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왕열보다 더 나쁜 ‘2조 도박왕’ 추적기

여전히 호의호식…알고도 못 잡는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오혁진 기자 = 거실 한가운데 5만원권 현금다발이 산처럼 쌓여 있다. 수사기관은 현금 규모가 500억원이 넘는다고 판단했다. 압수된 현금 주인은 필리핀 등에서 2조원대 규모의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를 받는 한창훈이다. 수사기관은 필리핀에서 잡힌 한창훈을 송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그는 베네수엘라로 국적을 변경하고 필리핀에 수감됐다.

필리핀 국가수사국(NBI)은 지난해 2월25일 한국 검찰과의 공조를 통해 한창훈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한창훈은 2014년 12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온라인 불법 도박 사이트 23개를 운영하며 약 2조원 규모의 도박 자금을 송금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마린시티
500억 탑

검찰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수익 약 2000억원이 조직적인 자금세탁을 통해 은닉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범죄수익 가운데 상당한 자금이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대부업체 등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부산지방검찰청은 지난 2024년 대규모 자금 세탁 조직을 적발하면서 한창훈 조직의 실체 일부를 밝혔다. 도박 사이트 조직원은 검거됐지만, 정작 총책인 한창훈은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검찰은 5년 넘게 그를 추적해 왔다. 그는 자금 세탁 용도로 타이어 회사를 약 140억원에 인수하는 등 범죄수익 2000억원을 은닉해 국민체육진흥법 및 범죄수익은닉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다.

앞서 부산지검은 같은 해 12월 초 한창훈의 연인으로 알려진 인플루언서인 김모씨의 필리핀 입국 정보를 제공했다. 검찰에서 파견된 수사관이 김씨의 숙소를 파악하고, 세부에서 한창훈을 검거했다. 김씨와 한창훈이 함께 데이트하는 장면 등을 국가정보원이 포착하기도 했다. 5년6개월 간 도피한 끝에 잡힌 것이다.

NBI 등은 한창훈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총격 사건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창훈이 세부 경찰을 매수하면서 NBI와 국정원 등에 실탄을 발사하도록 한 것이다. NBI는 교섭 끝에 가까스로 한창훈을 필리핀 이민국 비쿠탄 구금센터로 이송했다.  

제보에 따르면, BDC에 수감됐던 한창훈은 보석금으로 한화 약 150억원을 내고 풀려났다. 특히 필리핀 정부가 제공한 은신처에 숨어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한창훈은 2019년 5월 필리핀으로 도피한 후 2020년 2월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했다. 내부 조직원의 신고로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해당 조직원은 지난 2021년 인천지방검찰청에 한창훈을 고소했다. 조직원 A씨는 “수사기관에 도박 사이트 이용객 정보를 탈취, 제공하다가 한창훈에게 걸리면서 폭행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A씨는 한창훈을 폭행, 협박, 도박장 개장죄,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를 결심했다고 한다.

국내 최대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검찰 확인 범죄수익만 2000억원

<일요시사>가 확보한 A씨의 진술 조서에는 그가 2021년 2월부터 8월까지 한창훈 조직에 소속돼 다수의 도박 사이트 운영 업무를 수행했다고 적혀 있다.

A씨는 법정에서 “입·출금 내역 자료와 관리자 페이지를 확인하며 회원들의 입금액과 베팅 금액, 수익금 지급 여부 등을 관리했다”며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관리한 사이트 수가 20개가 넘었다고 증언했다. 

A씨는 “한창훈의 조직은 최소 23개의 도박 사이트를 운영했다. 사이트마다 규모 차이는 있었지만 개인 사이트 기준 회원 수는 약 1000명 수준, 일 베팅 금액은 수억원대, 월 수익금은 수십억원 규모였다”며 “일부 사이트는 최소 베팅 금액이 3만원 수준이었고, 최대 베팅 금액은 수백만원에 달했다”고 했다.

