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브라질을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은 화상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며 중동 정세 불안으로 국제유가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며 석유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 정책을 당분간 유지하고, 물가 안정을 위한 선제 대응을 주문했다. 국제 물류 불안에 대응하는 민생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정부는 중동 홍해를 둘러싼 긴장이 계속되고 국제유가가 한 달 사이 40% 가까이 급등하자, “25일 오전 12시부터 4주간 적용될 8차 석유 최고가격을 기존 7차 최고가격으로 동결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국내 정유사들도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의 송유관을 연계한 새로운 원유 운송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 원유는 당초 한 달이면 도착할 물량이 두 달 가까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실제로 국제 물류길에 대한 불안은 유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원유와 원자재 운송 차질 우려가 커질 때마다 국제 증시는 해운·에너지 관련 종목을 중심으로 출렁이고, 제조업과 소비시장도 원가 부담을 즉각 반영한다. 운송비 상승은 기업의 생산비와 물류비를 끌어올리고, 결국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국민의 장바구니까지 흔든다.
지금은 길 하나가 막히거나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유가와 증시, 물가가 출렁이고 산업과 국민 생활까지 함께 흔들리는 시대다. 필자는 이 상황을 보며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결국 ‘물류의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지구본을 천천히 돌리며 세계의 물류길을 따라가 봤다. 그 결과 가장 유리한 물류 환경을 갖춘 대륙은 단연 유럽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최근 유럽에서는 독일과 덴마크를 연결하는 페마른벨트 해저터널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예정대로 2029년 완공되면 세계 최장급 침매식 해저터널이 탄생한다. 그동안 배를 이용하거나 크게 우회해야 했던 길이 터널 하나로 연결되면서 이동 시간과 물류비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교통망을 갖춘 유럽이 지금도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짧은 길을 만드는 것이 곧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명의 발전은 언제나 길의 발전과 함께했다. 산을 만나면 돌아가지 않고 터널을 뚫었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놨다. 바다를 만나면 운하를 건설했고, 하늘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항로를 개척했다. 이동거리가 짧아질수록 시간이 줄고 비용이 낮아지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다.
지금도 세계는 더 짧은 길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태국의 크라 운하는 말라카 해협을 우회하는 새로운 해상 물류축으로 꾸준히 논의되고 있고, 니카라과 운하 역시 파나마 운하를 보완할 대안으로 여러 차례 추진되고 있다.
경제성과 환경, 국제정치라는 현실적인 과제 때문에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세계가 새로운 물류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앞으로 세계 교역량이 계속 늘어난다면 이들 프로젝트는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운하는 길을 줄이는 것이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를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선박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지 않도록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튀르키예로 향하는 일부 항로의 경우 희망봉을 이용할 때보다 운항거리를 약 45% 줄이고 운항일수도 약 18일 단축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파나마 운하 역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해 선박이 남아메리카 최남단을 돌아가는 수천㎞의 항해를 줄여주고 있다. 운하 하나가 항해시간과 연료비, 선박 운용비를 동시에 줄이면서 세계의 생산지와 소비시장을 더욱 가깝게 만든 것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협도 세계 물류의 거대한 지름길 역할을 한다.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연결해 동아시아와 유럽·중동을 오가는 선박들이 인도네시아 군도를 크게 우회하지 않도록 하고, 호르무즈 해협은 걸프 지역의 원유가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핵심 통로가 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고,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홍해와 인도양 사이를 이어 수에즈 운하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
세계 여러 대륙 가운데 이 같은 연결의 철학을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실천한 곳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대륙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유럽은 크고 작은 반도와 섬, 만과 해협이 이어지고 북해와 발트해, 지중해와 흑해, 대서양이 하나의 생활권처럼 연결돼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바다와 가까워 천연항을 만들기 쉽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해상교역이 발달할 수 있었다. 자연이 이미 물류 경쟁력을 선물한 셈이다.
물론 큰 대륙에도 중요한 내륙 물류통로 역할을 하는 강이 있다. 넓은 유역과 충분한 강수량을 갖춘 대륙에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강이 형성된다. 북아메리카에는 미시시피강이 있고 중국에는 장강이 있으며 유럽에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이 있다.
미국은 미시시피강을 통해 내륙까지 대량 화물을 저렴하게 운송했고, 중국 역시 장강과 대운하를 연결해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강의 크기가 아니라 그 강을 얼마나 효율적인 물류망으로 발전시키느냐다.
유럽은 자연이 준 조건에 만족하지 않았다. 부족한 곳은 직접 연결해 운하를 만들었다. 라인-마인-도나우 운하는 북해와 흑해를 하나의 내륙수로로 연결했고, 킬 운하는 북해와 발트해를 이어 선박들이 덴마크를 크게 우회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 코린트 운하는 그리스 반도를 돌아가던 항로를 단축했고, 네덜란드는 전국을 운하망으로 연결해 물류와 치수, 도시발전을 동시에 이뤄냈다.
