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난길 눈보라 속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동이는 거리에 남겨진 고아가 된다. 부모와 집, 이름마저 잃어버린 동이가 떠밀려간 곳은 ‘양 목사’가 거느리는 앵벌이 움막이다. 동이를 포함해 정류장과 지하도, 백화점 앞으로 부려진 아이들은 깡통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로 하루를 견디고, 멀건 죽 한 그릇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양 목사의 거짓된 자비와 감시자 ‘아미’의 무자비한 폭력,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약 ‘구름탄’의 유혹은 아이들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세상은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도시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물어뜯어야 하는 전장이다.
그 속에서 동이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을 버티는 아이들과 만난다. 앞을 못 보지만 맑고 깊은 목소리로 행인의 발길을 붙드는 ‘연이’, 걷지 못하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상황을 읽어내는 ‘거북이’, 한 팔을 잃고도 민첩하게 거리의 흐름을 감지하는 ‘깜상’…
여기에 미군 기지촌을 오가며 영어와 능청스러운 생존술을 익힌 하우스보이 ‘미키’가 등장하면서 동이의 세계는 해방촌 움막을 넘어 낯설고 화려한 공간으로 넓어진다. 이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있지만 결코 그 결핍 안에 갇혀 있지는 않다. 겁에 질려 서로를 의심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굶주림 속에서도 노래하고 도망치고 싸우며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동이의 운명을 흔드는 것은 낡고 붉은 아코디언 한 대다. 오래전 엄마가 치던 풍금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 악기 앞에서, 소년은 단 한 번 들은 노래도 손끝으로 되살려내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던 동이가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우체국 앞에 서고, 그 선율 위에 연이의 노랫가락이 얹히는 순간 구걸은 한순간 거리 공연으로 바뀐다.
적선이 일순간 갈채처럼 들리고, 슬픔과 흥이 함께 끓어오르는 거리 한복판에서 아이들의 하루에는 비로소 다른 리듬이 생겨난다. 음악은 단번에 세상을 바꿔주는 마법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그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을 연주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이야기는 한층 빠르고 거칠게 휘몰아친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연이는 냉혹한 거리에 다시 내몰리고, 시위대의 함성과 구호가 도심을 뒤덮는 동안 아이들의 위태로운 세계 역시 더 큰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칼자국 난 얼굴과 움푹 꺼진 눈, 라이터 불빛 속에 번뜩이는 여섯번째 손가락을 지닌 잔혹한 사냥꾼 ‘육손이’가 등장하며 소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달아오른다. 매질과 굶주림을 견디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붙잡기 위해 뛰는 순간, 소설은 서늘한 쾌감과 함께 묵직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이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동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지키고 건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코디언은 이제 한 소년의 재능을 증명하는 사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악기였던 아코디언은 이제 누군가의 숨을 이어주는 목소리가 된다. 쉽게 기록되지 못한 짓눌린 삶도 끝내 고유한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증거. 이 결정적인 전환에 이르러 소설은 거리의 생존기를 넘어 묵직한 감동의 서사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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