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덜트가 부수는 픽셀라이프 세상

건담은 옛말, 요즘은 왁뿌볼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회식 자리에서 소주잔이 몇 순배는 돌았을 저녁 7시. 요즘 2030 세대는 그 시각에 술잔 대신 다른 걸 손에 쥔다. 바로 ‘왁뿌볼’과 키캡이다. NH농협은행이 지난해 상반기 결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30 세대 완구점 지출은 전년 대비 224% 증가했다. 반면 국세청 통계는 국내 주류 출고량이 2022년부터 3년 연속 내리막임을 보여준다. 술값 아까운 줄 아는 요즘 어른들은 장난감 ‘득템’에나 선뜻 지갑을 연다는 뜻이다.

2030 세대라면 퇴근하며 집 근처 편의점에 들르기는 필수다. 장바구니에는 맥주캔이나 소주병 대신 신상 디저트류를 담는다. 근래 가장 유행했던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상하이 버터떡, 봄동 비빔밥은 이미 잊힌 지 오래. 이제 대세는 먹는 ‘왁뿌볼’ 스타일 디저트다. 왁뿌볼은 ‘왁스 뿌시(부수)기 볼’의 줄임말로, 촉감 완구를 말한다.

술잔 대신 키캡
회식 말고 편의점

술을 아예 끊거나 최대한 적게 마시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술값으로 나갈 뻔했던 돈이 고스란히 장난감 가게와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다. 술에 취하는 대신 덕질에 취하는 어른이. 대체 왜 이들의 취향은 늙지 않는 걸까.

아이 같은 취미를 가진 어른을 ‘키덜트(Kidult)’라 부른다. ‘아이(Kid)’와 ‘성인(Adult)’을 더한 콩글리시 조어다. 순우리말로는 ‘어른이(어른+아이)’라고도 한다. 쓰는 말이 달라서 그렇지, 영미권에서도 비슷한 신조어를 여럿 쓴다. 일례로 ‘어덜트후드(Audult+Childhood)’가 있다.

‘키덜트(kidult)’란 단어,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서구권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이와 비슷한 표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건담 프라모델과 콘솔 게임 문화가 확산하던 때.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사 모으는 초기 키덜트 시장이 형성됐다.

야외 활동이 활발하던 이 시대 흐름에서 비껴나 있는 키덜트는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같은 시기 한국 키덜트 역시 소수 마니아가 방 안에서 조용히 혼자 즐기는, 다소 폐쇄적이고 철없는 취미를 가진 이들로 치부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인터넷이 보급되고 게임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캐릭터 소비가 조금씩 대중화할 기반이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무선조종 자동차 모형(RC카), 직소 퍼즐, 서바이벌 게임 용품이 새로운 어른이 놀거리로 떠올랐다.

레고는 아예 성인 라인을 따로 내놓으며 이 흐름에 올라탔다. 어린이 메뉴의 상징이던 맥도날드 ‘해피밀’은 의도한 적도 없는데 어른들의 지갑도 노리기 시작했다. 특히 <해리 포터> 시리즈는 전 연령대를 겨냥해 마케팅할 정도로 판을 키웠다.

당시 키덜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내 안의 키덜트 지수’를 측정해 보는 테스트까지 만들어 지면에 실을 정도였다.

이때만 해도 키덜트는 지금처럼 ‘힙한 문화’가 아니었다.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피겨를 진열하는 모습을 두고, 다소 폐쇄적인 아웃사이더를 연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하면 나이 먹고 철없다는 시선까지 받던 취미였다. 이때 키덜트는 취향을 대놓고 밝히기 민망해했다.

술 대신 덕질에 취한 ‘어른이’
퇴근길 2030 멈춰 세운 굿즈

2010년대에는 키덜트 시장 국경이 무너졌다. 특정 국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었던 여러 캐릭터가 ‘글로벌 IP(지적재산권)’로 통합됐다. 포켓몬, 산리오, 레고, 디즈니, 마블 등 시리즈가 일상 소비문화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포켓몬이다. 1996년 게임으로 시작한 포켓몬은 2010년대를 거치며 몸집을 키웠다. 2024년 기준으로는 연간 라이선싱 매출 약 120억달러, 전 세계 IP 브랜드 순위 7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산리오도 만만치 않다. 헬로키티를 앞세운 산리오는 연간 매출 84억달러로 글로벌 라이선싱 업계 톱10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50세를 훌쩍 넘긴 캐릭터가 여전히 백화점 진열대 중앙을 차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캐릭터 굿즈를 어린이에 국한해 파는 대신, 성인 소비층 공략에 적극 나선 덕분이다.

