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됐다. 그래서 제헌절은 헌법이 태어난 날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올해 제78주년 제헌절은 18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 뒤 처음 맞는 기념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국회 경축식에 참석해 헌법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 개헌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선택은 달랐다. 대통령은 국회의 제78주년 제헌절 경축식 대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빛의 위원회’ 출범 기념 시민 초청 행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12·3 비상계엄에 맞섰던 시민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고 “매년 12월3일을 국민주권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제헌절의 가장 큰 정치적 메시지는 헌법이 아니라 국민주권이었다.
국회와 청와대는 같은 날, 같은 제헌절을 기념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국회 경축식의 슬로건은 ‘국민주권, 헌법으로 열다’였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모든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모두의 헌법’을 강조하며 시대 변화에 맞는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 기본권 확대와 사회 변화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반면 청와대는 헌법보다 국민을 앞세웠다. 이 대통령은 “빛의 혁명을 통해 국민이 헌법 정신을 증명했다”고 평가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헌신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빛의 위원회도 단순한 기념위원회가 아니라 당시의 기록을 보존하고 기념일 지정과 상징사업을 추진하는 국가 차원의 기구로 출범했다. 제헌절에 열린 행사였지만 중심에는 헌법 조문이 아니라 국민의 실천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올해 제헌절은 두 개의 메시지가 공존한 날이었다. 국회는 헌법을 통해 국민주권을 이야기했고, 청와대는 국민주권을 통해 헌법을 이야기했다. 표현은 달랐지만 두 곳 모두 국민주권을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다만 국회는 헌법을 먼저 세웠고, 대통령은 국민을 먼저 세웠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차이를 보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개헌의 위치였다. 이날 정대철 헌정회장은 시대 변화에 맞는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헌법도 시대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실제 정치권에서도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권력구조 개편, 지방분권, 기본권 확대 등을 둘러싼 개헌 논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러나 조정식 국회의장의 경축사를 보면 개헌보다 국민주권에 더 큰 무게가 실렸다. 헌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현재의 헌법이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국민의 기본권까지 품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 개헌은 목적이 아니라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읽혔다.
이 대통령의 메시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아예 12월3일을 ‘국민주권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헌법을 만든 날보다 헌법을 지켜낸 날을 국가기념일로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헌법의 역사보다 민주주의를 실천한 국민의 역사를 더 크게 기념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한쪽에서는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의 희생과 용기를 국가가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국민이 있었기에 헌법도 살아남았다는 주장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제헌절은 어디까지나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날인 만큼 대통령이 국회 경축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헌법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헌법은 국민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은 국민이 만든 약속이며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그래서 국민주권은 헌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동시에 국민주권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헌법이라는 제도적 울타리도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주권과 헌법은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가치다.
물론 야당은 이 대통령이 제헌절 경축식에 참석하지 않고 대통령 직속 ‘빛의 위원회’ 출범 행사에 참석한 것을 두고 대통령이 헌법의 상징성을 외면했다고 비판할 가능성이 크다.
제헌절은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을 기념하는 국가적 행사인 만큼 대통령이 국회에서 국민과 함께 그 의미를 되새겼어야 했다는 주장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대통령의 선택은 정치적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상징적인 결정이었으며, 앞으로도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제헌절 경축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례는 있었지만, 제헌절 당일 국회 경축식 대신 별도의 국가적 상징 행사를 선택해 국민주권을 전면에 내세운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래서 이번 선택은 단순한 일정 변경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 대한민국은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39년 동안 아홉 차례나 개헌을 했지만, 상당수는 국민을 위한 개헌이라기보다 권력구조를 바꾸기 위한 정치권 중심의 개헌이었다.
반대로 그 이후 39년 동안은 개헌의 필요성만 반복했을 뿐 국민이 공감하는 개헌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헌법은 여러 번 고쳤지만 국민은 늘 개헌의 주인이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이 대통령이 제헌절 경축식 대신 ‘빛의 위원회’ 행사에 참석해 국민주권을 먼저 이야기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헌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이 헌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주권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그 위에서 국민을 위한 개헌을 시작하자는 문제의식을 담은 선택이었다면 이번 결정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개헌의 주인은 권력도 정치인도 아니다. 개헌의 주인은 국민이다. 제헌절에 대통령이 쏘아올린 ‘빛의 혁명’이 앞으로의 개헌 논의를 권력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민의 뜻에서 출발하게 하는 새로운 불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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