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2인자 키우는 지도자가 진짜 리더

 워싱턴은 권력 내려놨고, 김대중은 인재 키웠다

역사는 수많은 영웅과 지도자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지도자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어떤 지도자는 경제를 일으켰으며, 또 어떤 지도자는 위대한 개혁을 이뤄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업적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거대한 건물도 세월이 지나면 낡고 정책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그래서 진정한 지도자의 가치는 자신이 이룬 성과보다 자신 이후를 어떻게 준비했는가에서 결정된다.

정치에서는 늘 권력을 잡는 사람에게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어떻게 넘겨줄 것인가다. 여기서 말하는 2인자는 특정인을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도자의 철학을 이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준비가 된 차세대 지도자군을 의미한다.

유혹과
불안감

민주주의에서 후계자는 임명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검증되며, 다양한 인재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지도자가 남겨야 할 가장 큰 유산이다.

모든 권력은 2인자를 두려워할 때부터 쇠퇴한다=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국민과 조직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주변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질수록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긴다. 그래서 실력 있는 사람보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가까이 두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권력의 쇠퇴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역사를 돌아보면 독재자들의 공통점도 여기에 있다. 소련의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끊임없이 숙청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역시 잠재적 경쟁자를 철저히 제거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도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정치적 경쟁자를 몰아냈다.

그들은 권력은 오래 유지했을지 몰라도 건강한 승계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국가는 큰 혼란과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인물만 키우거나 경쟁 자체를 막는다면 조직은 활력을 잃게 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비판은 침묵하며, 조직은 점점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불안정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권력은 독점할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약하게 만든다.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의 경쟁자를 키운다= 반대로 위대한 지도자는 유능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가 많이 나올수록 조직이 더욱 강해진다고 믿는다. 권력을 나누는 것이 자신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조직을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는 사람을 통제하기보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는 이 같은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인물이다. 그는 백제성에서 임종을 앞두고 어린 아들 유선을 제갈량에게 부탁하며 “내 아들이 나라를 맡을 능력이 없으면 그대가 나라를 맡아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유명한 ‘탁고(托孤)’다.

워싱턴은 권력 내려놨고
김대중은 인재를 키웠다

자신의 혈통보다 나라의 미래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제갈량은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유선을 보필했고, 이 일화는 권력보다 국가를 우선한 지도자의 자세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물론 이는 <삼국지연의>의 서사와 <삼국지> 정사 기록이 뒤섞여 후대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세부보다 그 안에 담긴 리더십의 가치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 자신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경쟁자를 키울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위대한 지도자와 평범한 권력자의 가장 큰 차이다.

세종과 정조는 사람을 남긴 왕이었다= 조선의 세종대왕을 우리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성군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글자를 만든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과감하게 발탁했고, 학문과 토론을 장려하며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체계적으로 길러냈다.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이 사람을 키우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기 때문이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규장각을 단순한 왕실 도서관이 아니라 국가 최고의 정책 연구기관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초계문신제를 통해 젊은 관료들을 선발해 직접 토론하고 교육하며 미래의 국정 운영 능력을 키워줬다. 왕이 직접 젊은 관료들과 정책을 논의하고 학문을 가르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인재 육성 시스템이었다.

세종과 정조가 위대한 이유는 권력을 오래 행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없는 미래까지 준비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를 움직일 사람을 길러냈다. 권력은 제도와 인재를 통해 이어질 때 비로소 국가의 경쟁력이 된다. 그래서 역사는 세종을 ‘글자를 만든 왕’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정조를 ‘개혁 군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을 남긴 지도자였기에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위대해졌다= 권력의 역사를 바꾼 지도자는 반드시 권력을 오래 가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강한 순간에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사람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국민적 지지도 절대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원했다면 사실상 종신 집권도 가능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은 달랐다. 그는 대통령직을 두 번만 수행한 뒤 스스로 물러났다. 누구도 그에게 퇴임을 요구하지 않았고, 헌법에도 연임 제한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화국의 것”이라는 신념 아래 후임에게 권력을 넘겼다.

세종과 정조
위대한 이유

이 결정은 훗날 미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전통이 됐고, 1951년 수정헌법 제22조를 통해 대통령 3선 금지 원칙으로 제도화됐다.

