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현대는 ‘지금처럼’ 시대

선진국은 미래보다 현재 즐기는 나라

몇 달 전 한 방송에서 프랑스에서 살던 젊은 부부가 제주도로 건너와 행상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왜 안정적인 삶을 포기했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싫었다. 우리는 지금을 즐기며 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는 단순히 직업을 바꾼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철학에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 느꼈다.

선진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왜 현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다. 산업화 시대에는 그것이 맞는 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다. 최근 코스피 7000 시대를 넘어서면서 경제 규모와 국가 경쟁력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국가 경쟁력
새로운 단계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는 나라에서 현재를 누릴 줄 아는 나라로 생각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

미래 위해 현재를 포기한 나라=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가 놀라는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삶이었다. 오늘보다 내일을 바라보며 일했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뒤로 미뤘으며, 저축은 미덕이었고 소비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현재보다 미래가 훨씬 중요했던 시대였다.

산업화 시대의 대한민국은 ‘오늘의 행복’보다 ‘내일의 성공’을 선택했다. 부모들은 자신의 옷 한 벌 사 입는 것보다 자녀 학원비를 먼저 걱정했고, 휴가를 떠나는 것보다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회사원들은 지금의 여유보다 승진을 위해 밤늦게까지 일했고, 기업도 현재의 이익보다 미래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국가를 살리는 길이었고, 국민 모두가 그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됐고,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배터리,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까지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됐다. 국민들의 땀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래를 위한 인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산업화 세대가 선택했던 미래 중심의 철학은 분명 대한민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올린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성공을 만든 방식이 영원히 정답일 수는 없다. 산업화 시대의 철학을 선진국 시대까지 그대로 가져온다면 오히려 삶의 질은 떨어질 수 있다. 계속 달리기만 하는 사람은 결승선에 도착해도 풍경을 즐기지 못한다. 평생 미래만 준비하다 보면 정작 미래가 현재가 됐을 때도 또 다른 미래만 준비하게 된다.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현재를 즐기는 것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선진국은 현재를 즐기는 나라= 최근 대한민국은 코스피 7000 시대를 열며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는 ‘선진국 문턱’이라는 표현보다 ‘선진국’이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다. 우리는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문화를 함께 이끄는 나라가 됐다. 세계는 이미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아직도 개발도상국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이 현재를 즐길 줄 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중요하고, 성장도 중요하지만 삶도 중요하다는 가치가 사회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국민소득이 높다고 선진국이 아니라 국민이 현재의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미래보다 현재 즐기는 나라
삶을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

프랑스에서 제주도로 온 젊은 부부가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철학이었다. 그들의 경제 수준을 따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자세를 배우자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모두 희생하는 삶도, 과거의 성공만 붙잡고 사는 삶도 결국 현재를 잃게 만든다. 현재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미래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선진국은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아니라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국민이 많은 나라다.

정부도 ‘지금처럼’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 정책도 시대 변화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미래를 위한 투자와 성장 중심 정책이 국가 발전의 핵심이었다. 도로를 깔고, 공장을 세우고, 산업단지를 조성하며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국가 과제였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며, 앞으로도 국가 경쟁력을 위해 미래 전략은 계속 필요하다.

그러나 선진국 시대 정부의 역할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이 오늘 체감하는 행복을 높이는 정책이 함께 추진돼야 한다. 교통과 의료, 문화와 복지, 교육과 주거, 돌봄과 여가처럼 국민이 매일 경험하는 정책이 국가의 품격을 결정한다. 국민은 10년 뒤의 행복보다 오늘의 불편이 먼저 해결되기를 원한다. 지금의 삶이 편안해야 미래에 대한 기대도 커질 수 있다.

물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바이오, 우주산업처럼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미래 전략도 결국 국민의 현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오늘 행복하지 못한데 미래만 이야기하면 정책은 공허한 구호가 될 뿐이다. 미래는 현재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현재를 희생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제 정부 정책에도 ‘지금처럼’이라는 철학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나라가 내일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도 챙겨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정책에 대한 신뢰도 커진다. 선진국 정부는 미래를 설계하는 정부이면서 동시에 국민의 오늘을 책임지는 정부여야 한다.

