눈이 펄펄 내리는 산야 山野를 망연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일단 갇히면 인생 끝이야”
덫에 걸린 기지촌 여성들
‘어느 크레타 섬 사람이 말했다지.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하, 꽤 장난스럽고도 심각한 얘기인 것 같아. 내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상당히 헷갈려. 모든 크레타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면 그런 말을 한 그 크레타 사람 자신도 역시 거짓말쟁이잖아. 그런 거짓말장애가 지껄인 말은 거짓말이니까 결국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뜻이 되고 말지. 그런데 그 말을 지껄인 사람 또한 크레타 섬 사람이르로 거짓말쟁이가 아닌데. 그가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 결국은 또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잖아. 뱀 몇 마리가 머리로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도는 듯 어지러워. 그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 어느 한국인이 말했다. 모든 한국인은 거짓말쟁이다! 흐흐, 정말 웃기면서도 심각해. 만약 미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어느 예쁜 여고생이 복수를 위해 기지촌으로 숨어 들어와 고생 끝에 그놈을 죽였다면 과연 누가 나쁠까? 아니, 그 소녀가 이렇게 외쳤다면 어떨까? 모든 한국 사람은 정신빠진 거짓말쟁이다! 후후, 혹은 이렇게 소리친다면? 모든 미국 놈은 사악하고 사랑스런 거짓말쟁이야, 히히히.’
청운은 눈송이들을 향해 입김을 후 내불었다. 정처 없이 어지러이 휘날이는 듯 보이면서도 불가시한 어떤 질서 속에서 순간순간 자기 길을 찾아가려는 무심하고 여린 존재.
‘만일 엄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어린 나를 서울 땅에 내버리지 않았다면, 만약 천왕산 기슭 아늑한 고향에서 뛰놀며 자랐다면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 확인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선감도와 악마산에 들어간 건 자발적이었던가 강제적이었던가, 혹은 운명적이었을까? 그 지옥 속으로 끌려 들어갔지. 누명을 쓰고 만약 내가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쳐 탈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곳에서 맞아 죽었겠지. 삶과 죽음은 그래서인지 동일하게 느껴져. 선감도 수용소와 달리 악마산 훈련소엔 내 발로 걸어 들어갔지. 하지만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물색관들이 사기꾼처럼 허황스런 말로 속인 건 사실이야. 물론 속은 나 같은 놈이 반푼이긴 하지만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비밀 암행어사처럼 행세하면서 자유와 돈을 약속했어. 흠, 만일 내게 그때 자유와 금전이 좀 있었다면, 그 자가 진짜든 가짜든 속아 넘어가기보다 비웃어 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어. 피를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처지에, 도망자 신세이기에 늘 불안했지. 명동 거리의 군중 속에서 발을 밟히거나 뺨을 맞더라도 대거리할 수가 없었어. 설령 내가 피해자라 하더라도 도망자임이 발각돼 다시 선감도 지옥으로 끌려가는 건 싫었거든. 그런데 전과를 말소해 주고, 고향과 엄마를 찾아 주고, 수억 원까지 주겠다던 정부 앞잡이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모두 다 훈련 과정이나 북파 공작 도중에 죽어 버렸으니까. 국가에서 그들의 가족을 찾아 보상해 주리라곤 믿어지지 않아. 겨우 살아 돌아온 나도 귀향 차비 몇푼과 함께 내쳐 버렸으니까. 속은 녀석이 나쁜 걸까, 속인 놈이 나쁜 걸까? 아냐, 이런 식으로 나쁜 놈을 찾으려 해봤자, 역시 대가리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뱀 꼴일 뿐이야. 어차피 속은 멍청이인 내게도 일확천금의 욕망이 있었고, 속인 정부 앞잡이도 나름 국가를 위한다는 모종의 대의명분은 있었을 테니까. 다만 그 과정이 비인간적이었고 사람을 한낱 짐승이나 물건같이 다뤘지. 국가 권력의 괴력을 내세워 사기를 치고도 당당히 무책임하다는 사실이야.’
청운은 눈을 듬뿍 맞아 눈사람처럼 된 모습으로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리며 생각했다. 하얀 몽키하우스 건물 쪽에서 여자들의 재잘거림이 환상인 양 들려왔다.
물건같이
‘어쩌면 북파 공작원과 기지촌 여자들은 닮은 데가 많은 것 같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속아서 입문해 그 후엔 반자발 반강제적으로 임무를 다하다가 뭔지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일말의 느낌도 전혀 없진 않았건만 결국엔 허망스레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간첩이니 양갈보니 하는 이름으로 괴물시당해 무슨 강시나 좀비처럼 연명해 나가야 하니까.’
쇠창살 안쪽에서 청운을 바라보던 여자들이 ‘눈 괴물’이니 ‘스노우 몽키’니 하고 놀리며 까르르 깔깔 웃어댔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