워싱턴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대통령직이 아니라 권력의 평화로운 승계였다. 그는 후계자를 직접 지명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측근만 권력을 이어받도록 만들지도 않았다. 국민이 선택하고 제도가 작동하도록 길을 열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권력을 움켜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이 제도를 통해 순환하도록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워싱턴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김대중은 사람을, 노무현은 철학을 남겼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정치적 계승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사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을 단순히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넘어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다는 길을 열어줬다. 부산에서 세 번이나 낙선한 정치인을 전국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든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역시 김대중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참여정부라는 새로운 국정 철학을 제시했고, 권위주의 청산, 지방분권, 균형 발전, 시민참여 확대, 검찰개혁 등 자신만의 시대적 과제를 추진했다. 이것이 진정한 계승이다. 계승은 복사가 아니라 발전이며, 충성은 모방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답을 만드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정치철학은 여전히 우리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은 떠나도 철학은 남는다. 이것이 지도자가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다. 사람은 시대를 이끌지만 철학은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를 움직인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는 사람과 철학을 함께 남긴다.

대한민국 정치는 왜 늘 ‘인물 정치’를 반복하는가= 우리 정치를 돌아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절이 반복돼 왔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이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기보다 부정하는 데 더 많은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결과 국가의 장기 전략은 자주 수정되거나 중단됐고, 사회적 비용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정권은 바뀌더라도 국가 전략은 이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물론 모든 계승이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정부 이후에는 정치적 구심점이 빠르게 약화됐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특정 인물 중심의 정치 문화가 강하게 나타났다. 정당보다 사람이, 정책보다 계파가 앞서는 정치가 반복되면서 ‘누가 더 나은 국가를 만들 것인가’보다 ‘누가 권력을 차지할 것인가’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치와 기업
다른 계승법

이제는 이런 정치 문화를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는 특정 인물에게 의존하는 체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지도자가 성장하는 체제여야 한다. 지도자의 역할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도자가 경쟁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다. 국민은 한 사람의 영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훌륭한 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나라를 원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CEO를 준비하고, 정치는 지도자를 준비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들은 최고경영자가 취임하는 순간부터 다음 CEO를 준비한다. 삼성, 현대자동차, LG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핵심 임원들에게 다양한 사업 경험을 쌓게 하고, 해외 근무와 경영교육을 통해 장기간 검증하는 승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최고경영자의 공백이 곧 기업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기업일수록 한 사람의 천재보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뛰어난 CEO가 회사를 성장시킬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떠난 뒤 회사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성공한 경영이 아니다. 그래서 이사회는 수년 전부터 차기 CEO 후보군을 관리하고,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게 하며 조직 전체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리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다.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은 임기가 정해져 있고, 당 대표도 언젠가는 자리를 떠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가 다가와서야 차기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정치가 기업처럼 사람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검증하는 문화를 갖춘다면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정은 훨씬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정치는 권력의 경쟁뿐 아니라 지도자를 키우는 경쟁도 해야 한다.

AI 시대는 영웅보다 시스템을 요구한다= 20세기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국가를 이끌던 시대였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개인의 직관보다 데이터가, 영웅 한 사람의 능력보다 집단지성과 시스템이 더 큰 경쟁력이 된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한 사람의 경험만으로는 국가와 기업을 이끌 수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필자가 최근 여러 차례 칼럼에서 강조했듯이 AI 시대는 증축보다 재건축을 요구한다. 한 사람의 능력을 조금씩 보완하는 수준으로는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갈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도자 한 사람의 결단에만 의존하는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노무현 정신’ 오래됐지만
여전히 지금 정치에 영향

결국 미래의 지도자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최고의 인재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창의적인 정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사람이다. 권력을 독점하는 리더보다 권한을 위임하는 리더가 더 강하다. 사람을 통제하는 지도자보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지도자가 더 오래 기억된다. AI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바로 그런 시스템 리더십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다음 리더’다= 이제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새로운 과제가 남아 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AI 산업 육성, 민생 경제 회복 등 국정 과제를 추진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임기 안에 성과를 만드는 것과 함께, 그 성과를 이어갈 정치적 토양과 인재를 만드는 일도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다. 성공한 정부는 정책을 남기지만, 위대한 정부는 정책을 이어갈 사람까지 남긴다.