A씨는 2021년 2월부터 8월까지 경기도 소재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해당 사무실에는 조직원 수십명이 근무했다. 입금 확인과 충전 업무, 회원 응대, 관리자 페이지 관리 등의 업무가 분담돼있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조직이 사무실을 이전하는 과정도 계획적이다. 그는 “수사기관 단속을 우려해 사무실을 다른 장소로 옮긴 적이 있다”며 “이전 과정에서 기존 자료들이 옮겨졌고, 이후에도 도박 사이트 운영은 계속됐다”고 말했다.

A씨는 법정에서 자신이 운영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검찰이 “당시 운영자가 누구였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관리자 역할을 수행했을 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만 조직 내에는 운영 책임자와 관리자, 충전 및 정산 담당자 등이 별도로 존재했으며, 여러 명이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였다고 반박했다.

한 사장과
부산 식구들

또 검찰이 제시한 증거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서도 한창훈을 비롯해 일부 조직원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함께 근무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창훈이 검거되긴 했으나 국내 송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한 한창훈은 단순한 한국인 도피 사범과 달리 국적 문제가 얽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범죄인 인도는 한국 검찰이 요청한다고 자동으로 이뤄지는 절차가 아니다.

필리핀 법원의 심사를 거치고 한창훈이 각종 이의신청과 법적 대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법조계에서도 한창훈이 베네수엘라 국적을 근거로 송환 반대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일각에서는 과거 필리핀에서 송환된 ‘마약왕’ 박왕열 사례처럼 송환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실제 필리핀은 범죄인 인도 외에도 이민법 위반이나 체류 자격 문제를 근거로 외국인을 강제 추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창훈은 베네수엘라 국적 취득 이력이 있는 만큼 일반적인 한국인 도피 사범보다 송환 절차가 복잡할 수 있다.

법무부 국제형사과에 몸담았던 한 검찰 관계자는 “NBI 체포와 비쿠탄 수감까지 이뤄진 만큼 법조계에서는 송환이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송환되느냐가 핵심”이라고 봤다.

수사 초기 검찰이 확보한 사진에는 5만원권 현금 다발 수십만장이 해운대 마린시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거실에 쌓여 있었다.

동업자
장씨는?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김보성 전 부산지검 강력범죄수사부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현금 다발을 가로·세로·높이로 계산해 봤더니 500억원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였다”고 밝혔다. 사건 주임검사였던 이홍석 검사도 “처음 봤을 때는 조작된 사진인 줄 알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결과 이 돈은 한창훈이 필리핀 서버를 이용한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과정에서 벌어들인 범죄수익 일부였다. 이용자들이 입금한 돈은 수백개 대포통장으로 분산된 뒤 전국 ATM을 돌며 현금을 인출하는 방식으로 세탁됐다. 인출책들은 매일 수억원씩 현금을 뽑아 자금 세탁 조직에 전달했고, 이 돈은 다시 부동산과 슈퍼카, 미술품, 법인 인수 자금 등으로 형태를 바꾸며 세탁됐다.

한창훈 조직은 약 470억원 상당의 고급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가티 시론 1대와 페라리 2대 등 약 50억원 상당의 슈퍼카를 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압수 당시 발견된 부가티 시론은 시가 약 45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수사 과정에서는 범죄에 가족들까지 동원된 정황도 드러났다. 운영 총책 한창훈의 가족과 자금 세탁 조직원들의 배우자, 장모, 부모 등이 범죄수익 은닉 과정에 관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창훈 조직은 수사망을 피하고자 치밀하게 움직였다. 검찰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수십억원대 슈퍼카를 지인 명의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빼돌렸다. 또 핵심 조직원이 소환되자 해외로 도피시키며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사기관 내부 상황까지 파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 검사는 “조직원들에게 검사 인사가 있는 2월까지만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지시한 정황이 있었다”며 “대형 로펌 여러 곳을 선임해 수사기관 내부 사정을 파악하려 했다”고 밝혔다.

내부 폭로자 등장, 겁먹고 국적 변경
베네수엘라 국적 취득…송환 불투명

조직의 계산은 빗나갔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인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수사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핵심 조직원들이 잇따라 검거됐다. 검찰은 1년 동안 450개가 넘는 계좌를 분석하며 범죄수익 흐름을 추적했고 특정된 범죄수익 550억원 가운데 약 97%를 압류·추징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한창훈 사건의 자금 세탁을 도운 동업자 장모씨도 재조명되고 있다. 장씨는 인터넷 방송업계에 거액의 후원금(별풍선)을 지출한 인물로 유명하다. 한창훈의 불법자금이 별풍선으로 BJ에게 입금되고, 이를 다시 장씨가 현금으로 돌려받는 형태다.