디즈니는 아예 체급이 다르다. 마블, 스타워즈부터 디즈니 프린세스, 픽사까지 수백개의 IP를 한 지붕 아래 거느린다. 극장 개봉작 하나는 곧바로 피겨·의류·테마파크‧굿즈로 확장되는 구조를 완성했다. 2010년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 때마다, 그 열기는 고스란히 성인 팬들의 소장품 진열장으로 옮겨졌다.

글로벌 캐릭터 상품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곧 어른으로 성장했다. 레고와 포켓몬 등 컬래버레이션 제품군은 아예 18세 이상 권장으로 출시된다. 이는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포켓몬을 좋아하던 키덜트를 정조준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게임보이 시절 ‘가라, 피카츄’를 외치던 세대가, 이제 자기 돈으로 피겨를 사 모으는 어른이 된 셈이다.

이때부터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다. 과거 키덜트가 ‘어릴 적 추억을 다시 사는 어른’이었다면, 2010년대부터는 ‘취향을 증명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재정의됐다. 숨기던 취미가 이제는 자랑할 만한 정체성이 됐다. 키덜트는 변두리에 머물던 하위문화에서 주류 소비문화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2020년대 키덜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제 캐릭터 굿즈는 ‘사는 것’을 넘어 ‘줄 서서 쟁취하는 것’이 됐다. 가장 극적인 신호탄은 2022년 재출시한 ‘포켓몬빵’이었다. SPC삼립이 16년 만에 내놓은 포켓몬빵은 출시 일주일 만에 150만개, 두 달 만에 1400만개가 팔렸다.

RC카에서
포켓몬으로

입고 시간에 맞춰 편의점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반복됐다. 이런 오픈런을 ‘포켓몬런’이라 부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RM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포켓몬빵 구매 인증샷과 ‘띠부띠부씰’ 수집 책자를 공개했다. 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RM은 여기에 포켓몬 캐릭터 스티커를 구하지 못해 “제발 더 팔아주세요”라고 썼다. 이 열풍이 단순 유행이 아니라 어엿한 팬덤 문화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 뒤를 ‘라부부(Labubu)’가 이었다. 2015년 홍콩 아티스트 카싱 룽이 만든 이 요정 캐릭터는 2019년 팝마트가 독점 라이선스를 얻어 상품화했다. 2023년 블랙핑크 리사가 SNS에 라부부 열쇠고리 사진을 올리면서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확산했다. 국내 리셀 플랫폼에서 라부부 거래액은 1년 새 7711% 폭증했다. 2만1000원짜리 인형이 16만3000원까지, 무려 676% 뛰어 되팔렸다.

그다음은 랜덤 뽑기, 즉 ‘가챠(Gotcha)’다. 블라인드 박스를 뜯는 순간의 떨림, 원하던 캐릭터가 나왔을 때의 희열, 실패했을 때의 아쉬움까지.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놀이가 된다. 기다란 대기 줄이 서는 유명 식당 근처에는 어김없이 가챠 숍이 들어섰다. 랜덤 박스 구매 욕구와 리셀 시장의 결합은, 2020년대 키덜트 소비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바꿔놨다.

최근까지도 키덜트는 ‘희소성’과 ‘인증’을 키워드로 움직이고 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한정판을 손에 넣기 위해 줄을 서고, 그 성취를 SNS에 인증하고, 되팔아 시세차익까지 노리는 것. 장난감 하나가 이제는 취향 증거이자, 재테크 수단이자, 뽐낼 수 있는 전리품이 됐다.

“나 이런 거 좋아하네. 몰랐어요. 하나만 더 해봐도 될까요? 쾌감이 있네요. 기분 좋게 부서지네요.” 배우 구교환이 유튜브 카메라 앞에서 왁뿌볼을 손으로 으깨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왁뿌볼은 ‘촉감 놀이’ 형태로 진화한 어른이 장난감이다. 손끝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감각에 매료된 1982년생 배우의 진심 어린 탄성. 이 숏폼 영상은 수만명 시청자에게 묘한 쾌감과 대리 만족을 선사했다.

