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어느새 채워져 있는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흐흥, 난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어릴 때부터 겪었고, 또 댁이 전혀 꿈도 꿀 수가 없는 곳엘 갔다 왔다구.”
“머나먼 아프리카 정글에라도 다녀오셨나요?”
생존 전쟁
말끝에 여자는 해죽해죽 웃었다.
“더 먼 곳…가까우면서도 더 먼 비밀왕국.”
“세계일주?”
“당신 마음속을 여행해 볼까?”
“쳇, 농담도 잘하는군.”
“정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대체 어떤 여인일까 하고 궁금했으니까.”
말한 후 청운은 독한 술을 쭉 들이켰다.
“그래, 어떤 여자인 것 같아?”
여자는 청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앞에 앉은 사내가 과연 어떤 인간 족속인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초리였다.
긴 속눈썹 때문인지 당돌하기보다 문득 그윽한 느낌을 주는 저 검은 눈동자…청운은 저도 모르게 가만히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남녀의 눈은 잠시 시간을 잊은 듯 그렇게 서로 응시하고 있었다.
“대답 안 해줘? 내가 어떤 여자인지.”
그녀는 술병을 들어 두 개의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청운은 고개를 숙여 맑은 황갈색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상상만 하다가 이제 겨우 여행을 시작해 첫 간이역에 내린 듯한 기분인걸.”
“열차 좌석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간이역을 슥 스쳐 지나가는 게 좋을까, 아님 내려서 걸어 들어가 보는 게 나을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음 무슨 목적이 있다면 내려야겠지만….”
청운은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그냥 순수한 여행이야.”
“그래도 만약 기찻길 옆에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피어 하늘거리고 있거나 또는 왠지 모를 직감과 호기심에 끌려 간이역 구내를 나가 미지의 읍내를 보고 싶기도 하겠지.”
“흥, 실망할 거야. 역에 내리지 말고, 그냥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게 오히려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어.”
“그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을까? 내려서 읍내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행은 전혀 손상받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우연히 만난 낯선 고장의 풍물과 사람들로 인해 더욱 풍요로울 수도 있어.”
“쳇, 인생을 여행에다 비유하는 건 호사가들의 유흥일 뿐이야. 인생은 전쟁이야!”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설령 적자생존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좀 재미가 있지 않을까? 살아남든 죽든 흐뭇할 거야. 나야 이런 소리 할 자격도 없는 놈이지만.”
“멍청이 같아. 멍청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을 남한테 떠맡겨 놓곤 히히득거리는 남자의 별명이지.”
“그래? 그렇다면 난 아직 멍청이야. 인정하지. 그런데 내 생각이지만 멍청이는 별로 나쁜 건 아닌 성싶어. 멍청이 상태로 할 수 있는 일도 많거든. 대체 자기가 뭔지, 곤충인지 짐승인지 무지렁이인지 생각해 볼 생각은 가졌으니까. 마치 굼벵이처럼 어느 외진 밭고랑에서 뒹굴며 매미로 우화등선할 날을 기다리며.”
“흥, 매미가 되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갈 순 있겠지만 사람들이 여름의 향연이라 부르는 그 소리도 매미 입장에선 그저 수액을 빨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일이라더군요. 그런데 며칠 동안이나마 편안히 노래를 부르며 살았으면 좋으련만 언제든지 까마귀나 딱따구리 따위의 부리에 쪼여 금세 생명을 잃을 판국이니, 그 찰나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겠어요?”
소녀 같지 않고 노파처럼
외롭고 고독하고 무망하게
“매미라고 아무 생각이 없겠어요? 몇 년 동안 땅속의 어둠에서 살다가 나왔으니 삶과 죽음을 초월해 그런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겠어요?”
“몰라. 난 당신 같은 사람 만나러 여기 온 건 아닌데.”
“그럼 뭣 하러?”
“돈 벌러.”
“그럼 차라리 미8군으로 가지.”
“흥, 그게 아주 쉬운 일인 줄 아나 봐. 이봐요, 아저씨, 거긴 물이 달라요. 원한다고 다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란 말야. 이를테면 연예계의 최상류라고 할 수 있지롱. 꺼벙이 아저씨, 알았어요?”
여자는 좀 맥이 빠진 듯했다. 눈초리가 게슴츠레 풀어진 채 살짝 떼를 쓰는 소녀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해볼 만한데 왜 그럴까.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땡이지 뭘.”
하지만 여자는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소녀 같지 않고 노파처럼 외로워 보였다. 그러다가 낡은 소파 위로 푹 쓰러져 버렸다.
청운도 이제 청년 같지 않고 노인네처럼 고독하고 무망해 보였다. 그는 겨우 여자 쪽으로 기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볼에 입술을 대었다.
그러고는 곧 쓰러져 버렸다. 고요한 방에 타인인 두 남녀가 볼을 맞댄 채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대는 매서운 날씨였다. 그래도 하늘은 푸른 유리처럼 청명했다. 까마귀 몇 마리가 아득한 천공에서 마치 검은 연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까마귀가 그토록 높이 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청운이 탄 승합차는 동두천 시가지를 벗어나 좁은 둑길로 접어들었다. 벼의 그루터기만 남은 회갈색 논바닥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희끄무레했다.
차가 평지를 뒤에 남기곤 울퉁불퉁한 험로로 들어서자 여자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이 씨발, 감씨 공알까지 다 빠지겠네.”
“아, 고향땅의 정다운 오빠를 버리고 삼수갑산으로 가네.”
“참 너무 억울해. 리차드 놈이 앙심을 품고 찍은 것 같아.”
그녀들은 미군의 컨택에 걸려 낙검자 강제수용소인 몽키하우스로 이송되는 중이었다.
미군 사령부 소속의 헌병들은 자국 군인들을 성병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갑작스레 클럽에 들이닥쳐 ‘양색시’들에 대한 불심검문을 실시하곤 했다.
클럽 여자들은 그걸 ‘토벌’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꼭 필요한 건 주민등록증보다는 성병 검진 증이었다.
성병 검진
규정에 의해 클럽 여자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공립 보건소에서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그 결과는 검진증에 기록되고 붉은 도장이 찍혔다.
클럽 기도의 임무는 불량배나 행상인 따위를 막는 것뿐 아니라 검진증을 조사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불합격자나 검진증을 지니지 않은 여자는 클럽 입장이 거부되었다. 물론 돈이나 몸을 기도 놈에게 먹이면 통과될 수도 있었지만….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