특히 오는 17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면 당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차기 대선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당 대표가 곧바로 대선후보로 이어지는 일방통행식 구조를 당연한 관행으로 굳히지 않는 일이다. 당 대표는 당을 운영하는 자리고, 대선후보는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자리다.

두 자리가 반드시 같은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더 많은 인재가 성장하고 민주당도 더 건강한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진정한 정치적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면 특정 인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김 전 대통령처럼 여러 지도자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정치 문화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차기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정책과 비전으로 경쟁하고, 국민과 당원이 그 경쟁 속에서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며, 권력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방법이다.

성공한 권력은 사람 남기고, 위대한 권력은 미래 남긴다= 모든 민주주의 정부의 임기는 유한하다. 따라서 어느 정부든 진정한 성공은 자신의 임기 안에서만 평가받지 않는다. 자신이 시작한 개혁과 정책이 다음 정부, 그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는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정책은 법으로 시작되지만 사람과 제도를 통해 지속된다.

이 원칙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부든 국가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면, 그 개혁을 이어갈 인재와 시스템도 함께 남겨야 한다. 성공한 정부는 성과를 남긴 정부이고, 위대한 정부는 성과와 함께 미래를 남긴 정부다. 그래서 지도자의 마지막 과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자신 없이도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더 건강한
정당으로

대한민국 정치도 이제는 ‘누가 더 오래 권력을 가질 것인가’를 경쟁할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지도자를 길러낼 것인가’를 경쟁해야 한다. 국민은 영웅 한 사람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기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영웅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 비전이 이어지는 나라를 원한다. 권력은 혼자 정상에 오르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능력이다.

다음 지도자를 키우지 못한 권력은 성공한 권력이 아니라 잠시 머물렀던 권력일 뿐이다. 권력은 더 나은 사람에게 기꺼이 넘겨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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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청구서 받은 한국 제3의 선택