제보자에 따르면 과거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예비회장’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장씨가 한창훈의 도박 사이트 지분에 참여하는 등 사업적으로 연관돼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장씨는 온라인 광고를 통해 도박 사이트를 광고하며 이용자를 끌어들인 것으로 파악됐다.

장씨는 2020년 말부터 2021년 초까지 약 17억원 상당의 별풍선을 후원했다. 당시 일부 BJ들은 장씨의 후원에 힘입어 별풍선 순위 상위권을 기록하기도 했다.

제보자들은 장씨의 자금 출처와 관련해 의문을 제기한다. 검찰은 한창훈이 과거 검거됐던 세부 지역에 체류 중이라고 의심 중이다. 한창훈 검거 이후 장씨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장씨는 지난 2021년 아프리카TV 게시판에 “이제는 제가 떠나도 될 듯해 저는 이만 일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라며 자취를 감췄다. 한창훈이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한 지 1년여 만이다. 당시 일부 유명 BJ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연예계
돈세탁?

금융당국은 상품권을 유튜브 후원이나 인터넷 방송 플랫폼의 별풍선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언급하며 대규모 거래 가능성을 의심한다. 이 밖에 한창훈의 범죄수익금이 모 엔터테인먼트 회장 C씨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C 회장의 지인이자, 부산 조직폭력배 관계자인 여모씨가 한창훈의 자금을 1차로 받아 C 회장에게 투자 형태로 흘렀다는 의혹이 골자다.

