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즉시 침대 쪽으로 접근해 주방장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방바닥에 검은 뱀 허물처럼 벗어둔 놈의 바지에서 허리띠를 빼내 손목을 묶었다.
기도 녀석은 뭔 개멋인지 혁대를 아예 차지 않아 신고 있던 캐주얼화 끈을 풀어 같은 조치를 했다.
그런 다음 놈들을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리곤 꿇어앉으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개차반 신세가 된 일종의 클럽 권력자들은 한숨을 쉬고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그 사이에 여자는 벽에 걸린 옷을 내려 알몸을 가린 뒤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가다듬었다.
괴소문
“이렇게 된 이상, 짐승 같은 네놈들의 목을 따서 뒷산에 파묻어 버리고 싶지만, 만약 개과천선해 앞으로는 여자들을 괴롭히지 않고, 또 오늘 너희들이 저지른 일을 가지고 적반하장 격으로 엉터리 거짓말을 만들어 괴소문을 퍼뜨리지 않는다면 그냥 돌려보내 주겠다. 면도날이 혀 위에 있는 것처럼 잘 생각하고 진실을 말해. 그렇잖으면 네놈들을 죽인 후 나도 지옥으로 잠적하련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풀어 줘.”
주방장이 비굴스런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에잇, 오늘 재수 옴붙었네! 풀어 주든 말든 잘 알아서 해.”
기도 녀석은 짜증을 부렸다.
“그럼 죽어도 좋단 얘기군. 너 같은 놈은 죽이기보다 반병신을 만들어 버리는 게 좋겠어. 그래야 인생의 설움을 느끼고 남들도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겠지.”
청운은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도 녀석은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냉혹하게 노려보았다.
“잘 들어둬. 내 방식은 너희들 같은 폭력배와 달라. 겉으론 멀쩡해 뵈는데 속으로 끙끙 앓으며 힘을 못 쓰는 거야. 알겠어? 우선 맛뵈기로 팔 하나를 잠시 만져 볼까.”
청운은 쭈그려 앉으며 녀석의 어깻죽지를 슬슬 매만졌다. 놈은 묵묵부답인데 옆에 앉은 주방장이 도리어 애가 닳아 안절부절못해 주절거렸다.
“아니, 이런 일로 꼭 두 대장부가 서로 목숨을 걸어야 쓰겠어? 아무리 잘났다 쳐도 용쟁호투를 하게 되면 결국 한 사람은 죽게 돼. 가만 보니까 우리 청운 아우님도 무술 도장깨나 다니며 상당히 무공을 쌓았고 또한 이소룡 영화에도 제법 조예가 깊은 듯한데 사실상 얘도 소룡이 광팬에다가 꿈이 무술가이걸랑. 나도 물론 소림사 주방장을 본 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채 되새기고 있지만….”
“개소리 집어치워! 무협영화 팬이 이런 개 같은 짓을 한단 말야?”
“그건 말이지 사실 무협지에도 정파와 흑파가 있지만, 마치 요즘 정치판처럼 정통파라고 자처하는 것들이 오히려 은근슬쩍 더 사악한 짓을 벌이고 국민을 속이는 걸 개미 좆 빨 듯 하고 있잖아. 요런 현실이다 보니 얘는 정파보다는 차라리 흑파 속에 몸 담그고 살면서 진실적으로는 정파의 대의를 이 세상에 펼치려는 거지.”
“개미 좆은 너희들이 빨면서 뭘 그래, 응?”
청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 무렵은 이소룡의 시대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큰길 바닥에서 이소룡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그 화려 무비한 액션을 흉내내곤 했다.
청운은 정무문을 본 게 전부였다. 이름도 그렇거니와 생김새도 낯설지 않아 처음엔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일본군에 참살당한 사부의 원한을 복수하고 연인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그의 무술은 눈부실 만큼 현란했다.
더구나 그게 가공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무예라는 데 여느 관객과 함께 빠져들었다.