동맹 청구서 받은 한국 제3의 선택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요구했다. 결국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원유 수입의 61%는 호르무즈와 연결돼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 사실상 편입되면 헌법·여론·대이란 관계까지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2020년 청해부대 독자 파병 모델이 다시 주목받는 가운데, 과연 한국은 한미동맹의 ‘청구서’와 국익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각)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에게 한미 연합 군사 훈련 규모의 대폭 축소를 지시했다. 그 근거는 “나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협은 열고 전쟁 선 긋기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면서 “오래전부터 미국이 한국과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여하기로 동의해 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한미 연합 훈련은 비용이 많이 들고,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을 일컬어 “내가 취임한 이래로 미국에 위협적이지 않고, 미국을 존중해 온 국가”라고 하며 “전적으로 부적절하고 적대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칭한 한미 연합 훈련은 지난달 17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한미 연합 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폭 축소’를 지시한 이유는 “취소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훈련 대폭 축소의 근거로 자신과 김 위원장과의 관계를 들었지만, 국내에서는 다른 신호로 받아들였다. 국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을 “호르무즈 파병을 위한 압박” 신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14일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통해 중국·프랑스·일본·한국·영국 등 5개국을 지명하면서 “미국이 홀로 해상을 보호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이어 5개국에 “즉각 군함을 파견해서 호르무즈 해협 통행로 확보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요구의 명분은 “이란이 해협을 봉쇄하면 이들 국가의 원유 공급에도 영향이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Hopefully’라는 표현을 활용했다. 명령보다는 조금 약한 표현이었지만, 전 세계는 ‘명령 아닌 명령’ 혹은 ‘요구 아닌 요구’로 해석했다. 5개국이 거론된 기준은 경제적 이익이었다. 이 때문에 동맹국이 아닌 중국도 파병 요구 대상으로 거론된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석유의 90%를 호르무즈 해협에서 조달하고 있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물론 실제로는 경유분 40% 미만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프랑스·영국은 미국과 나토 동맹을 맺고 있다. 한국·일본은 각각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국이다. 중국에 대한 파병 요구가 없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에 끊임없이 반복해 온 전형적인 부담 분담이 될 뻔했다. 중국이 파병 요구 대상에 포함된 순간 우리에 대한 파병 요구도 더욱 진지해진 것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 원유 수입의 약 61%와 나프타 수입의 약 54%가 호르무즈 해협과 연결돼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중국도 참전? 트럼프식 부담 분담 새 기준 헌법 제5조 앞 고민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호르무즈 항행 보호와 미국의 대이란 전쟁 상황은 현실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는 군함 파견을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초의 압박을 가했던 지난 3월 독일·스페인·이탈리아는 “즉각적인 함정 파견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과 협의하지 않았고, 독일군 파견에 필요한 유엔·유럽연합·나토 차원의 근거도 없다”고 반발했다. 프랑스도 미국의 대이란 작전과 거리를 두면서 미국 주도가 아닌 별도의 호르무즈 통행 확보 구상을 추진했다. 전투 상황이 안정된 후 이란과의 긴장 완화까지 병행하면서 유조선을 호송한다는 취지의 구상이었다. 영국·프랑스는 “방어적이고 독립적인 다국적 임무”라는 명분으로 다국적 방어 임무에 한정해 작전에 참여했다. 영국은 지난 5월 ▲자율 기뢰 탐색 장비 ▲타이푼 전투기 ▲구축함 HMS 드래곤 ▲대드론 장비 등을 보냈다. 하지만 “미국과 함께 이란과 싸운다”는 인상을 지우는 방식의 파병이었다. 애초 트럼프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미국 중심의 연합군이었다. 한국·일본·독일·호주 등은 영국·프랑스의 다국적 임무 공동성명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도 한미 연합 훈련 대폭 축소라는 현실적인 체감이 닥쳐왔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해상 초계기·군수 지원함·기뢰 제거 전력 등 구체적인 군사 옵션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 안보를 위해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데, 한국은 미국이 필요로 할 때 왜 중동에서 역할을 하지 않느냐”는 트럼프식 계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응수였다. 한국의 호르무즈 파병에는 여러 쟁점이 있다. 그런데 그중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헌법적 쟁점이다. 우리 헌법 제5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란 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이란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범여권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파병 요구는 동맹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요구”라며 “국회는 국익과 헌법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파병 요청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엔 독자 지금은 실전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도 “호르무즈에 단 한 척의 군함도 보내서는 안 된다”며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나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한다”는 취지로 규정된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1조였다. 이 의원은 지난 7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다시 파병 반대 주장을 펼쳤다. 그는 “국제 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 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적 가치가 중요한 판단 근거였다”며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이후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에도,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은 유엔 회원국 간 영토 보전·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 위협·무력 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공격과 무력 공격에 대응하는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이다. 따라서 파병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위헌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결국 파병을 결정하더라도 파병 동의안의 문구와 파병 시 수행할 작전의 내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파병 이전에 파병의 성격부터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선전포고는 법적 판단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역사적 문제 제기는 충분히 가능하다. 