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문득 산새 소리에 정신을 차린 청운은 머리를 흔들곤 하얀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사무실(office)’이란 팻말이 붙은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황달에 걸린 듯한 중년 남자가 힐끗 쳐다보았다.
대단한 빽
“저 잡역부로 오게 된….”
청운이 말을 꺼내자 중년 사내는 코를 킁킁거리며 쏘아보더니 불만스레 뇌까렸다.
“지금 여기 놀러 온 거야? 호송차 도착한 지가 언젠데 왜 지금 슬슬 나타나냐구?”
“갑자기 바쁜 상황일 것 같아서 좀 천천히 왔습니다만….”
“뭐? 설령 그렇더래두 일단 낯짝이나 보이고 나서 한쪽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아냐!”
“죄송합니다.”
“흠, 그래 추천인인 클리프 중위와는 잘 아는 사인가?”
“아, 예 그저 좀.”
“그래, 요즘 세상에 미군 장교를 알고 있다는 건 하느님이나 신을 믿는 것보다 더 대단한 빽이라구. 잘 사귀어 두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야. 하핫, 그땐 내 부탁도 좀 들어 줘.”
“아니, 전 다른 누군가를 통해 한 다리 건너서.”
“한 다리든 두 다리든 무슨 상관이야. 건너간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그런 관계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모조리 그런 인맥을 통해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야.”
“예.”
“여기도 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너무 쫄 건 없어. 규정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냥 평상시대로 하면 돼. 혹시 맘에 드는 년이 있으면 슬쩍 찝어 요령껏 먹기도 하고 말야. 대신 양치질은 제대로 해야 돼.”
“예? 뭐라구요?”
“하핫, 고지식하긴. 농담이니 이제 그만 가봐.”
“예.”
“영선과로 가면 실무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가능하면 빨리 일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지.”
“예.”
청운은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부터 또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다! 헛된 몽상이나 욕망 따위는 접고 우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자! 그닥 힘든 일은 없다지만 처음부터 마음이 풀어지면 좋을 게 없어. 오히려 나중에 힘들어지지. 이런 곳에서는 슬슬 농땡이를 피우며 대충대충 하고 넘어가도 큰 표가 나진 않겠지만 그러다간 식충이에 사기꾼밖에 되지 못한단 말야. 일단 충실히 하다 보면 차츰 요령이 생겨 좀 여유로워지겠지. 그러면 그동안 미뤄뒀던 검정고시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자구.’
밖으로 나온 청운은 차가운 산바람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쭉 폈다. 눈이 시릴 만큼 파아란 하늘, 해맑은 새소리…그래도 뭔가 계속 머릿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호기심이 들긴 했어. 여자…수용소…성병…강제…깊은 산속…몽키하우스…억울하게 죽은 귀신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곳…나도 모르게 끌려온 것만 같아. 왠지 이곳 여자들과 북파공작원들은 후훗, 어딘지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아.’
억울하게 죽은 귀신 울음소리
한국 최대 기지촌 동네의 이면
청운은 눈길을 돌려 하얀 건물의 쇠창살을 바라보다가 씁쓸히 미소지었다. 다음날부터 청운은 잡부로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그곳에서 최하급이었다. 변소 청소, 복도에 내놓은 쓰레기통을 비워 한데 모아 불태우는 것 따위였다.
청운은 언젠가 작은 암자의 불목하니로 일할 때 주지승의 책장에서 우연히 화엄경을 대충 훑어본 적이 있었다.
고아인 선재 동자가 구도 행각을 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큰 곤란을 스스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을 느꼈었다. 어려움을 하나씩 이겨내고 차츰차츰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썩은 시체를 치우고 제 눈을 찔러 애꾸로 만든 자를 과연 선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청운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열심히 일을 했다. 몽키하우스 내의 일이 다 끝나면 슬슬 산 뒤로 올라가 겨울새들과 내심 대화를 나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소리는 사람이 제 좋을 대로 갖다 붙인 망언인 것 같다. 내 생각엔 오히려 너희들이 참다운 영혼을 지닌 듯싶은데 말야. 너희들의 고향이자 천국인 산속까지 밀고 올라와 겉만 하얀 시멘트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속엔 같은 인간을 가둔 채 원숭이라 부르며 괴롭히고 있는 존재가 과연 만물의 영장일까? 흐흐, 하느님이 웃겠다. 신께서도 웃겠다. 인간 족속은 자기들을 닮은 모습으로 신을 만들어 놓고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면서 왜 자기에게 이런 억울한 환란을 주느냐고 울부짖지. 그리고 진리와 정의의 심판자이신 신께서 왜 악과 불의를 그냥 놔두느냐고 생떼를 쓰는데 정말 너희들이 봤을 땐 웃음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 미안해.’
그러고는 고목 가지나 가리비 따위를 주워 모아 지게에 얹어서는 땅거미를 밟으며 터덜터덜 몽키하우스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검정고시 책을 보며 내려오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다.
동두천은 한국 최대의 기지촌 중 하나였기에 낙검자 강제수용수도 가장 크고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전국 각지에 120여 곳 암세포처럼 분포돼 있는 성병 치료감호소 가운데 몽키하우스라고 하면 곧 동두천 수용소를 의미할 정도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국내적으로 미흡한 군사정부의 정통성을 미국의 인정을 통해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점점 더 친미적으로 되어 갔다.
일본군이 물러가자마자 성조기를 중앙청에 펄럭이며 들어선 미국군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똘만이와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리틀 아메리카. 원조를 해주는 척하던 미국은 1970년대 들어 한국 경제가 좀 성장하자 기다렸다는 듯 마치 키운 약병아리를 잡아먹듯 악독한 일본과는 달리 꽤나 신사적으로 우려먹기 시작했다.
군사적 거점
한국 땅을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특히 중국 견제)하고 나아가 미국 무기와 상품을 팔아먹는 현재와 미래의 영구적인 시장으로 마스터플랜을 짜게 된 것이었다.(헤리티지 재단은 ‘2017년 미국 군사력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상당한 자원을 제공하고 있다. 직접적인 자금 제공과 인건비 분담, 병참 지원, 시설개선비 등의 현물 지원을 통해 연간 약 9억 달러(약 1조566억원)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