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법’이 소환한 정당방위 한계

강도 때리면 피의자 신세?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강도를 제압했던 피해자가 되려 피의자가 됐다. 강도를 막은 배우 나나 사건이 정당방위를 둘러싼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나나 사건을 계기로 국회는 정당방위 범위를 확대하는 ‘나나법’을 내놨지만, 논란의 본질은 따로 있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순간까지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하는 현실이다.

사건은 지난해 11월15일 새벽 경기 구리시 아천동에 위치한 나나의 자택에서 발생했다. 30대 남성 김모씨는 사다리를 이용해 발코니로 올라간 뒤 잠겨있지 않은 문을 통해 집 안으로 침입했다. 당시 집 안에는 나나와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김씨는 흉기를 소지한 채 나나의 어머니를 위협했고, 목을 조르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금품을 요구했다.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깬 나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갔고, 모녀는 몸싸움 끝에 김씨를 제압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나나 사건
갑론을박

이 과정에서 나나와 어머니 모두 부상을 입었다. 특히 어머니는 의식을 잃을 정도의 상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역시 제압 과정에서 턱 부위 등에 상처를 입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나나 모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판단했다.

흉기를 소지한 침입자가 실제 위해를 가하는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어 행위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구속된 김씨는 돌연 기존 진술을 번복했다. 자신은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단순 절도 목적이었을 뿐이라며 강도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자신이 오히려 나나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면서 살인미수 및 특수상해 혐의로 나나를 고소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나나가 흉기를 들고 자신을 공격했으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취지였다. 결국 경찰은 별도 수사를 진행했고, 나나는 참고인 신분을 넘어 피고소인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경찰은 올해 1월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며 나나 사건을 불송치 결정했다. 수사 결과 침입자가 흉기를 소지했던 사실이 확인됐고, 나나의 행위 역시 자신과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행위로 판단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강도상해 혐의로 기소된 김씨는 법정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재판부는 사건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나나와 그의 어머니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나나는 피해자임에도 여러 차례 수사와 재판 절차에 참여해야 했다. 지난 4월 열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나나는 법정에서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피고인이 들고 있던 흉기를 빼앗으려고 몸싸움을 벌였다”며 “왜 이렇게까지 어머니와 제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어 “(피고인이) 여기서 그만하고 반성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 6월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은 김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흉기를 소지한 채 주거에 침입해 피해자들을 위협한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김씨는 선고 직후 사실오인과 양형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장을 제출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온라인상에서는 “강도를 막은 피해자가 왜 경찰 조사를 받고 법정까지 서야 하느냐”는 반응이 이어졌다. 특히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이뤄진 방어행위조차 사후적으로 법적 판단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졌다.

“왜 우리가 수모를 당해야 하나”
역고소에 법정에까지 선 피해자

나나 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번지면서 정치권도 움직였다. 피해자가 범죄자를 제압한 뒤 되려 수사 대상이 되고, 역고소에 시달리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회에서는 이른바 ‘나나법’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은 지난 12일 형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정당방위 성립 요건인 ‘상당한 이유’의 판단 기준을 보다 구체적으로 법에 명시하는 것이다.

현행 형법 제21조는 정당방위를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그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처벌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상당한 이유’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법률에는 어떤 상황이 정당방위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이 적혀 있지 않다. 결국 수사기관과 법원이 사건 발생 이후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며 정당방위인지 판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느꼈던 공포와 긴박함보다 방어 행위의 결과가 지나치게 강조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 정당방위 사건을 둘러싼 논란 대부분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범죄 피해자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사후적으로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행위가 과도하지 않았는지” “공격이 이미 끝난 것은 아닌지” 등을 따진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한 행동으로 수개월 또는 수년 뒤 법정에서 다시 평가받는 셈이다. 전 의원은 이를 두고 “사후적 잣대로 현장의 공포와 급박함을 재단하는 기계적 판단은 선량한 시민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정안은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정당방위가 인정될 수 있는 대표적 상황을 법률에 명문화했다.

우선 주거에 침입한 사람이 자신 또는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경우, 이를 저지하기 위한 행위를 원칙적으로 정당방위로 인정하도록 했다.