키캡도 마찬가지. 책상 위 키보드 부속품에 불과했던 키캡이 어느새 가방에 달리기 시작했다. 요즘 2030 사이에서는 키캡을 열쇠고리로 매달고 다니며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딸깍딸깍 눌러본다. 인기 비결은 왁뿌볼과 결이 비슷하다. 반복적인 소리와 촉감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이유에서 입소문을 탔다.

여기에 나만의 이름 머리글자 등을 넣고, 컬러와 장식을 고르는 등 개성을 표현하는 커스텀, DIY 욕구까지 작은 굿즈 하나로 동시에 채울 수 있다는 점이 키캡 인기 핵심 비결이다.

우리는 왜 키덜트, 혹은 어른이란 이름으로 장난감에 열광하게 된 걸까?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이유로는 보상 심리를 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 눈치를 보며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던 로봇과 인형을, 이제 경제력을 갖춘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선물하기 시작했다.

희소성 기본
안정감은 덤

두번째 이유는 IP 진화다. 디즈니, 마블, 산리오 등 글로벌 브랜드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성인층 지갑을 열기 위해 아주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어른용 굿즈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 소재부터 디테일까지 격이 다른 상품들이 소장 욕구를 더욱 자극해 왔다.

세번째는 어린 시절 추억 소환이다. 어릴 적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던 캐릭터 인형과 로봇을 다시 손에 쥐는 순간, 어른이는 잠시 그때로 시간을 되감을 수 있다. 또 순수했던 유년으로 돌아가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놀아본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캐릭터를 손에 쥐면, 집 밖에서 웅크렸던 몸을 이완하고 긴장감을 떨쳐내는 유희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는 불확실성을 꼽을 수 있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은 강력한 쾌감과 연결된다. 미스터리 박스를 뜯는 순간, 혹은 어떤 촉감인지 알 수 없는 왁뿌볼을 손에 쥐고 으깨기 직전 순간에는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설렘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상품 소비보다는 경험 소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설령 원하는 아이템을 얻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굿즈를 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지갑이 허락하는 한.

다섯번째는 감각의 확장을 통한 촉각적 쾌감이다. 요즘 SNS를 점령한 왁뿌볼이 대표 사례다. 왁뿌볼을 두 손으로 주물러 부수는 과정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진열하고 감상하는 데서 그쳤던 장난감이 손가락 끝으로 느끼는 촉각 경험 영역에 들어서게 됐다.

여섯번째로는 단순히 노는 데서 그치지 않고 투자의 영역으로 넘어간 ‘토이 테크’가 있다.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베어브릭’ 등 고가의 캐릭터 피겨, 혹은 특정 브랜드와 협업해 출시하는 제품은 즉각 프리미엄이 거듭 붙으며 거래된다. 2030 세대에게 장난감은 자신의 안목을 증명하는 수단인 동시에, 가치가 상승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똑똑한 자산이다.

이 같은 현상은 키덜트 문화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 제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분석하는 전문 수집 문화가 그 안에 있는 덕분이다. 이제 어른이들은 장난감을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 가치도 덤으로 얹어 구매한다.

이 여섯가지 이유 중 지금, 이 순간 키덜트 시장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를 ‘즉각적 도파민’이라 짚는다.

유년 시절 향수부터 힐링까지
픽셀 단위 소비로 취향 증명

SNS를 점령한 왁뿌볼이 대표적 예다. 쫀득한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모양을 변형시키는 과정은 빠른 속도로 안정감을 준다. 왁뿌볼, 말랑이, 키캡은 복잡한 업무와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가장 쉽고 빠른 스트레스 해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장난감은 보는 것을 넘어, 몸으로 느끼는 경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장난감에 몰입하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통제 가능한 작은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고 분석한다. 현실 세계는 불확실하고 통제하기 어렵다. 삶은 내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손안에 쥔 작은 왁뿌볼 하나만큼은 원하는 대로 주무거나 깨부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은 굿즈를 통제하는 주인이다.

‘디깅(Digging)’은 현대인의 새로운 자아 찾기 방식이다. 남들이 좋다는 것 대신, 내가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에 깊게 파고듦으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키덜트 문화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식이란 뜻이다.