하지만 청운은 장면 장면 이어지는 이소룡의 무술 액션에는 감탄하면서도 실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웃었다.
일반인이 아닌 깡패나 고수급 악적 수십 명을 영상 속에서 일거에 제압하는 건 통쾌한 모습이지만, 만약 공작원 훈련소에서라면 몇 초 내에 결정타를 맞고 연병장에 뻗지 않았을까?
그래도 제도적인 도장 무술을 초월한 파격미엔 저도 모르게 홀려들었다. 특히 자신의 정욕을 초월해 어여쁜 연인을 구해 준 후 큰일을 위해 훌훌 떠나는 애절한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미꾸라지 주제에 용을 들먹이다니 참으로 가소롭지만, 이소룡과 소림사 주방장을 생각해 한번 속아 주겠다. 두번 다시 여기에 검은 고양이처럼 얼씬거렸다간, 보이지 않게 혈도만 찍어서 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알았으면 썩 꺼져!”
놈들은 아닌 밤중에 별 횡액을 다 당했다는 표정으로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사라졌다.
“두 번째 도와주시는군요. 지난번 일은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 함께 모아서 정말 감사드려요.”
짐승 같은 클럽 권력자들의 행패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파와 흑파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뭘요, 나도 큰 도움을 받았는걸요.”
청운이 대꾸했다.
“네? 언제요?”
“하하,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처음 블루문을 찾을 때 길 안내를 해주셨죠.”
“음, 그런 일이 있었군. 난 댁의 얼굴은 알고 있어도, 그때 일은 잊어버렸었죠. 내가 길을 가리켜 준다는 그런 생각이 전연 없었으니까 말예요. 호호.”
“그랬군요.”
“커피 한잔 하실래요? 아님 술을?”
“난 커핀 잘 못 마셔요.”
“어머, 왜요?”
“커피 하면 미국이 떠오르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고…커피 재료 자체는 저 머나먼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등지에서 가난한 농부들이 한 알 두 알 따 모은 것이라더군요. 뙤약볕 아래 빼빼 말라 굶어 죽는 사람들과 포식자들이 킬킬대며 홀짝거리는 모습.”
“그럼 위스키는 괜찮겠죠?”
“한잔 주세요.”
여자가 화장대 밑에 붙은 서랍장에서 술병을 찾고 있을 때에야 청운은 방을 슬쩍 둘러보았다. 놈들의 말처럼 ‘수녀의 성당’ 같지는 않았지만 클럽 댄서의 방 같지 않게 수수한 건 사실이었다.
“돈을 꽤 벌 텐데 왜 이런 곳에서 살죠?”
여자가 따라 준 술로 입술을 축이고 나서 청운이 물었다. 여자는 자신의 술잔을 하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미군들이 환호성을 칠 땐 인기 댄서니까 돈을 많이 벌 것 같죠? 하지만 그건 거품일 뿐이에요. 더군다나 우린 상납할 데가 많아요. 여기저기 떼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지요. 그리구 고향 집에도 다달이 송금해야 하구.”
여자는 술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노래도 잘 부르시던데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해보지 그래요?”
“호홋. 댁은 싸움을 잘하는지 모르지만, 인생판에 대해서는 숙맥이로군요.”
“물론 나도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어요.”
여자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남의 얘기 듣고 뭘 얼마나 알겠어요. 그런 면에서 댁은 아직 어린애라고 할 수 있겠어요.”
“뭐라구요, 나도.”
비밀 엄수
하지만 청운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대를 나서기 전 지장을 찍은 서약서의 ‘비밀 엄수’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호호홋, 화난 모양이네. 조금쯤 귀여운 구석이 없잖아 있군. 자긴 몇 살이야?”
청운은 묵묵히 눈썹을 찌푸렸다.
“더 화났나 봐. 호홋, 남자들은 왜 어리다고 하면 싫어할까. 그냥 어린애처럼 살아가 봐도 좋을 텐데.”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