또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소지한 사람의 공격에 대응하는 경우 ▲다수의 위력을 앞세운 공격에 맞서는 경우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해가 예상되는 상황 등 역시 정당방위 인정 대상에 포함했다.

기존 법이 ‘상당한 이유’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했다면, 개정안은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해 수사기관과 법원의 해석 범위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부당한 침해
상당한 이유?

정치권에서는 특히 주거침입 범죄를 중요한 변화로 보고 있다. 현행법상 집 안에서 발생한 범죄라고 해서 자동으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다른 폭행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재성, 상당성, 비례성 등을 따져 판단한다.

반면 개정안은 주거를 생명과 안전이 보호받아야 할 최후의 공간으로 보고, 침입 범죄에 대해서는 보다 넓은 범위의 방어권을 인정하는 방향에 가깝다. 나나 사건 역시 흉기를 든 침입자가 자택에 들어와 가족을 위협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개정안이 상정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다만 법안이 통과된 것은 아니다. 개정안은 앞으로 국회 심의와 법제사법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야 한다. 특히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확대할 경우, 사적 제재나 보복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아 입법 과정에서 상당한 논쟁이 예상된다.

나나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산 이유는 단순히 유명 연예인이 범죄 피해를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시민들이 “저 상황에서도 정당방위를 따져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배경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정당방위 인정 기준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는 얼마나 인정되고 있을까. 실제로 법조계에서는 정당방위를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형법 제21조는 정당방위를 인정하기 위해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존재할 것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일 것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등을 요구한다.

조문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훨씬 복잡한 기준이 적용된다. 법원은 통상 정당방위를 판단할 때 현재성, 상당성, 비례성, 보충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침해가 ‘현재 진행 중’이어야 한다. 이미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 가해자를 폭행하거나 보복하는 경우에는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어렵다.

방어 수단의 정도 역시 중요하다. 가해자의 공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되면 정당방위가 아닌 과잉방위 또는 일반 범죄로 평가될 수 있다. 상대방의 공격을 제지한 뒤에도 계속 폭행을 가하거나, 공격의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수단을 사용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보충성’ 개념도 적용된다. 쉽게 말해 도망가거나 신고하는 등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도 굳이 적극적인 물리력을 행사했다면 정당방위 인정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런 기준들이 실제 범죄 현장의 긴박한 상황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흉기를 든 범죄자와 마주한 피해자가 순간적으로 침착하게 공격의 강도와 대응 수위를 계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법원은 사건 발생 이후 비교적 냉정한 시각에서 당시 행위를 평가한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정당방위가 사실상 “존재는 하지만 실제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려운 권리”라는 말까지 나온다. 통계 역시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인정 범위?
모호한 기준

대검찰청 검찰연감에 따르면 전체 사건 처리 인원 가운데 ‘죄가 안 됨’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된 비율은 2018년 0.17%, 2019년 0.16%, 2020년 0.17%, 2021년 0.09%, 2022년 0.08% 수준에 불과했다. 특히 이 수치는 순수한 정당방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긴급피난, 정당행위 등 형사상 위법성이 조각되는 모든 경우가 포함돼있다. 다시 말해 실제 정당방위로 인정된 비율은 이보다 더 적을 가능성이 높다.

그간 정당방위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범죄 피해자가 자신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저항했다가 오히려 피의자로 입건되거나 처벌 대상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른바 ‘도둑 뇌사 사건’이다. 2014년 한 20대 남성은 심야 시간 자신의 집에 침입한 절도범을 발견했다.

그는 도둑을 붙잡기 위해 주먹과 빨래건조대 등을 이용해 수차례 폭행했다. 결국 절도범은 뇌사 상태에 빠졌고 이후 사망했다. 당시 법원은 집주인의 행위가 정당방위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침입자를 제압하는 수준을 넘어 과도한 물리력이 행사됐다는 이유였다.