키덜트, 어른이는 더 이상 미성숙한 취미를 지닌 이를 일컫는 말에서 그치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꿈을 키우고 현실화하는 거대한 목표에 달려드는 데서 오는 피로를 느끼느니, 대신 왁뿌볼과 키캡을 구매하는 데 각자의 취향을 발산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또 이들은 하나의 취향과 정체성을 오래 붙들고 사는 것보다 짧고 강렬한 취향의 조각들을 그때그때 모으고 소비하며 ‘지금의 나’를 계속 업데이트하고자 한다. 그게 바로 ‘픽셀 라이프’고, 지금 키덜트들이 매일 행하는 부수고 뜯고 모으는 행위다. 결국, 키덜트의 소비는 취향을 증명하는 행위로 진화하며 주류 문화의 중심에 진입했다.

픽셀 라이프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트렌드 코리아 2026>을 통해 제시한 신조어다. 디지털 화면의 최소 단위인 ‘픽셀(pixel)’에서 착안했다. 삶과 소비를 작고 세밀한 단위로 분절해 짧은 시간 안에 다수의 경험을 소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작고 많고 짧은 소비 경험이 일상의 기본 패턴으로 자리 잡은 현상을 개념화한 용어다.

건담을 완성하던 손이 왁뿌볼을 부수는 손으로 바뀌었을 뿐, 어른이들이 작은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마음은 그대로다. 다만 그 세계가, 이제는 훨씬 더 잘게 쪼개져 있을 뿐이다.

즉각적 도파민
안목 증명 수단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이제는 철 좀 들라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철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보다 나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 작은 것에서 커다란 행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어른의 기술일지 모른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자.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왁뿌볼이 건네는 위로를 기꺼이 받아들여도 좋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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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사다리 누를라’ 세제 개편안의 그늘