술 이름도 시대 닮는다= 시대는 문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과 상품 이름에는 그 시대의 가치관이 담긴다. 술 이름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단순히 술 이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꿈꾸는 삶을 함께 이야기한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과 성공을 담은 이름들이 사랑받았다. 모두가 더 잘살게 될 내일을 꿈꾸며 건배를 했다. 산업화가 어느 정도 성공한 뒤에는 ‘처음처럼’이라는 이름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처음 시작할 때의 순수함과 열정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고, 오랜 친구를 만나도, 회사 회식을 해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개발도상국
사고방식

처음처럼이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술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름 속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여기까지 달려온 세대의 추억과 열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가 국민의 감성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 시대에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필자는 ‘지금처럼’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행복을 지키고, 지금의 성과를 함께 누리며,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는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 건배 구호도 변한다. 미래를 위해 잔을 들던 시대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잔을 들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현재를 축하하며 잔을 드는 시대가 와야 한다.

톨스토이가 말한 가장 중요한 시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생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탐구한 끝에 한 가지 단순하지만 위대한 결론을 내렸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미래를 미리 살아볼 수도 없다. 인간이 실제로 행동하고 사랑하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과거의 영광을 붙잡거나 미래의 불안을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친다. 현재를 잃으면 결국 과거도 의미를 잃고 미래도 만들어질 수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필자는 톨스토이가 이 깨달음을 조금 더 젊었을 때 얻었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늦게라도 그가 남긴 철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선물이 됐다. 성공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국가도 결국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그래서 선진국 시대의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철학 역시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기라”는 이 한마디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중에 행복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은 미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다.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도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 오늘을 희생하는 데만 익숙한 사람은 내일이 와도 또 다른 내일만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선진국 대한민국의 새로운 좌우명은 처음처럼도, ‘나중처럼’도 아닌 지금처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탁구공은 현재에서 튀어 오른다= 필자는 오래전 ‘탁구공의 원리’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탁구공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과거고, 바닥에 닿는 순간은 현재며,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은 미래라고 비유했다. 많은 사람은 공이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를 과거의 힘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은 바닥이다. 즉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만들어진다.

시대가 변하면
건배도 변한다

아무리 과거가 화려해도 현재라는 바닥이 진흙이라면 공은 높이 튀어 오르지 못한다. 반대로 과거가 평범했더라도 현재라는 바닥이 단단하거나 용수철처럼 준비돼 있다면 공은 훨씬 더 높이 튀어 오른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사실이지만 현재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현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았던 사람이라도 지금 배우기를 멈추면 미래는 평범해질 수 있다. 반대로 과거에는 특별하지 않았던 사람도 지금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면 누구보다 높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사람의 경쟁력은 과거의 이력이 아니라 현재의 태도에서 나온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기업이 현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진 사례는 수없이 많다. 반대로 작은 기업이 현재의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많다. 기업의 미래는 과거의 실적보다 현재의 혁신 역량이 결정한다.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산업화의 성공을 자랑하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국민이 지금 행복하고, 지금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미래에도 강한 나라가 된다. 현재를 관리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를 잘 만드는 나라가 미래도 가장 강한 나라’라고 믿는다.

후진국·중진국·선진국의 시간 철학= 필자는 국가의 발전 단계도 시간의 철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진국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현재가 어렵기 때문에 희망을 이야기해야 버틸 수 있다. ‘언젠가는 잘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국민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래서 후진국일수록 미래를 향한 구호가 많다.

중진국은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제 막 이룬 성과를 확인하고 자랑하면서 자신감을 얻는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자부심이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산업화의 성공과 민주화의 성취를 되새기며 더 큰 도약을 준비한다. 그래서 처음의 열정과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처음처럼이 잘 어울리는 시대다.