정식 전쟁 선언과 명확한 전쟁 목표 없이 군사행동부터 선행됐다는 불안정성을 충분히 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전쟁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헌법적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아울러 우리 군의 임무가 무엇으로 규정되느냐에 따라 헌법적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가령 한국군이 ▲상선 호위 ▲기뢰 제거 ▲수색 구조 ▲해상 초계 ▲군수 지원 등에 한정된 임무만 수행한다면 이는 국제 항행 보호 및 자국민·자국 선박 보호 목적의 방어적 해외 파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란 함정 선제 타격 ▲이란 본토 공격 지원 ▲미군의 공격 작전에 정보·표적·화력 측면에서 직접 결합 ▲미국의 작전지휘체계에 편입 등의 상황이 파병의 성격으로 확정된다면 이는 전쟁의 일부로 평가될 수도 있다. 이미 이란은 지난 7일(현지시각) 에스마일 바가이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X에 한국어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은 이 성명을 통해 “현재 이란 국민은 미국의 침략적 행위에 맞서 자위하고 있으며, 여성·어린이를 상대로 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단호히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다른 국가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에서 군사적으로 주둔하거나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의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에 대해서는 “이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64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양국 관계는 줄곧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이란은 대한민국과의 우호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경고했다. 청해부대 딜레마 여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는 지난 3월 <에너지경제신문>의 의뢰로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2명을 상대로 무선(100%) RDD 자동응답조사(ARS) 방식으로 진행한 미국의 해군 파병 요청 관련 긴급 현안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60.9%는 파병에 반대했고, 37.2%는 “매우 반대”였다. 찬성 의견은 34.4%였고 “매우 찬성”을 선택한 사람의 비율은 17.9%였다. 당시에는 파병 반대 목소리가 더 컸다는 간접 근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압박을 가한 현시점에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개혁신당 개혁연구원이 지난 6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7명을 대상으로 무선 RDD 방식의 ARS 자동응답 방식을 적용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론은 첨예하게 엇갈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34.9%는 군 병력 파병을 지지했지만, “방어용 무기만 지원하자”는 의견도 31.8%였다. “군사 지원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도 27.6%였다. 이렇듯 여론도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위헌·여론 비판을 피할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개혁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3월 미국의 요청 이후 현재까지 호르무즈 해협 파병 여부를 최종 결정하지 않았다. 이 같은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전체 응답자 중 50.9%는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을 선택했다. “잘하고 있다”는 응답을 선택한 비율은 42.2%였고, “잘 모르겠다”는 응답을 선택한 비율은 6.9%였다. 지난 3월부터 파병 결정 시 실제 파병할 수 있는 유력한 부대로는 청해부대가 거론된 바 있다. 정부는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2020년 국회 동의 없이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확대해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한 적이 있다. 미국과 이란은 당시에도 충돌했다. 당시 정부는 ‘국군부대의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 파견 연장 동의안’의 단서 조항을 근거로 국회의 별도 동의를 받지 않았다. 동의안에는 “유사시 우리 국민 보호 활동 시에는 지시되는 해역을 포함한다”는 문구가 포함돼있었다. 이를 토대로 문재인정부는 청해부대의 활동 영역을 한시적으로 확대했다. 병력? 무기? 불참? 세 갈래 갈린 민심 다만 당시 청해부대 파병은 미국의 연합군 참여 요청과 무관하게 독자 파병 형식을 취했다. 이 옵션이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상황은 2020년과 다르다. 미국이 다시 ‘미국이 요청한 다국적 호르무즈 군사작전 참여’를 요구하며 강하게 압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해 5월에 이르기까지 청해부대가 실제로 호르무즈 해협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 아울러 당시와 달리 현재 임무·지휘 체계·교전규칙이 질적으로 달라진다면 기존 파병 동의안을 확대 해석해 처리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국회 동의를 받는 게 헌법 제60조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나폴레옹 놀이’를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1806년 베를린 칙령을 통해 영국을 대상으로 한 대륙봉쇄령을 발동했다. 이는 유럽 전체와 영국 간 무역·교류를 모두 차단해 영국 경제를 질식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경제적 피해 때문에 대륙봉쇄령에서 이탈했고,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몰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도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령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은 물론 전략적 적대국인 중국에까지 해협 확보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상황이다.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와 강한 경제 압박도 병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적국의 경제적 생명선 조이기 전략 ▲봉쇄의 성공이 제3국의 협조에 달려 있다는 점 ▲패권국의 강력한 협조 요구 ▲경제·안보 조치가 동맹국 통제 문제로 확대된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이란은 미국의 봉쇄 조치 이후 원유 수출이 크게 감소해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부담 분산과 이란 고립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대륙봉쇄령은 비현실성에서 비롯된 유럽 각국의 비협조·밀무역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이탈을 거쳐 러시아 원정의 대실패로 연결됐고, 결국 나폴레옹 1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균열과 국내 이익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오가면서 21세기판 대륙봉쇄령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란의 경고 우리의 응수 패권국이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참여국이 감수할 수 있는 국익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강제로 만든 연합은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같은 흐름이 보이는 현 상황에서 지지율 하락세에 시달리고 있는 이재명정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3년 전 이라크 파병 문제에 시달리다가 지지율 하락과 진보 진영의 비토에 직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뇌가 이 대통령의 눈가에 아른거리고 있진 않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