결국 집주인에게는 과잉방위 책임이 인정됐다. 당시 판결은 “도둑을 막은 사람이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는 사회적 논쟁을 불러왔다. 반면 법원은 침입자를 제압한 이후에도 폭행이 계속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1964년 발생한 ‘최말자 사건’은 정당방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18세였던 최말자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혀를 깨물어 절단시켰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고 중상해 혐의 유죄를 선고했다. 60여년이 흐른 뒤 법원은 재심을 통해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성폭력 상황에서의 저항권과 당시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한국 형사법에서 정당방위 인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인정률 0.08% 보여준 현실
바늘구멍 같은 인정 범위

정당방위 인정이 어려운 건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불법촬영 범죄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지난 1일 창원지법은 여자 화장실에서 자신을 몰래 촬영한 남성을 붙잡아 얼굴을 여러 차례 때린 40대 여성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피해 여성은 몰카범의 도주를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당시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고 있었고, 피해 여성이 출입구를 막아서는 수준을 넘어 얼굴을 15~17차례 폭행한 것은 방어를 넘어선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판결이 알려지자 온라인에서는 “몰카범을 잡고도 처벌받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법원은 정당방위의 핵심은 범죄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현재의 침해를 막기 위한 방어에 있다고 설명했다.

또 2023년 대전의 한 편의점에서는 술에 취한 남성이 점주를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점주는 이를 막는 과정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경찰은 한때 점주를 상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피해자가 오히려 수사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졌고, 이후 정당방위가 인정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하지만 점주는 수개월 동안 경찰 조사를 받고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다.

교제폭력 사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된다. 장기간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맞서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경우 법원은 대체로 정당방위를 엄격하게 해석해 왔다.

실제로 수년간 교제폭력을 당하다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에서 법원은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정당방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폭행이 진행 중인 ‘현재의 침해’ 상황이 아니었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 측은 지속적인 폭력과 통제 속에서는 위협이 늘 현재형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지만, 현행 법리는 이를 폭넓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정당방위를 둘러싼 사건들은 유형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사기관과 법원은 방어의 필요성뿐 아니라 그 방법과 정도까지 함께 검토한다. 그 결과 어떤 사건에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되고, 어떤 사건에서는 범죄가 성립한다. 문제는 그 경계가 일반 시민의 눈에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누구는 인정
누구는 범죄

