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당동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20여명의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자리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 학창 시절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모두 고희(칠십)을 눈앞에 둔 나이지만 친구를 만나면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동창회의 묘미다.
친구들의 근황을 듣다 보니 은퇴 후 삶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대부분은 평생 해오던 일을 조금 더 이어가고 있었다. 대기업 출신 친구는 협력업체에서 기술 자문을 하고 있었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이 몸담았던 업계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을 조금 더 확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반면 한 친구는 지금도 현역 한의원 원장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다. 최근에는 질병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담은 <담음병리학>도 곧 출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오랜 세월 태양광발전소 개발로 쌓아온 경륜을 바탕으로 여전히 현업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꾸준히 발전시키며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필자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이닉스 중국법인에서 임원으로 근무했던 친구 K다. 그는 최근 전기기사 1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것도 합격률이 16 대 1에 달하는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놀라움과 존경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이 나이에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도전이다”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러나 필자가 진정 놀란 것은 합격 자체가 아니었다. 무엇을 합격했느냐보다 왜 그 시험에 도전했느냐가 더 궁금했다.
K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평생 반도체 설계와 제조 분야에서 일한 반도체 전문가다. 미국과 중국에서도 핵심 인재로 인정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은퇴 후에도 반도체나 전자공학 분야를 조금 더 연구하거나 후배를 양성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자신의 전공과 전혀 다른 전기 분야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길을 넓히는 대신 낯선 길을 새롭게 열어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필자는 자연스럽게 최근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던 유시민 작가의 ‘증축론’과 ‘재건축론’이 떠올랐다. 오래된 건물에 공간을 더 만드는 것은 증축이다. 기존의 틀은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넓히는 방식이다. 반면 재건축은 기존 건물을 과감히 허물고 처음부터 새롭게 짓는 것이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더 가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사람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기존 지식을 조금 더 쌓는 것은 증축이고, 전혀 새로운 분야를 배우며 자신을 다시 만드는 것은 재건축이다.
유시민 작가는 이재명정부를 향해 “증축이 필요한데 재건축을 하고 있다”는 취지의 비판을 내놨다. 필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물론 분야에 따라 증축이 더 적합한 경우도 있다. 이미 경쟁력이 충분한 분야라면 굳이 허물고 다시 지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AI가 산업과 행정, 교육, 기업의 경영 방식은 물론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존의 틀을 조금 고치는 수준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때로는 과거의 성공 공식까지 과감하게 내려놓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AI 시대만큼은 증축보다 재건축의 용기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앞서 말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처럼 전문성을 확장하거나 한의사와 태양광발전소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처럼 튼튼한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K는 그 두 길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이어가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다시 만든 것이다.
K의 도전은 바로 그런 재건축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을 붙잡지 않았으며, 과거의 명함으로 미래를 살아가려 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해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전기기사 자격시험 준비에 몰두했다고 했다. 그에게 자격증은 단순한 스펙이 아닌, 자신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K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한 친구가 “AI 시대에는 우리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동창회 화제는 곧 AI와 새로운 배움으로 옮겨갔다. 친구들은 “이제는 증축만으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재건축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AI는 기존 산업과 직업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수십년 동안 쌓아온 경험도 AI와 결합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과거의 성공 공식이 미래에도 통할 것이라는 보장이 사라진 시대다. 이제는 조금 더 배우는 사람보다 필요할 때 새롭게 배우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되고 있다. K의 선택은 개인의 도전이 아니라 AI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존 전략처럼 보였다.
K는 또 하나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50대 초반 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병을 불행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K는 달랐다. 그는 암을 결과로만 보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이 병이 생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고 했다. 병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생활습관은 물론 식습관까지 바꾸고, 운동을 시작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며 삶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꿨다. 몸을 다시 세우는 재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병과 싸우기보다 자신의 몸과 미래를 재건축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결과를 붙잡고 한탄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결과를 새로운 원인으로 받아들이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암은 그의 인생을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인생을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됐다.
건강을 되찾은 뒤에도 그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새로운 습관을 찾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번 전기기사 1급 자격증도 그렇게 이어진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K가 왜 과거에 미국과 중국에서 핵심 인재로 인정받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질병도 모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원인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과를 끝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결과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멈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결과 중심으로 움직인다. 시험에 합격하면 성공한 사람이고 떨어지면 실패한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사업이 잘되면 능력 있는 사람이고 어려워지면 무능한 사람이라고 쉽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이다. 결과는 끝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결과에서 새로운 원인을 찾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결과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때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노키아와 코닥은 과거의 성공이라는 결과에 머물렀다가 변화의 흐름을 놓쳤다. 반면 엔비디아는 게임용 그래픽칩 기업이라는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AI 시대를 내다보고 스스로를 AI 반도체 기업으로 과감하게 탈바꿈시켰다. 같은 성공을 경험했지만 누구는 그 성공을 지키려 했고, 누구는 그 성공을 새로운 도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 차이가 오늘의 기업가치를 만들었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과거 산업혁명의 성공 경험만 믿고 변화하지 않았던 나라는 뒤처졌고, 디지털과 AI를 국가 전략으로 받아들인 나라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결국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미래를 결정하는 힘은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를 새로운 원인으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
AI 시대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버틸 것인가, 아니면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갈 것인가. 과거의 성공을 지킬 것인가, 미래의 경쟁력을 다시 만들 것인가. AI는 사람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을 뒤처지게 만드는 기술이다. 앞으로 가장 경쟁력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빨리 배우고, 가장 빨리 바꾸고, 가장 빨리 다시 시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임을 마치며 우리 동기들은 하나의 약속을 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결과로만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성공도 실패도 모두 새로운 원인으로 삼아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이었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자신을 다시 세우기로 했고, 누군가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으며, 누군가는 남은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설계하기로 각자 다짐했다.
사당동 동창회에서 만난 K는 단순히 전기기사 1급 자격증 하나를 취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삶의 철학을 증명했다. 결과를 자랑하지 않았고, 실패를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는 모든 결과를 다시 원인으로 바꾸는 삶의 태도를 끝까지 실천하는 자였다.
필자는 동창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증축은 과거를 조금 더 오래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건축은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방법이다. AI 시대는 더 이상 증축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때로는 과감하게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한다. 지식을 다시 설계하고, 습관을 바꾸고, 건강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까지 새롭게 그려야 한다.
그 모든 변화는 하나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과를 끝으로 받아들이지만, 미래를 바꾸는 사람은 결과를 새로운 원인으로 바꾼다. 실패는 더 나은 성공의 원인이 되고, 성공은 더 큰 도전의 원인이 되며, 위기는 더 강한 자신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AI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용기다. 결국 AI 시대의 미래는 결과를 끝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를 새로운 원인으로 바꾸며 끊임없이 자신을 재건축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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