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400일이 됐다. 출범 초기의 기대와 우려는 이제 어느 정도 현실의 성과와 한계로 평가받는 단계에 들어섰다. 선거 과정에서 제시했던 공약은 얼마나 실현됐는지, 국정 운영은 국민의 삶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시점이다. 400일은 축하보다 평가가 필요한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정치보다 국가 운영의 결과가 더 중요하다.
지난 400일 동안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빠른 결정과 강한 추진력이었다. 중요한 정책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모습은 이전 정부들과 비교해 분명한 차별성을 보였다. 찬반 논란이 있는 정책도 방향을 정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국정 운영을 보며 일각에서는 박정희식 리더십을 떠올린다. 물론 시대도 다르고 정치 환경도 다르지만 추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비교가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 개발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아 강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반면 이재명 대통령은 복지와 성장, 첨단산업과 지역 균형 발전을 함께 추진하는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목표와 시대는 다르지만 국가가 적극적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공통점을 찾는 시각도 존재한다.
지난 4일 하준경 청와대 경제성장수석은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 프로젝트'를 두고 "박정희 시대 산업화가 1차 산업화였다면 지금은 2차 산업화"라고 평가했다. 과거 산업화가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격형이었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화이며, 수도권 중심이 아니라 지역이 함께 성장하는 균형적 산업화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발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현 정부 스스로 국가 주도의 미래산업 육성을 새로운 산업화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와 반도체, 방산, 에너지, 바이오를 국가 성장의 핵심축으로 삼겠다는 구상은 과거 중화학공업 육성과는 분야가 다르지만 국가 전략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점에서는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정책 내용과 시대적 배경은 분명히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
특히 국가 전략산업을 육성하려는 모습은 눈길을 끈다. AI와 반도체, 방산, 바이오 등은 민간의 투자만으로는 세계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운 분야다. 결국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실행하는 국가적 전략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과거와의 비교가 가능해진다.
이 같은 산업 육성 기조는 국내 정책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부 출범 400일을 맞는 8일, 이 대통령은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리는 2026년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주요 방산 수요국 정상들과 연쇄 양자회담을 갖고 K-방산 세일즈 외교에 나선다. 산업과 외교를 연결하고 정상외교를 수출 전략으로 활용하려는 모습 역시 실용주의 국정 운영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지역 균형 발전에 대한 적극성이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만들겠다는 정책은 역대 정부도 추진했지만 실행력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광주·전남 통합특별시와 반도체 프로젝트, 전북 AI 산업 육성 등은 지방을 국가 성장의 거점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선언보다 성과가 중요하며, 지속적인 투자와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경제 정책에서도 실용주의가 드러난다.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분야에는 정부가 적극 개입하고, 민간이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은 기업의 역할을 인정하려는 접근이다. 이념보다 현실을 우선하는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정부 역할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결국 핵심은 균형이다.
그러나 강한 추진력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회적 합의와 이해관계 조정이 부족해질 가능성도 커진다. 민주주의는 효율만이 아니라 절차와 공감, 그리고 국민적 설득을 함께 요구한다. 추진력이 소통을 앞설 때 갈등은 커질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정희 시대와 오늘의 대한민국은 결정적으로 갈린다. 당시에는 정부가 국가 발전을 위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와 사법부, 지방정부, 시민사회, 언론이 함께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 시대다. 같은 추진력이라도 운영 방식이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교 환경 역시 훨씬 복잡하다. 산업화 하나만 성공하면 되던 시대가 아니라 공급망, AI 경쟁, 첨단기술, 기후위기, 에너지 안보가 동시에 얽혀 있다.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관리하고, 글로벌 투자와 기술 협력을 확대해야 하는 고난도의 외교가 요구된다. 지금의 대통령은 산업 정책과 외교를 동시에 성공시켜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강한 지도력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공정과 투명성, 책임성과 소통까지 함께 요구한다. 국민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평가한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정책의 내용만큼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중요한 국가 경쟁력이 된다.
400일은 아직 정부를 최종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정부가 지금 보여주는 국정 운영 방식은 대한민국이 다시 국가 전략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는 국민이 적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정부가 진정으로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닮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산업화의 추진력은 계승하되 민주주의의 가치까지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성과와 절차, 속도와 소통, 성장과 통합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산업화와 오늘의 '제2의 산업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누가 더 강한 리더였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국민이 체감한 변화와 국가가 남긴 성과를 기억한다. 만약 이정부가 새로운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함께 발전시키는 국가 모델을 만들어낸다면 박정희를 닮은 정부가 아니라, 박정희 시대를 넘어선 정부로 평가받을 것이다. 이제 남은 임기 4년은 바로 그 가능성을 증명하는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