전문가들은 법적 모호성 이상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최종적으로 무혐의 또는 정당방위 판단을 받더라도 그 과정에서 상당수 피해자들이 수사와 재판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나나 역시 경찰의 불송치 결정을 받았지만 역고소에 따른 수사를 받아야 했고, 이후 강도 재판에서는 증인으로 출석해 사건 경위를 설명해야 했다. 피해자가 범죄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충격을 회복하기도 전에 다시 수사기관과 법원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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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믿음이죠”라고. 피해자들은 2년여 동안 수십억원을 뜯기면서도 차용증은 물론 사업계획서 같은 문서 한 장 보지 못했다. 그나마 명함에도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서울의 한 보험사 소회의실. 처음에 3명이던 피해자가 2시간 뒤 1명 더해져 총 4명이 됐다. 몇 명은 과거 학습지 회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몇 명은 현재 보험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의 접점은 최모씨라는 한 여자였다. 이들 모두 최씨를 만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뜯겼다. 4명에게서만 20억원 가까운 돈이 흘러나갔다. 클래식한 사기 수법 최씨의 사기 행각은 광범위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헬스케어 제품 판매 직원 등 각각의 피해자 그룹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느낄 때쯤에서야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피해자 수가 70~80명, 피해액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 대략적인 수치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한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씨의 정체는 모호했다. 최씨가 일부 피해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기업/개인 세금 처리 대행’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한 피해자는 “최씨는 기업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세무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계속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을 세무 관련 전문직으로, 배우자는 외교관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명품 옷, 외제 차 등은 최씨를 ‘돈 많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용했다. 실제 최씨를 만났던 몇몇 피해자들은 ‘(집에) 가정부가 있었다’ ‘가정부에게 LA 갈비 세트를 줬다’ ‘(최씨와 그 가족이) 블랙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급 카페에서 비싼 디저트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씨의 배경에 흔들리던 피해자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드는 데는 건 주변 동료, 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한 동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말에 피해자들은 최씨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질릴 정도로 권했다.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피해자가 대부분 ‘여초 직장’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파악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학습지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보험사로 같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몇몇이 최씨와 얽히면서 지인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판이 커졌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불법 다단계’ 방식이다. 한 변호사는 “굉장히 클래식한 방식의 사기”라고 표현했다. 최씨의 배경과 언행, 동료와 지인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그때부터 홀린 듯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간단했다. ‘(돈을) 일주일 쓰는 대신 이자를 1% 주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일주일 동안 빌려주면 이자로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피해자는 일주일 뒤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100만원을 받게 된다. 한 피해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예 선이자를 떼고 빌려 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1억원이면 9900만원만 빌려주는 식으로, 원금을 돌려받으면 100만원을 번 셈이 된다. 한남동 아파트 ‘상류층’ 행세 동료, 지인 부추김에 거액 투자 처음 한두번은 이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금이 들어와야 할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이자까지 끊겼다. 원금과 이자를 달라는 요구에 최씨는 이자 비율을 높이면서 추가로 돈을 넣으라고 권했다. ‘돈을 더 넣으면 이자로 10%를 주겠다’는 식이다. 피해자마다 이자 비율은 달랐지만 대략 5~10%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해 주면 월 수수료로 0.8%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최씨의 말대로라면 카드로 100만원을 긁었을 때 수수료로 8000원이 발생한다. 당연히 카드 결제액이 커질수록 수수료도 많아진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카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몇몇은 카드를 새로 발급까지 받아 최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결말은 같았다. 카드 대금은 쌓여가고 수수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한도 때문에 사용이 막히니까 리볼빙을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루는 서비스다. 당장 변제 부담은 덜하지만 잔액에 연이자가 15~19%가량 붙는다. 눈 깜짝할 새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상품이다. 이자나 수수료는커녕 원금도 못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피해자들은 결국 최씨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보험설계사 등 피해자 7명은 지난해 12월 최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해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 등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7명 외에도 피해자가 3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 5명은 주범 최씨, 모집책 차모씨, 이모씨, 박모씨, 그 외 김모씨 등이다. 피해자 7명과 접점이 가장 적은 김씨를 제외하고 4명의 피고소인만 놓고 보면 역학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차씨와 이씨, 박씨 등이 최씨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7명의 피해액은 26억8700만원에 달한다. 나머지 피해자 3명의 피해액까지 합치면 28억8000만원으로 불어난다. 이들은 계좌이체, 카드 결제 등의 방법으로 최씨 등에게 돈을 보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1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가운데서도 A씨의 피해액은 확인된 것만 약 17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7명의 전체 피해액(27억원) 중에 63%가 A씨의 몫인 셈이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이자 비용은 별도다. 이 돈까지 합치면 A씨의 피해액은 약 23억원까지 늘어난다. A씨는 차씨를 통해 최씨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보험사에서 5년간 동료로 지냈다. 홀린 듯이 돈 보냈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었다. 그는 “죽도록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2024년 초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라’는 차씨의 부름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A씨는 인근의 카페에서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최씨를 만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차씨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A씨는 “처음 만난 최씨는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차씨는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차씨가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원금은 보장된다. 나도 2억을 벌었고 두 달 뒤에 추가로 1억을 번다’고 말하니 솔깃했다. 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차씨가 신나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차씨는 A씨에게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기도 했다. 