반면 선진국은 현재를 이야기한다. 이미 일정한 성과를 이뤘기 때문에 그 성과를 국민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 성장의 숫자보다 삶의 질을, 생산량보다 행복지수를, 경쟁보다 여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삶이 행복해야 내일도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후진국은 꿈꾸며 버티고
중진국은 과거 발판으로
선진국은 풍요를 누린다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후진국은 희망을 먹고 살고, 중진국은 성과를 먹고 살며, 선진국은 행복을 누리며 산다. 후진국은 미래를 꿈꾸며 버티고, 중진국은 과거의 성공을 발판으로 도약하며, 선진국은 현재의 풍요를 국민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를 만든다. 이것이 시간을 바라보는 국가의 철학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나중처럼의 시대도, 처음처럼의 시대도 아니다. 물론 미래를 준비해야 하고 초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중심 철학은 현재를 향해야 한다. 지금 국민이 행복해야 하고, 지금 청년이 희망을 가져야 하며, 지금 노년이 안정감을 느껴야 한다. 선진국의 기준은 GDP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국민의 표정이다. 그래서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이제 지금처럼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현대는 ‘지금처럼’ 시대= 물론 필자가 현재를 강조한다고 해서 미래를 준비하지 말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또 과거의 경험과 성공도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모두 희생하거나, 과거의 성공에만 머물러 현재를 잃어버리는 삶은 이제 선진국 대한민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부는 국민이 오늘 체감하는 정책을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기업은 직원들이 지금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학교는 미래의 인재를 키우면서도 학생들의 현재를 존중해야 한다. 가정 역시 자녀의 미래만 걱정하기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오늘의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지금처럼은 특정 세대만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가져야 할 새로운 가치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이제 시간에 대한 철학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미래를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다. 성장하던 시절에는 처음의 열정을 잊지 않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답게 현재를 즐기고, 현재를 가꾸고, 현재를 행복하게 만드는 문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미래도 지속될 수 있고, 과거의 성과도 더욱 빛날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언젠가는 잘살자’는 꿈으로 버텨왔고 그 꿈은 현실이 됐다. 이제는 또 다른 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더 많이 갖는 나라가 아니라 더 잘사는 나라, 더 오래 일하는 나라가 아니라 더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현재를 누릴 줄 아는 국민이 미래도 행복하게 만든다. 현재를 사랑하는 나라가 오래가는 선진국이다.

지금을
즐기다

프랑스에서 제주도로 건너온 젊은 부부는 필자에게 “당신은 지금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미래만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라는 작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정부에도,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도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 질문에 새로운 답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선진국을 꿈꾸는 나라가 아니다. 이미 선진국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선진국답게 살아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도 말고, 미래의 불안에 매이지도 말자. 오늘의 행복을 알고, 지금의 성과를 누리며, 현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현대는 지금처럼 시대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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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가득한 보완수사권 폐지 후폭풍