‘주거 사다리 누를라’ 세제 개편안의 그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정부가 ‘똘똘한 한 채’를 겨냥한 2026년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시장에서는 개편 방향이 예고된 단계부터 ‘덜 똘똘한 한 채’로 매수세가 옮겨가는 조짐이 나타났다. 이번 세제 개편안이 만들 연쇄 고리의 끝은 집값 상승과 전월세난일까? 정부가 지난 3일 2026년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 개편안은 다음 달 초 정기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과반 의석을 보유한 현재 의회 구도상 당론으로 추진하면 큰 틀에서는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무난한 통과 무성한 논란 핵심 내용 중 논란이 많은 것은 ▲비거주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 기본공제 축소 ▲종부세 공정시장가액비율 인상 ▲종부세 보유 공제를 거주 공제로 전환 ▲종부세 세 부담 상한을 150%에서 200%로 인상 ▲양도소득세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보유·거주로 나눠 재편한 후 거주 공제 중심으로 전환 ▲65세 이상 수도권 1주택자의 지방 이전 시 양도소득세 감면 등이다. 현행 제도에서 1세대 1주택자의 종부세 기본공제는 해당 주택의 실제 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12억원이다. 세제 개편안이 통과되면 내년 1월1일부터 거주용 1주택자(이하 거주자)의 기본공제는 14억원으로 늘어나지만, 소유자가 해당 주택에 살지 않는 비거주용 1주택자(이하 비거주자)는 9억원으로 줄어든다. 여기에 현행 60%인 공정시장가액비율도 1주택자 기준으로 70%까지 오를 예정이다. 따라서 거주자가 공시가격 15억원인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종부세 과세표준은 7000만원이 된다. 반면 비거주자가 공시가격 15억원인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과세표준은 4억2000만원이 된다. 또 종부세에는 연령 공제와 보유 공제가 적용된다. 두 공제를 합치면 최대 80%까지 공제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 70세 이상인 1주택자가 해당 주택을 10년 이상 보유했다면 80%의 공제 혜택을 받는 것이다. 실제 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적용되는 공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편안대로라면 보유 공제는 거주 공제로 바뀐다. 내년도 종부세액 계산 시 현행 40%인 10년 이상 15년 미만 보유자의 공제율은 20%로 줄어든다. 대신 10년 이상 15년 미만 거주한 사람은 40%의 공제 혜택을 받는다. 이어 2028년에는 보유 공제가 완전히 없어져 연령 공제와 거주 공제만 남는다. 불가피한 비거주 사유에 대해서는 최대 3년을 거주 기간으로 인정한다. 해당 사유는 ▲고등학교·대학교 취학 ▲전근·직장 변경 ▲1년 이상 치료·요양 ▲학교폭력 피해에 따른 전학 ▲해외 취학·근무 ▲60세 이상 직계존속 동거 봉양 ▲이에 준하는 불가피한 사유 등이다. 재개발·재건축의 경우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공사 기간의 절반을 거주 기간으로 인정한다. 현행 150%인 보유세(종부세·재산세) 부담 상한도 내년 1월1일부터 200%로 올라간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종부세와 재산세 합계가 전년도 보유세액의 150%를 넘지 않도록 상한 초과분을 종부세에서 제외한다. 전년도 보유세로 1000만원을 낸 사람의 올해 보유세가 2000만원으로 산출됐다면 현행 제도에서는 1500만원까지만 부담하지만, 내년부터는 2000만원 전액을 부담하는 것이다. 실거주 14억·비거주 9억 축소 ‘오래 보유’보다 ‘오래 거주’ 양도소득세 제도도 장기보유특별공제(이하 장특공제)를 거주 중심으로 전환하는 등 크게 손볼 예정이다. 명칭도 주택·조합원입주권의 경우 장기거주 소득공제로 바뀌고, 토지·비주택 건물은 장기보유 소득공제가 된다. 이 제도는 2028년 1월1일 이후 양도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현행 장특공제는 3년 이상 보유하고 2년 이상 거주한 경우 보유 기간과 거주 기간에 각각 연 4%씩, 최대 40%의 공제율을 적용해 합계 최대 80%를 공제한다. 개편안에 따르면 2028년 보유 공제는 연 2%, 최대 20%로 축소되고 거주 공제는 연 6%, 최대 60%로 확대된다. 2029년 이후에는 보유 공제가 없어지고 거주 공제가 연 8%씩 최대 80%까지 적용된다. 65세 이상 수도권 1주택자가 비수도권으로 이전하면 양도세를 감면해 주는 특례는 내년 1월1일부터 2년간 한시적으로 적용된다. 적용 요건은 ▲양도일 현재 만 65세 이상 ▲1세대 1주택자의 양도 ▲수도권 소재 주택 ▲전체 보유 기간 중 총 5년 이상 실제 거주 ▲양도일 현재 해당 주택에서 2년 이상 계속 거주 중 ▲직계비속 등 특수관계인이 아닌 제3자에게 양도 ▲양도일부터 6개월 이내 비수도권으로 이전 ▲본인·배우자의 주민등록상 주소 이전과 실제 거주 등이다.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2027년에는 양도소득세의 50%, 2028년에는 30%를 감면받는다. 