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청운은 길가로 나서서 두리번거렸다. 이미 자정을 넘어 네온사인이 거의 다 꺼져 버린 거리는 어둠에 묻혀 있었다.
청운은 문득 가만히 눈을 감곤 귀를 기울였다.
북파공작원 훈련 시절에 익힌 감청 비법을 사용해 보기 위해서였다. 일반 군인보다 10배 이상 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혹독한 훈련….
독종 괴물
국가 정보부에서 파견된 물색관에 속아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붉은 모자를 쓴 조교들은 옷을 모조리 벗겨 놓곤 몽둥이 타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밥을 전혀 주지 않았다.
사회에서 찐 헛살을 뺀다는 명분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몰골 처연한 대원들의 눈에 문득 파란 불이 켜졌다.
훈련 도중 주어진 시간 안에 험한 산속을 헤매며 풀뿌리를 캐먹고 뱀을 잡아먹었다. 배가 지나치게 고프면 인육이라도 먹고 싶어질 터였다.
사흘째 되던 날, 기진맥진해 쓰러진 동료의 허벅지를 베어 먹은 광란자 한 명이 총살되었다. 그건 헛살을 뺀다는 명분하에 사실상 인간성을 벗어난 독종 괴물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청운은 양쪽 귀를 한번 매만지고 나서 어두운 거리를 박쥐처럼 내달렸다. 가뭇가뭇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를 감지한 것이다. 골목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돈 끝에 이윽고 놈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두 놈은 어느 여관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청운은 슬금슬금 다가갔다. 놈들은 카운터에 앉은 뚱뚱한 아줌마와 얘기를 나누더니 돈을 지불하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청운은 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찾았다. 하지만 한푼도 없었다.
‘어떡한다? 곧장 들어가서 놈들과 동행이라고 말해 볼까? 아냐, 괜히 긁어 부스름 만들 건 없지. 저 뚱보 아줌마의 눈이 게슴츠레한 걸 보면 자다가 깬 게 틀림없어. 잠시만 기다려 보자.’
청운은 잔뜩 긴장한 채 생각했다. 그러곤 행인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슬슬 거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뚱보 여자는 의자에 푹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곤 졸기 시작했다.
청운은 삐걱거리는 출입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숙박부 옆에 놓인 볼펜을 슬쩍 집어들곤 발소리를 죽여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복도 양쪽으로 방이 많았다.
놈들은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는지 흔적도 없었다.
청운은 다시 한번 귀를 잔뜩 곤두세운 채 방문 안쪽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여러 가지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할딱거리는 소리, 쾌락에 겨운 신음소리, 기침소리, 웃는 소리, 우는 소리…고통을 못 이겨 자지려지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문을 벌컥 연 청운은 곧 닫고 말았다.
대머리 노인이 비디오 화면 속의 수간 당하는 여인을 보며 히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맨 구석에 붙은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분명하진 않았지만 굵은 남자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청신경을 집중하자 좀더 선명해졌다.
“까불지 말고 곱게 있어. 만일 지랄하면 이 시퍼럴 칼날로 고운 얼굴을 난도질하고 아예 춤을 못 추도록 발목 인대를 끊어 버릴 테니까. 흐흐.”
“아.”
“입주둥일 틀어막을 수도 있지만, 이런 여관에서 비명 소리가 난들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
“흐윽.”
“입을 다문 채 노려보니 더 매력적이구먼. 흐흣 어차피 몸 팔아 먹고 사는 처지에 너무 새침떨 건 없잖아? 좋은 게 좋지. 만약 여기서 반항하거나 차후에라도 어디 가서 개소릴 지껄였다간 병신 꼴로 이 바닥을 떠야 할 거야. 흐흐흐.”
“붉은 색 옷을 입고 춤출 때도 섹시했지만, 이렇게 새하얀 순백의 잠옷을 걸치고 있으니 한결 더 매혹적이야. 안 그래?”
“흐흥, 그렇군여. 형, 너무 흥분하진 마.”
“난 이런 순간엔 목숨까지도 내걸고 싶으니까.”
“근데 요 쌍년이 어떤 양키 장교 놈과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더만,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을 뿌려 놓았던가 보군.”
“아니, 그건 왜?”