카드 결제, 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최씨에게 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2024년 4월경부터다. A씨의 카드는 2024년 4월부터 8월, 지난해 2월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래처는 정유사, 명품관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동차 기름값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 주유 대금으로 결제됐다는 점이다. 2024년 4월, A씨의 카드가 처음 사용된 날짜에 ‘○○석유’라는 곳에서 1200만원이 결제됐다. 이후에도 1000만원 단위의 돈이 ‘○○상사’ ‘○○○ 에너지’ 등에서 사용됐다. 카드로 긁어놓고 이후에 현금으로 되돌려받는 ‘카드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최씨는 명품관에서도 총 7700만원을 긁었다. 이렇게 결제된 카드 대금은 3억6000만원에 달한다. 카드 대금과 수수료를 주겠다는 최씨의 말은 ‘공수표’였다. A씨는 “카드를 빌려준 쪽에서 돈을 넣어달라고 오히려 빌어야 했다. 몇 번을 요구해야 한번 돈을 넣어줄까, 말까였다. 한도가 막히면 다른 카드를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쳐 최씨로부터 입금된 돈은 2억원. 원금과 주기로 한 수수료를 계산하면 턱없는 돈이다. 결국 A씨는 카드 대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뜯겼다. ‘짧게 쓰고 줄게’라며 빌려 간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은 최씨가 이자 명목의 돈을 주지 못한 시기를 2024년경으로 기억했다. A씨 역시 2024년 4월에 처음 돈을 넣고 한 달 뒤부터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회사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돈이 묶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도 죽었나 ‘돈만 들어오면 A씨부터 챙겨줄게’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A씨가 매달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돈을 넣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A씨를 지배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번만 빌려주면’ ‘곧 돈이 들어온다’는 최씨의 말에 속아 A씨가 빌려준 돈은 15억5000만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이 전부 A씨 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A씨는 “동생, 부모님, 지인, 심지어 고객에게까지 돈을 빌렸다”고 털어놨다. 이 중 3억원가량은 집을 담보로 제3금융권에서 빌린 돈으로 즉, 사채다. 급하게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제시한 높은 이자율은 A씨의 목을 옥죄고 있다. A씨는 지금도 그 이자를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악랄한 수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최씨는 A씨가 보험설계사인 점을 이용해 그의 고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연결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대납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갚겠다며 A씨를 이용한 것이다. A씨는 해당 고객이 최씨와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 400만원이 넘는 보험을 2개 가입한 고객은 10개월 정도 보험료를 낸 뒤 사라졌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을 유치하면 전체 납입 기간에 대한 선수수료로 익월에 월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월 100만원, 20년 납기 보험을 든다고 하면 총 보험료 2억4000만원에 대한 수수료가 보험설계사의 몫이다. 능력에 따라 보험설계사의 연봉이 천차만별로 차이 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있다. 고객이 최소 25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설계사가 받은 월급은 ‘환수’ 조처된다. 보험설계사의 능력은 신규 고객 유치가 아니라 유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가까이 단 한 건의 환수 조처도 없던 A씨의 경력은 최씨로 인해 무너졌다. A씨의 동료이면서 피해자인 이들 역시 최씨, 차씨 등이 연결해준 고객이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환수 조처로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씨에게 넘어간 1억5000만원은 결정타였다. 그전까지 약 10개월간 돈을 보내지 않고 빚 독촉만 했던 A씨는 최씨에게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A씨에 따르면 최씨는 수표 다발이 찍힌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 1억5000만원의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1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돈 못 빌려주면 카드라도 내놔 주범 최씨 다른 사건으로 재판 5000만원만 마련해 갔던 A씨는 그 자리에서 고객에게 1억원을 빌려 최씨에게 건넸다. A씨는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A씨) 때문에 450억원을 출금 못하게 생겼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윽박질렀다. 최씨도 나서서 ‘빨리 어디에서라도 빌려봐’라고 계속 압박했다. 정말 내 책임이 될 것 같은 마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1억50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뼈까지 발라 먹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A씨는 최씨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A씨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속을 수 있냐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A씨도 피해자들도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피고소인 가운데 1명인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역시 최씨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그걸로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되짚어 보면 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소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돈 욕심에 시작했다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하니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유준 법무법인 LKB평산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웅덩이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웅덩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다시 말해 투자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사업체 같은 실체가 아예 없었다. 즉, 최씨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기망할 의도로 만났고 피해자들을 끌어들인 피고소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A씨 등에게 받은 돈을 투자 목적이 아닌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피고소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몇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통화가 연결된 김씨는 “최씨는 고소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걔도 사업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여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걔도 사기 피해자”라며 “가족하고도 사이가 틀어졌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안다. 나는 (최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씨 사건은 크게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있고 A씨 등의 고소 사건도 비슷한 유형이라 검찰 송치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또 다른 보험사 지점, 헬스케어 제품 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도 피해자가 있다. 이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최씨를 비롯한 중간 모집책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피해 금액이 크기에 이들은 형량이 높은 ‘특경법’에 걸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 사건으로 2명이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상태다. 최씨와 피해자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큰돈을 투자했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피고소인들은 이 여성이 원래 우울증을 앓았고, 남성은 지병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추가 피해자 더 나올 듯 과거 사기 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 사건의 진짜 공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돈을 뜯겼던 피해자가 원금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다. 사기 사건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에 비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영혼이 다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일전에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