즉 유럽은 강과 바다를 하나의 거대한 물류망으로 연결한 대륙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이명박(MB)정부가 추진했던 한반도 대운하 구상과 4대강 사업을 떠올린다. 당시 환경성과 경제성을 둘러싼 논란은 컸지만, 우리나라의 강을 국가 인프라와 연결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제의식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한강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내륙 수운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발상은 국가의 새로운 길을 고민한 시도였으며, 당시 필자 역시 그 큰 방향에는 찬성했다. 정책의 성과와 부작용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길을 상상했던 도전정신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유럽은 육로에서도 연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알프스산맥을 돌아가는 대신 몽블랑 터널을 뚫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연결했고, 세계 최장의 철도 터널인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은 알프스를 관통하며 유럽 남북 물류를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한 채널 터널은 바다마저 육지처럼 만들었다.
지금 건설 중인 페마른벨트 해저터널도 같은 철학에서 출발했다. 산은 터널로, 바다는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것이 유럽의 경쟁력이다.
유럽의 강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늘길 역시 국가 간 협력을 통해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러 나라의 영공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항공 네트워크는 항공 물류와 여객 운송의 경쟁력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육로와 해로, 항로가 하나의 시스템처럼 움직이면서 유럽은 세계 최고의 물류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결국 유럽은 운하와 터널, 자유로운 하늘길을 통해 ‘연결의 문명’을 완성한 대륙이다.
대한민국도 결코 불리한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이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점은 수출 중심 국가인 대한민국의 가장 큰 경쟁력 가운데 하나다. 부산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환적항이고, 광양항과 인천항, 평택·당진항은 동북아 물류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 주요 시장으로 비교적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은 우리에게 큰 자산이다. 바다를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만큼은 유럽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연결의 가치를 실천해 왔다. 백두대간을 넘기 위해 수많은 고속도로와 철도 터널을 뚫었고, 서해대교와 인천대교, 거가대교 같은 대형 교량을 건설해 바다를 육지처럼 연결했다. 최근에는 가덕도신공항과 철도망 확충, 해저터널 구상 등 국가 물류 인프라도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하차도를 포함한 도로 터널이 약 4000개, 철도 터널까지 합하면 약 5000개의 터널이 전국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이제 연결의 발상을 더욱 확장해야 할 때다. 대한민국의 다음 물류전략은 단순한 도로 확장이 아니라 국토와 바다, 대륙을 새롭게 연결하는 장기 프로젝트여야 한다.
첫째, 부산·울산·포항·동해·속초를 하나의 산업축으로 연결하는 동해안 종단 물류벨트를 구축해야 한다. 북극항로 시대가 본격화되면 동해안은 유라시아와 가장 가까운 대한민국의 새로운 관문이 될 수 있다.
둘째, 평택항에서 충북을 거쳐 강릉과 동해를 잇는 서해~동해 횡단 화물철도(물류축)를 구축해야 한다. 수도권을 우회하는 새로운 동서 물류축이 만들어지면 국가 물류망은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셋째, 미래세대를 위한 초장기 국가 프로젝트로 제주 해저터널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관광은 물론 물류와 에너지, 국가기간망을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국토 전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장기적으로는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 맞춰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제 공동운하로 개발하는 구상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한과 중국이 공동 개발하고 장차 대한민국까지 연결된다면 동북아 경제협력의 새로운 상징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오랫동안 논의돼 온 한일 해저터널도 장기적인 국가 비전 속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부산과 대마도를 거쳐 후쿠오카를 연결하는 이 구상은 정치적·경제적 과제가 적지 않지만, 언젠가 동북아 경제협력이 본격화된다면 대한민국을 일본과 유라시아를 잇는 동북아 물류 허브로 도약시키는 역사적인 연결축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물류정책을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조정할 컨트롤타워를 구축하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도로와 철도, 항만과 공항, 해운과 항공물류가 부처별로 나뉘어 추진되면서 국가 전체의 연결 전략을 종합적으로 설계하는 체계가 부족하다.
이제 국내 육로와 해로, 항로를 하나의 유기적인 국가 물류망으로 통합 관리하고, 미래 물류 인프라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설계하는 대통령 직속 ‘국가물류전략위원회(가칭)’ 설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재명정부 출범 당시 이현우 전 CJ대한통운 사장이 제안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물류는 더 이상 개별 교통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인 만큼, 이를 총괄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기구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유럽은 바다와 강을 연결했고 산은 터널로 뚫었으며, 하늘까지 하나의 길로 만들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물류 경쟁력을 갖췄다. 그 결과 산업이 성장했고 무역이 확대됐으며 세계 경제를 이끄는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역시 반도라는 축복받은 지리적 조건을 가진 나라인 만큼 바다와 철도, 도로와 항공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대한민국 물류지도’를 새롭게 그려야 한다.
MB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구상과 4대강 사업을 통해 국토와 강을 새로운 국가 인프라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다. 지금 정부도 공항과 철도, 항만망을 확충하고 있다. 정책의 이름과 방식은 정권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길을 만드는 국가 전략만큼은 정권을 넘어 이어져야 한다. 운하든 터널이든 철도든 항만이든, 대한민국의 미래는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며 효율적으로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영토를 넓힌 것은 전쟁이었지만, 문명을 번영시킨 것은 결국 길이었다. 다음 세기의 패권은 가장 넓은 영토가 아니라 가장 촘촘한 연결망과 가장 효율적인 길을 가진 나라가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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