“그렇게 연막을 쳐놓으면 시러베 잡놈들이 쉬 넘겨보질 않거든. 여긴 양공주나 콜걸의 방이 아니라 마치 처녀 수녀님의 방 같지 않수? 이런 여관 구석 밀실에 살다니…혹시 이년은 마타하리 같은 스파이가 아닐까 몰라.”
“북한에서 내려온 여간첩?”
모조리 벗겨 놓고 몽둥이 타작
배고파 동료 허벅지 베어 먹기도
“응.”
“그럼 더 재미나겠군. 일단 알몸뚱이로 만들어 놓고 음부 속을 탐색해 보면 서서히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겠지. 여자는 몸으로 말한다는 영화 대사도 있잖아. 흐흐.”
잠깐 짧게 여자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멎었다.
청운은 좀전부터 볼펜 뚜껑을 열고 스프링을 꺼낸 후 길게 늘여서는 다시 두 겹으로 접어 살살 매만지고 있었다.
그걸 열쇠구멍 속에 넣어 조심스레 이리저리 돌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윽고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좁은 틈새로 들여다보니 놈들은 여자를 강간하려고 잔뜩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허연 몸뚱이 위로 주방장 놈이 올라타는 중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비틀자 기도 놈이 잭나이프 칼날을 얼굴에 대곤 위협했다. 순간 청운은 흠칫 놀랐다.
‘역시 그녀였군. 위기 상황에 자꾸 얽혀서 나서는 건 별로 좋지 않은걸…늘 완전히 보호해 주지 못할 바엔 아예 이쯤에서 그만 물러서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저런 상황을 눈앞에 보고도 외면할 순 없지. 복면이라도 하나 만들어 올 걸 그랬군. 하긴 그럴 만한 틈도 없었지만 혹시 저 아가씨에게 내 얼굴을 보여 주어 정의의 기사로서 그녀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은 흑심은 없는 걸까?’
그러나 생각을 계속할 여유는 없었다. 새된 비명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청운의 몸은 이미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도 녀석도 보통내기는 아닌 듯 즉시 몸을 돌려 자세를 잡곤 시퍼런 칼을 내뻗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니가 여기 왜 왔어, 응?”
“긴말 할 것 없고, 그냥 여기서 나가라.”
“후훗, 너 미친 게 아냐? 하룻강아지 사자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좋게 말할 때 꺼져.”
청운의 음성은 점점 더 나직해졌다.
“씨펄 넘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보군. 흐흣, 각을 떠 버리겠어.”
기도는 속에 숨겨두었던 악의를 드러내며 잭나이프를 지그재그로 날렵히 휘둘러 청운을 옥죄어 왔다.
청운은 방구석으로 조금씩 밀렸다. 한순간 이마에 핏방울이 돋았다.
청운은 그 좁은 공간에서 갑자기 몸을 구부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공중잽이를 한 다음 놈의 턱을 걷어찼다.
기도 녀석은 풀썩 쓰러진 채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씨근거렸다. 청운이 자세를 바로잡곤 숨을 돌리는 순간 주방장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꼼짝마라! 까불면 이년을 죽이겠다.”
놈은 좀전까지 기도가 쥐고 있던 칼을 꽉 잡은 채 여자의 목을 겨누었다. 일부러 던져 준 건 아니고 아마 뒤로 쓰러지면서 놓친 칼이 공교롭게 그쪽으로 날아간 모양이었다.
놈은 자기 수하로 부리던 청운이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난 것도 괘씸하거니와 여자 정복의 위대한 목표를 훼방당한 나머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분을 못 참아 곧장 여자의 하얀 목에 칼을 꽂을 듯 부르르 떨었다.
살인 연습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청운은 히힛 하고 미친놈처럼 웃으며 목을 매만졌다.
갑자기 그의 손끝에서 뭔가 반짝하고 튕겨 날아간 찰나 주방장은 짧은 비명과 함께 손으로 눈을 감쌌다.
그건 청운이 안에 받쳐 입은 셔츠에서 뜯어낸 작고 둥근 단추였다. 실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섬광처럼 빠른 타격으로 상대를 혼비백산케 할 위력은 있었다.
악마산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을 당시 대원들은 콩알이나 쌀알 또는 작은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튕겨 표적의 눈알을 맞추는 수련도 자주 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