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은 제78주년 제헌절이다. 많은 국민은 제헌절을 대한민국이 탄생한 날 정도로 기억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헌절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공포된 날을 기념하는 국가기념일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생일이라기보다 헌법의 생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가치와 원칙 위에서 운영돼야 하는지를 선언한 출발점이 바로 이날이다. 그런데 정작 오늘의 제헌절에는 헌법이 보이지 않고, 헌법 정신을 되새기는 사회적 논의도 찾아보기 어렵다.
1948년 7월17일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그 헌법은 국민주권,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권력분립, 기본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기본 질서를 담아냈다. 헌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운영 원리이자 국가의 최고 규범이다.
모든 법률과 제도는 헌법에 근거해야 하며, 국가 권력 역시 헌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제헌절은 다른 어떤 국가기념일보다도 헌법의 의미를 국민과 함께 되새겨야 하는 날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제헌절이 다가오면 언론은 공휴일 여부를 먼저 이야기하고, 정치권은 의례적인 축하 메시지를 내놓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정부 기념식도 형식적인 행사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작 헌법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을 시대 변화에 맞게 보완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헌법을 기념하는 날인데도 헌법은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으로 밀려나 있는 셈이다.
더 아쉬운 것은 대통령의 제헌절 기념사가 대한민국 헌정 질서의 미래를 제시하는 국가적 메시지로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헌절 기념사는 단순한 축사가 아니라 헌법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국가 비전 연설이 돼야 한다.
특히 개헌 논의가 이어지는 지금이라면 대통령은 왜 개헌이 필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제헌절은 헌법을 기념하는 날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미래 헌법을 이야기하는 날이어야 한다.
올해 제헌절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치권에서는 권력구조 개편과 지방분권, 기본권 확대 등을 둘러싼 개헌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헌법 질서의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또한 헌법적 해법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제헌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하루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다음 100년을 설계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기념식의 모습도 달라져야 한다. 정부와 국회의 주요 인사 중심의 행사에서 벗어나 헌법학자, 헌법재판관 출신, 법조계 원로, 지방분권 전문가, 청년 대표, 시민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해 활동하는 각계 인사들이 함께하는 국민적 헌법 축제로 발전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특정 권력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헌법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모일 때 제헌절의 의미도 더욱 살아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제정 이후 지금까지 아홉 차례 개정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헌은 국민의 삶보다 권력구조 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제는 대통령 권한이나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넘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 국가의 미래를 중심에 둔 개헌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제78주년 제헌절은 이 같은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앞으로의 개헌은 권력 배분만 논의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돼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헌법을 설계해야 한다. 권력을 위한 개헌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헌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향후 50년, 100년을 준비하려면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국가 운영 원칙을 헌법 속에 담아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는 기존 헌법이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개인정보와 디지털 주권, 인공지능의 책임, 알고리즘의 공정성, 데이터 활용과 인간의 존엄성은 앞으로 반드시 다뤄야 할 헌법적 가치다. 기후위기와 저출산·고령화, 지방소멸 같은 국가적 과제 역시 헌법적 가치와 국가의 책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헌법은 시대를 따라가는 문서가 아니라 시대를 이끄는 국가의 나침반이어야 한다.
필자는 이번 제헌절부터 새로운 전통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제헌절 하루만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 ‘대한민국 헌법주간’을 운영하는 것이다.
실제 미국은 매년 9월17일 헌법 제정일을 기념하고, 이날부터 23일까지를 공식적인 헌법주간(Constitution Week)으로 운영한다. 이 기간에는 학교와 대학,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헌법의 가치와 역사, 헌정 질서를 되새기고, 시대 변화에 맞는 헌법의 미래를 함께 논의하는 다양한 교육과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헌법을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 기간 동안 국회와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대학,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전국적인 헌법 토론회를 열고, 청소년 헌법 골든벨과 대학생 헌법 토론대회, 국민 공청회와 개헌 포럼 등을 개최한다면 제헌절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 축제가 될 것이다.
아울러 대통령은 올해 제헌절 기념사에서 ‘국민 통합 개헌’을 국가적 과제로 공식 제안하기를 기대한다. 대통령 혼자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국회와 정당, 헌법학계, 법조계, 지방정부, 시민사회와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대타협의 출발을 선언하는 것이다.
개헌은 어느 한 정권의 정치적 성과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국민적 합의가 돼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국가 운영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헌법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제헌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날이어야 한다. 헌법은 박물관에 보관된 역사책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내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국가의 약속이다. 시대가 변하면 제도도 변해야 하고, 제도가 변하려면 헌법도 시대의 요구를 담아야 한다. 개헌은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 정신을 더욱 충실하게 이어 가기 위한 시대적 실천이다. 그래서 제헌절은 가장 먼저 개헌을 이야기해야 하는 날이다.
제헌절은 헌법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헌법을 시작하는 날이다. 제78주년 제헌절이 그 역사적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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