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들릴락말락 짧게 대꾸하곤 그림자처럼 문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긁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겨울 벌판 저 멀리 강둑길 위로 달려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계속 걸었다. 하지만 환상 속의 풍경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평범한 현실로 바뀌었다.
일탈적 희롱
청운은 홀 입구에 앉아 있는 기도 녀석을 슬쩍 쏘아보곤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지배인이 불렀다.
“이 새끼, 여기가 너 따위 송사리 놈이 장난치는 어항인 줄 아나, 응? 여긴 엄연한 군부대의 일부라는 사실을 내가 늘 강조했잖아! 내가 야전사령관이라면 넌 이제 겨우 훈련병 딱지를 뗀 쫄병이란 말야! 이곳에선 상명하복의 엄정한 군율이 항시 지켜져야 하며 직속상관에 대한 항명은 총살, 즉 퇴출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넌 무단히 탈영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풍기문란죄를 저질렀다. 그래도 내가 정상참작이나마 하려고 부관을 보내 즉시 귀대 명령을 내렸건만, 일개 양공주의 거처에서 일탈적인 희롱에 빠져 군령을 무시했어. 귀관의 죄악상을 인정하는가?”
“제가 그곳에 간 원인은….”
“닥쳐! 현대전술에서는 원인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 우리와 같은 특수 지역 부대에선 그건 지상명령이야!”
“그래도 그 과정엔….”
“그 따위 개소리 같은 변명은 집어쳐! 만약 개과천선하고 싶다면 당장 꿇어앉아 석고대죄 해. 그리고 앞으론 묘령의 여인을 개가 닭 보듯 할 것이며, 무슨 일이 있든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해. 그럼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마.”
지배인은 검고 두꺼운 낯가죽을 씰룩거리며 잇새로 음흉스런 미소를 흘렸다. 청운은 선택의 기로에 선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개소린 집어치라니까! 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겠단 수작이로군. 참고로 한 가지 알아둬. 근래에 우리 권역에 마타하리 같은 미모의 스파이가 숨어들어 암약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특정인을 스파이라고 지목하고 싶진 않지만 조심해야 된다는 얘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흠, 그럼 꿇어앉아. 그리고 ‘김일성 개새끼!’라고 세 번 복창하곤 침을 한번 퉷하고 뱉어.”
“그건 싫습니다.”
“왜?”
“그런 인간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침을 뱉으면 그에게 가나요?”
“이 새끼가 감히 뉘 앞에서 개소릴 쫑알거려, 앙!”
호통과 동시에 구둣발이 날아와 조인트를 깠다.
“너 이 자식 북괴에서 내려보낸 간첩이지?”
그 순간 갑자기 청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더니 두 눈에 불길이 있었다. 당황한 지배인을 노려보던 청운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곤 곧 발길을 돌렸다.
그 후 며칠 동안 동두천 바닥을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떠돌던 청운은 피에로 형의 소개로 갑자기 몽키하우스로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승합차는 호랑이 목청 같은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산길로 접어들어 한동안 가자 저 멀리 숲속에 문득 하얀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소요산 기슭을 황토가 드러나도록 깎아서 지어 놓은 저 건물은 대체 뭘까? 혹시 귀신이 사는 신전이 아닐까?
그건 클럽 여성들의 성병 치료와 교화를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강제수용소였다. 여자들은 그 건물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혹시 마음속의 공포감을 중화시키거나, 미군에 예속된 폭압적인 국가 공권력을 조롱키 위한 의도로 그러진 않았을까.
또는 현실의 지옥 같은 구렁창을 넘어 꿈의 나라인 미국으로 날아가고픈 소망이 그런 소녀 취향의 이름을 붙였을까.
숲속 자리 잡은 하얀 2층 건물
클럽 여성들 성병 치료와 교화
보건소의 성병 검사에 떨어진 양공주들을 관리하는 이른바 낙검자 수용소는 동두천뿐만 아니라 미군 기지촌이 자리잡은 곳엔 전국 어디에나 다 있었다.