C 회장이 비서를 통해 여씨 측 자금을 수령했다는 취지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드러났다. 수사기관은  C 회장과 여씨 사이에 있었던 금전거래와 자금 세탁 의혹에 대해 수사할 방침이다. 여씨는 강남에 위치한 B 시계 상점 대표자이자 10여개 이상 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믿음이죠”라고. 피해자들은 2년여 동안 수십억원을 뜯기면서도 차용증은 물론 사업계획서 같은 문서 한 장 보지 못했다. 그나마 명함에도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서울의 한 보험사 소회의실. 처음에 3명이던 피해자가 2시간 뒤 1명 더해져 총 4명이 됐다. 몇 명은 과거 학습지 회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몇 명은 현재 보험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의 접점은 최모씨라는 한 여자였다. 이들 모두 최씨를 만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뜯겼다. 4명에게서만 20억원 가까운 돈이 흘러나갔다. 클래식한 사기 수법 최씨의 사기 행각은 광범위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헬스케어 제품 판매 직원 등 각각의 피해자 그룹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느낄 때쯤에서야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피해자 수가 70~80명, 피해액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 대략적인 수치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한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씨의 정체는 모호했다. 최씨가 일부 피해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기업/개인 세금 처리 대행’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한 피해자는 “최씨는 기업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세무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계속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을 세무 관련 전문직으로, 배우자는 외교관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명품 옷, 외제 차 등은 최씨를 ‘돈 많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용했다. 실제 최씨를 만났던 몇몇 피해자들은 ‘(집에) 가정부가 있었다’ ‘가정부에게 LA 갈비 세트를 줬다’ ‘(최씨와 그 가족이) 블랙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급 카페에서 비싼 디저트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씨의 배경에 흔들리던 피해자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드는 데는 건 주변 동료, 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한 동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말에 피해자들은 최씨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질릴 정도로 권했다.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피해자가 대부분 ‘여초 직장’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파악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학습지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보험사로 같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몇몇이 최씨와 얽히면서 지인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판이 커졌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불법 다단계’ 방식이다. 한 변호사는 “굉장히 클래식한 방식의 사기”라고 표현했다. 최씨의 배경과 언행, 동료와 지인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그때부터 홀린 듯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간단했다. ‘(돈을) 일주일 쓰는 대신 이자를 1% 주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일주일 동안 빌려주면 이자로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피해자는 일주일 뒤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100만원을 받게 된다. 한 피해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예 선이자를 떼고 빌려 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1억원이면 9900만원만 빌려주는 식으로, 원금을 돌려받으면 100만원을 번 셈이 된다. 한남동 아파트 ‘상류층’ 행세 동료, 지인 부추김에 거액 투자 처음 한두번은 이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금이 들어와야 할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이자까지 끊겼다. 원금과 이자를 달라는 요구에 최씨는 이자 비율을 높이면서 추가로 돈을 넣으라고 권했다. ‘돈을 더 넣으면 이자로 10%를 주겠다’는 식이다. 피해자마다 이자 비율은 달랐지만 대략 5~10%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해 주면 월 수수료로 0.8%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최씨의 말대로라면 카드로 100만원을 긁었을 때 수수료로 8000원이 발생한다. 당연히 카드 결제액이 커질수록 수수료도 많아진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카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몇몇은 카드를 새로 발급까지 받아 최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결말은 같았다. 카드 대금은 쌓여가고 수수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한도 때문에 사용이 막히니까 리볼빙을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루는 서비스다. 당장 변제 부담은 덜하지만 잔액에 연이자가 15~19%가량 붙는다. 눈 깜짝할 새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상품이다. 이자나 수수료는커녕 원금도 못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피해자들은 결국 최씨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보험설계사 등 피해자 7명은 지난해 12월 최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해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 등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7명 외에도 피해자가 3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 5명은 주범 최씨, 모집책 차모씨, 이모씨, 박모씨, 그 외 김모씨 등이다. 피해자 7명과 접점이 가장 적은 김씨를 제외하고 4명의 피고소인만 놓고 보면 역학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차씨와 이씨, 박씨 등이 최씨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7명의 피해액은 26억8700만원에 달한다. 나머지 피해자 3명의 피해액까지 합치면 28억8000만원으로 불어난다. 이들은 계좌이체, 카드 결제 등의 방법으로 최씨 등에게 돈을 보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1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가운데서도 A씨의 피해액은 확인된 것만 약 17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7명의 전체 피해액(27억원) 중에 63%가 A씨의 몫인 셈이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이자 비용은 별도다. 이 돈까지 합치면 A씨의 피해액은 약 23억원까지 늘어난다. A씨는 차씨를 통해 최씨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보험사에서 5년간 동료로 지냈다. 홀린 듯이 돈 보냈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었다. 그는 “죽도록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2024년 초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라’는 차씨의 부름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A씨는 인근의 카페에서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최씨를 만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차씨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A씨는 “처음 만난 최씨는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차씨는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차씨가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원금은 보장된다. 나도 2억을 벌었고 두 달 뒤에 추가로 1억을 번다’고 말하니 솔깃했다. 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차씨가 신나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차씨는 A씨에게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기도 했다. 카드 결제, 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최씨에게 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2024년 4월경부터다. A씨의 카드는 2024년 4월부터 8월, 지난해 2월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래처는 정유사, 명품관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동차 기름값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 주유 대금으로 결제됐다는 점이다. 2024년 4월, A씨의 카드가 처음 사용된 날짜에 ‘○○석유’라는 곳에서 1200만원이 결제됐다. 