일명 ‘똘똘한 한 채’로 불리는 고가 주택 선호 현상에 대해서는 “정부의 다주택자 규제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과중한 부동산 관련 세금과 정부의 대출 규제 강화, 깡통전세 문제 등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부동산 정책 국민 대토론회에서 “거주·주거용인지, 투자·투기용인지 구분하지 않다 보니 그 작은 구멍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며 “‘똘똘한 한 채’가 우리나라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말했다. 임광현 국세청장은 지난달 26일 자신의 X를 통해 “현행 장특 공제는 10년 보유·거주하면 과세 대상 양도차익의 최대 80%까지 한도 없이 공제해 주기 때문에 과하게 역진적”이라며 “비싼 주택일수록, 그래서 차익이 클수록 공제를 더 많이 받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발언에는 세제 개편안의 방향이 대체로 녹아 있다. 정부의 의도는 “서민·중산층의 실거주 1주택은 보호하되, 고가 주택·비거주 주택·다주택에 집중된 세제 혜택은 줄이겠다는 것”이다. 즉 다주택자 규제를 피해 고가 주택 한 채에 자산을 집중하면서 1주택자 혜택을 받는 ‘똘똘한 한 채’ 전략의 구사자, 그중에서도 비거주·초고가 주택 보유자를 겨냥한 것이다. 보유 공제가 거주 공제로 이에 따라 정부는 다주택 보유를 넘어 1주택자라도 보유한 주택의 가격과 실제 거주 여부를 살펴 과세하려고 한다. 개편안은 2027년 과도기를 거쳐 2028년부터 주택 수가 아닌 과세표준에 따른 통합 누진세율을 적용한다. 이에 따라 주택 수와 관계없이 고가 주택일수록 높은 세율이 적용된다. 정부가 세제상 유도하는 선택은 실거주, 제도 시행 전 매도 또는 높아진 세 부담의 감수다. 다만 소유자는 이에 대응해 매각을 미루거나 증여·상속 등 다른 처분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결국 정부는 “적정 가격의 주택 한 채에 실제로 장기간 거주하는” 주택 소유자를 우대하려는 것이다. 정부가 다주택자에게 매도 기회를 제공하는 기간은 2027년부터 2년간이다. 이를 위해 종부세 부담은 높이고 양도세 중과 폭은 한시적으로 낮춘다. 조정대상지역 주택을 양도하는 2주택자는 기본세율에 붙는 중과 폭을 현행 20%포인트에서 2027년 5%포인트, 2028년 10%포인트로 낮춘다. 3주택 이상 보유자는 현행 30%포인트에서 각각 10%포인트와 15%포인트로 완화한 뒤 2029년 현행 수준으로 복원한다. 1주택자가 조정대상지역 내 새 집을 취득해 일시적으로 2주택이 됐을 때에도 신규 주택 취득일부터 2년 안에 조정대상지역 내 기존 주택을 매각하면 양도소득세 1세대 1주택 비과세와 종부세 1주택 특례를 모두 적용받을 수 있다. 현행 3년인 처분 기한을 2년으로 줄인 것이다. 정부는 기존 다주택자에게 매각을 유도하고, 일시적 2주택자에게도 종전 주택을 빨리 처분하도록 압박하려고 한다. 짧은 기간 안에 주택을 교체해 다주택자 지위를 청산하고 실거주 1주택자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부는 만 65세 이상 1세대 1주택자의 비수도권 이전 특례에 대해 “수도권 고령 1주택자의 주택 처분을 유도해 비수도권 이주를 활성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지원한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정부는 수도권 고령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잠금 효과를 풀어 기존 주택 매물을 늘리려고 한다. 또 수도권 고령자의 이주와 주택 매각대금의 비수도권 유입을 유도해 지역 인구와 소비도 늘리려고 한다. 부동산시장 정책이자 지역 균형 발전 정책인 셈이다. 팔라는 정부 버티는 시장 초고가 비거주 주택의 세후 보유 수익률이 떨어지면 수요자의 선택은 ▲주택시장에서 완전히 이탈해 금융자산 등으로 이동 ▲실거주 전환 ▲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차하위 주택으로 이동 등으로 나뉠 수 있다. 이 가운데 차하위 주택으로의 이동은 ‘풍선 효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시장에서는 개편 방향이 예고된 단계부터 ‘덜 똘똘한 한 채’로 매수세가 이동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한국부동산원이 지난 6일 발표한 8월 첫째 주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 3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에서 이전과 다른 흐름이 감지됐다.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의 상승 폭은 ▲서초구 0.02% ▲강남구 0.01% ▲송파구 0.15% 등 지난달 이후 4주 연속 줄었지만, 마포·용산·성동구 등 한강벨트는 ▲마포구 0.39% ▲용산구 0.18% ▲성동구 0.16% 등 주춤했던 상승 폭이 다시 확대됐다. 아파트 가격 상승 폭은 ▲중구 0.54% ▲중랑구 0.52% ▲성북구 0.49% ▲노원구 0.46% ▲서대문구 0.43% 등 강북권에서 두드러졌다. 임대 중인 비거주 주택의 소유자가 거주 공제를 받기 위해 계약 종료 후 직접 입주한다면 기존 임차인은 다른 전월세 주택을 찾아야 한다. 소유자가 직접 입주하지 않더라도 늘어난 보유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전세를 월세·반전세로 전환하거나 신규 계약 때 임대료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 임차인은 다른 전월세 매물을 찾거나 차하위 주택 매수에 나선다. 