미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가 주둔군 위안부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공문서 상으로 위안부 관리에 관한 합의에 서명한 1970년대 초부터 단속과 관리는 한층 더 삼엄해졌다.
동두천 수용소인 몽키하우스는 그 중 규모가 크고 악명이 높았다.*(*기지촌이 밀집한 경기도 지역과 부산·대구 등지에서는 2000년대 초까지도 강제수용소가 존재했다고 한다-지은이 주)
승합차가 건물 입구로 다가가자 검문소 보초가 운전수를 알아보곤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차는 부르릉거리며 수용소 앞마당으로 진입하더니 숨을 헐떡이다가 멈췄다.
새소리마저 사라지자 산속엔 일순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성병 보균자로 낙인찍힌 여자들이 밖으로 나서자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두툼한 군용 외투를 걸쳤지만 어딘지 퇴역한 하급 관리 티가 나는 중늙은이가 나타나 여자들을 넘겨받곤 짐짓 엄격히 인솔해 건물 안으로 갔다.
갑자기 하얀 건물의 작은 창문들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백한 여자들의 얼굴이 여기저기 유리창에 나타나 빠짝 달라붙었다.
하지만 창엔 굵고 검은 쇠창살이 박혀 있어 그녀들의 모습은 갇힌 모종의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몽키하우스란 별칭이 왜 붙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쇠창살을 붙잡은 채 바깥을 향해 울부짖는 그녀들의 모습이 일견 원숭이 같다고 어느 미군 헌병이 비아냥거린 말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었다.
녹슨 쇠창살이 여자들의 얼굴을 재단하고 있다. 창살은 모두가 ×자였다. 작은 부분들의 ×자가 모여 큰 전체의 ×자형 창틀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왕이면 원형으로 디자인할걸. 그걸 통해 세상을 내다보며 작은 희망이나마 갖게끔 말야. 수많은 ×자보다 보름달 닮은 동심원의 ○형을 본다면 조금쯤은 갇힌 공포심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당시는 장미꽃을 폭행하던 총칼 독재의 시대 바깥에서 안쪽의 여자들을 부정하기 위해, 양갈보 양공주라고 지탄하기 위해, 너희들은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인식시키기 위해, 수용소 전체의 창문을 ×자형으로 디자인해 놓았는지 몰라. 갇힌 양공주 여자들은 하늘마저 갈가리 찢어 놓는 창살 안에서 자살과 같은 자기 부정을 하지 않을까?’
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몽키하우스는 미군부대가 직접 관할했다. 미국 본토에서 성병 검사 기구와 의약품 등을 들여왔다.
미군 소속 군의관이 진료와 제반 관리를 하고 한국인 의사나 간호원은 보조역을 맡아 일했다.
애초에 미군 당국은 관리만 자기네들이 하고 실무는 한국인에게 맡겼으나, 의료기구나 약제품 따위가 사라지는 일이 잦다 보니 직접적으로 통제 운영하게 된 것이었다.
여자들이 하얀 건물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자 창살에 달라붙어 있던 이른바 ‘몽키’들의 모습도 하나 둘 사라졌다.
녹슨 쇠창살
청운은 마당 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선 채 으스스한 기운을 느꼈다. 외딴 산속에 들어선 하얀 서양식 건물도 기이했지만, 높다란 담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그곳엔 수많은 여자들이 갇혀 인격을 앗긴 짐승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괴기스러웠다.
그의 머릿속엔 불현듯 저 멀리 선감도의 참혹한 수용소가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어린 생명들이 굶주림과 폭력에 의해 죽어갔던가.
그리고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지옥산 벼랑이나 골짜기에서는 또 얼마나 야수만큼 독하지 못한 청소년들의 목숨이 꽃잎인 양 떨어져 내려야 했던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