이후에도 1000만원 단위의 돈이 ‘○○상사’ ‘○○○ 에너지’ 등에서 사용됐다. 카드로 긁어놓고 이후에 현금으로 되돌려받는 ‘카드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최씨는 명품관에서도 총 7700만원을 긁었다. 이렇게 결제된 카드 대금은 3억6000만원에 달한다. 카드 대금과 수수료를 주겠다는 최씨의 말은 ‘공수표’였다. A씨는 “카드를 빌려준 쪽에서 돈을 넣어달라고 오히려 빌어야 했다. 몇 번을 요구해야 한번 돈을 넣어줄까, 말까였다. 한도가 막히면 다른 카드를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쳐 최씨로부터 입금된 돈은 2억원. 원금과 주기로 한 수수료를 계산하면 턱없는 돈이다. 결국 A씨는 카드 대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뜯겼다. ‘짧게 쓰고 줄게’라며 빌려 간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은 최씨가 이자 명목의 돈을 주지 못한 시기를 2024년경으로 기억했다. A씨 역시 2024년 4월에 처음 돈을 넣고 한 달 뒤부터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회사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돈이 묶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도 죽었나 ‘돈만 들어오면 A씨부터 챙겨줄게’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A씨가 매달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돈을 넣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A씨를 지배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번만 빌려주면’ ‘곧 돈이 들어온다’는 최씨의 말에 속아 A씨가 빌려준 돈은 15억5000만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이 전부 A씨 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A씨는 “동생, 부모님, 지인, 심지어 고객에게까지 돈을 빌렸다”고 털어놨다. 이 중 3억원가량은 집을 담보로 제3금융권에서 빌린 돈으로 즉, 사채다. 급하게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제시한 높은 이자율은 A씨의 목을 옥죄고 있다. A씨는 지금도 그 이자를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악랄한 수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최씨는 A씨가 보험설계사인 점을 이용해 그의 고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연결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대납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갚겠다며 A씨를 이용한 것이다. A씨는 해당 고객이 최씨와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 400만원이 넘는 보험을 2개 가입한 고객은 10개월 정도 보험료를 낸 뒤 사라졌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을 유치하면 전체 납입 기간에 대한 선수수료로 익월에 월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월 100만원, 20년 납기 보험을 든다고 하면 총 보험료 2억4000만원에 대한 수수료가 보험설계사의 몫이다. 능력에 따라 보험설계사의 연봉이 천차만별로 차이 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있다. 고객이 최소 25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설계사가 받은 월급은 ‘환수’ 조처된다. 보험설계사의 능력은 신규 고객 유치가 아니라 유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가까이 단 한 건의 환수 조처도 없던 A씨의 경력은 최씨로 인해 무너졌다. A씨의 동료이면서 피해자인 이들 역시 최씨, 차씨 등이 연결해준 고객이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환수 조처로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씨에게 넘어간 1억5000만원은 결정타였다. 그전까지 약 10개월간 돈을 보내지 않고 빚 독촉만 했던 A씨는 최씨에게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A씨에 따르면 최씨는 수표 다발이 찍힌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 1억5000만원의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1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돈 못 빌려주면 카드라도 내놔 주범 최씨 다른 사건으로 재판 5000만원만 마련해 갔던 A씨는 그 자리에서 고객에게 1억원을 빌려 최씨에게 건넸다. A씨는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A씨) 때문에 450억원을 출금 못하게 생겼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윽박질렀다. 최씨도 나서서 ‘빨리 어디에서라도 빌려봐’라고 계속 압박했다. 정말 내 책임이 될 것 같은 마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1억50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뼈까지 발라 먹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A씨는 최씨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A씨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속을 수 있냐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A씨도 피해자들도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피고소인 가운데 1명인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역시 최씨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그걸로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되짚어 보면 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소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돈 욕심에 시작했다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하니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유준 법무법인 LKB평산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웅덩이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웅덩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다시 말해 투자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사업체 같은 실체가 아예 없었다. 즉, 최씨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기망할 의도로 만났고 피해자들을 끌어들인 피고소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A씨 등에게 받은 돈을 투자 목적이 아닌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피고소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몇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통화가 연결된 김씨는 “최씨는 고소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걔도 사업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여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걔도 사기 피해자”라며 “가족하고도 사이가 틀어졌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안다. 나는 (최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씨 사건은 크게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있고 A씨 등의 고소 사건도 비슷한 유형이라 검찰 송치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또 다른 보험사 지점, 헬스케어 제품 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도 피해자가 있다. 이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최씨를 비롯한 중간 모집책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피해 금액이 크기에 이들은 형량이 높은 ‘특경법’에 걸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 사건으로 2명이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상태다. 최씨와 피해자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큰돈을 투자했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피고소인들은 이 여성이 원래 우울증을 앓았고, 남성은 지병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추가 피해자 더 나올 듯 과거 사기 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 사건의 진짜 공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돈을 뜯겼던 피해자가 원금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다. 사기 사건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에 비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영혼이 다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일전에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