의문 가득한 보완수사권 폐지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70년 넘게 유지된 우리나라 형사제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오는 10월 검찰청 폐지와 맞물려 사회에 많은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정부 때부터 힘을 키워온 경찰은 이번 개정안으로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동시에 경찰은 국민의 질문에 답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경찰을 믿을 수 있나? 지난달 31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형소법 개정안은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제 검사는 사법경찰관에게 보완수사를 ‘요구’할 권한만 갖는다.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래 72년 만에 가장 큰 사법체계 변화를 마주하게 됐다. 격변하는 형사제도 형소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주도로 이뤄졌다. 표결 결과 재석 의원 178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2명, 기권 1명으로 가결됐다. 민주당 곽상언 의원과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이 반대했고, 민주당 이소영 의원이 기권표를 던졌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불참했다. 이번 개정안에는 보완수사권을 포함해 오는 10월 신설되는 공소청 검사의 수사권을 전면 폐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수사 과정에서의 모든 자료를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 기록하도록 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장치로는 경찰이 사건을 불송치할 경우 고소인‧피해자‧고발인이 이의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필요한 사건 기록 열람‧등사 권한도 부여했다. 이번 형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그동안 민주당이 주도해 온 검찰개혁은 마무리 수순에 접어 들었다. 앞서 민주당은 지난해 9월 검찰청 폐지를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에 따라 오는 10월2일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하는데, 공소청 검사는 공소 제기와 재판 유지만 맡는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국회 본회의 통과 직후 청와대에서 환영의 메시지가 나오면서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날 청와대는 “국회의 입법 과정과 최종 판단을 존중한다”며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통해 권력의 독점과 남용을 막는 한편, 피해자와 국민 인권 보호 수준을 높임으로써 형사사법 시스템이 국민 곁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국민 10명 중 6명 반대 여당 주도 본회의 통과 이 대통령은 거부권 대신 ‘사필귀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삶을 더욱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모든 권력기관은 예외 없이 국민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사필귀정의 필연적 조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수사·기소 분리는 비정상적 형사사법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라고도 했다. 국회 본회의 통과, 국무회의 의결 등 법안 공포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우리나라 사법체계는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 ‘경찰’이 놓였다. 문재인정부 당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기소 독점주의가 깨지면서 경찰에 실리기 시작한 힘은 이번 형소법 개정안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번 형소법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검찰에 ‘보완수사권’이라는 견제 기능을 남겨둘지를 두고 진통이 상당했다. 형소법 개정안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만큼 경찰에 집중되는 권한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보완수사권은 그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다. 실제 보완수사권 폐지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압도적으로 반대가 높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의 의뢰로 지난 1~3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보완수사권 존치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62.5%가 ‘검찰에 보완수사 권한을 줘야 한다’고 답했다.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31.8%로 나타났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53.8%가 ‘보완수사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모든 지역에서 과반을 기록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73.1%로 가장 높았고 서울 64.7%, 호남권에서도 59.9%가 ‘보완수사권을 존치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남녀노소, 지지 정당,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 ‘보완수사권이 필요하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존치 의견 우세해도… 존치 찬성자들은 경찰의 수사 능력을 의심했다. 검찰보다는 경찰이 국민과의 접점이 더 넓은 상황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수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장윤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형소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진 감도 없지 않았다. 장윤기 사건은 지난 5월 광주 광산구 월계동 남부대학교 인근에서 장윤기가 여고생을 흉기로 살해한 내용이다. 이 여고생의 비명을 듣고 달려간 남학생도 크게 다쳤다. 장윤기와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알려지면서 ‘묻지마 범죄’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장윤기 사건에 경찰인 그의 아버지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장윤기의 부친을 비롯한 경찰 관계자가 사건에 개입해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 관련 정보를 누설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게 검찰의 보완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장윤기의 아버지가 아들의 방에서 없앤 리얼돌은 성범죄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여겨졌다. 10대 여고생이 피살된 사건에서 경찰이 가해자 측과 유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보완수사권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경찰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 장치라도 남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범죄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더해졌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모씨는 보완수사권 폐지와 관련해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김씨는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무소속 한동훈 의원 주최로 열린 보완수사권 폐지 긴급 간담회에 참석했다. 피해자들 나섰지만… 김씨는 “세금을 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고 왜 그들(범죄자)을 보호하고 감싸려고 하는지, 죄를 짓지 않은 피해자는 잘 모르겠다”며 “변호사와 검사도 반대하고 경찰도 난리 나고 피해자도 반대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금 이 시점에도 피해받는 피해자에 대한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도 형소법 개정안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 전 경찰 수사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형소법 개정안이 국회 입법권을 부정할 만큼 심각하진 않다고 전제하면서도 경찰에 집중되는 거대한 권한을 걱정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경찰이 엄청난 권한을 갖게 되는데 ‘앞으로 안전할 걸까’라는 우려를 안 할 수가 없다”며 “경찰 스스로 책임 의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높은 책임감으로, 높은 윤리 의식으로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철저하게 범죄 피해자들이 억울하지 않게, 또 억울한 피의자가 생기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의 수사 비리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수사에 관한 비리를 저지르면 국민이나 피해자로서는 내 사건을 저렇게 망가뜨려서 가해자, 피해자를 뒤집어 놓으면 자살하고 싶을 정도가 됐는데, 담당 경찰은 감봉 몇 개월하고 또 딴 데 가서 수사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엄청난 힘” 우려하면서도 거부권 요구에 “심각하지 않아” 이어 “(경찰이) 증거를 숨기고 없애 버리고 내 사건을 뒤집어서 반대로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엄중함을 갖고 있냐. 전 자신이 없다”며 “수사와 관련된 비리나 비위에 대해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명백한 수사상의 비위가 발생하면 최소 해임, 파면 등의 조치를, 아니면 아예 영구적으로 수사를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는 등의 엄중한 책임을 언급했다. 형소법 개정안 통과로 사실상 수사의 전 과정을 맡게 된 경찰은 조직의 명운을 걸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경찰청은 지난 4일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과 전국 시‧도 경찰청장,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지휘부 회상회의를 열었다. 형소법 개정안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현장 수사관과 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개정 내용을 집중 교육하고 보강이 필요한 수사 인력과 예산을 검토해 관계 부처와 협의하기로 하는 등의 내용이 나왔다. 유 직무대행은 “국민께서 경찰 수사의 공정성과 신속성, 범죄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 경찰의 비대화 등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경찰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새로운 형사사법 체계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조직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경찰도 예외가 아니”라며 “경찰관 배우자 및 존‧비속 상피제와 경찰 수사 인권‧감찰 조사기구, 경찰 수사 개혁위원회 권고 사항 등을 포함한 촘촘한 통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경찰 수사의 유일한 지향점은 국민이며 기준은 오직 법과 원칙”이라며 “새로운 형사사법 체계가 국민의 신뢰 속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분골쇄신의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불신 의심 극복되나 이 대통령의 당부, 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불신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여기에 경찰 내부에서도 이번 개정안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에 일이 몰려 과부하가 걸린 부분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수사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