그 결과 차하위 주택의 매매가격과 임대료에도 추가적인 상승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해당 주택에 살던 임차인도 다른 전월세 매물을 찾거나 그보다 낮은 가격대의 주택 매수에 나선다. 세제 개편안이 확정된 뒤에도 이 흐름이 이어지면 장기적으로 연립·다세대의 가격 상승과 전·월세난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대체 수요의 하방 전이’이자 ‘주거 사다리의 연쇄 압착’이라고 설명한다. 정상재인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가구의 실질 주거 구매력이 줄어들고, 일부 수요는 대체재이면서 해당 가구에는 열등재적 성격을 띠는 연립·다세대주택 등 차하위 주택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차하위 주택의 가격과 임대료에도 상승 압력이 가해진다. 여러 채보다 비싼 한 채? 출구 2년 열긴 했는데… 집값 압력 아래로 확산…다시 고개 든 ‘세입자론’ 이 같은 연쇄의 첫 단계인 규제선 아래로의 대체 수요 이동은 실증 사례로도 확인된다. 문재인정부 시절인 2019년 12월16일 발표된 ‘12·16 부동산 대책’은 투기 지역·투기 과열 지구 내 시가 15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한 주택 구입용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금지했다. 이후 규제선인 15억원 이하 아파트로 거래가 비정상적으로 몰렸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를 두고 “규제가 거래 억제보다 강한 수요 재배치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초고가 주택 수요 억제의 충격은 이처럼 핵심지 중소형·준고가→인접지·외곽 준고가→중저가 소형 아파트→연립·다세대 등 비아파트로 연쇄적으로 번지면서 매매·임대시장 모두에서 장기간 수요를 늘릴 수 있다. 가격대별 주택 수요 이동을 완화할 열쇠로는 공급이 거론된다. 하지만 주택 공급은 단기간에 빠르게 늘지 않는다. 서울·수도권의 선호 지역 아파트는 입지 자체가 한정돼있다. 특히 이번 세제 개편안에서는 공정시장가액비율 인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정시장가액비율 인상은 같은 공시가격에서도 과세표준을 키워 상위 누진세율 구간 진입을 앞당긴다. 이에 따라 종부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가격대나 주택 규모로 수요가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정책 발표 전부터 나타난 ‘덜 똘똘한 한 채’ 강세는 이런 대체 수요 이동의 초기 조짐으로 읽힐 수 있다. 임대시장에서는 세 부담 상한 인상에 따른 조세 전가 가능성도 거론된다. 부동산학에서는 종부세·재산세 등 보유세 인상분이 전·월세 가격에 반영돼 세입자에게 일부 전가될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다뤄왔다. 여기에 집주인의 실거주 전환이 늘어난다면 종부세 대상 주택이 밀집한 지역과 가격대에서 임대 매물이 줄어들고, 기존 임차인이 차하위 임대시장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65세 이상 수도권 1주택자의 지방 이전을 유도하는 양도소득세 감면 특례 역시 국지적 풍선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65세 이상 가구의 이주 목적지는 통상 ▲종합병원·의료기관 접근성 ▲수도권과의 교통 연계 ▲대중교통 및 생활 편의시설 ▲노인 복지·요양시설 ▲관리가 쉬운 신축 중소형 아파트 ▲문화·상업시설 등을 고려해 선택된다. 이런 요건을 갖춘 지방 대도시와 일부 거점 지역으로 수요가 몰릴 수도 있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은 지난달 26일 <한국경제>에 ‘국민을 세입자로 남길 것인가’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유 전 청장은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부동산 대토론회를 보면서 현 정부가 지향하는 주택 소유 구조가 국민의 내 집 마련을 확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수가 공공이 소유한 집에서 임차료를 내며 사는 사회로 가려는 것인가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2011년 발간한 <부동산은 끝났다>에 나온 “자가 소유자는 보수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진보적인 성향이 있다”는 문구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김 전 실장은 영국 보수당의 자가 소유 촉진책에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고 주장했다”며 “이런 탓에 진보 정권은 국민의 집 소유를 막기 위해 정책을 편다는 음모론까지 나온다”고 덧붙였다. 의도는 규제 결과는 불신 초고가 비거주 주택 과세 강화가 ▲‘덜 똘똘한 한 채’로의 수요 이동 ▲중저가 주택 가격 상승 ▲무주택자의 매수 진입선 상승 ▲매수 포기자의 임대시장 잔류 ▲임차 수요 증가와 전월세난 ▲저가주택과 비아파트 임대료 압박 등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면, 음모론은 더욱 확산될 수도 있다. 이번 세제 개편안도 음모론이 자랄 토양이 될 것인가.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