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떠나는 정치, 남는 권력

강훈식이 보여준 새로운 권력 공식

정치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성공 공식이 있다. 더 큰 기회가 오면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청와대를 나와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을 거쳐 단체장이 되고, 다시 더 큰 선거에 도전하는 사람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권력은 선거를 통해 확대된다고 믿었고 정치인의 가치는 얼마나 큰 선거에 나가느냐로 측정됐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남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주목받았다.

청와대 역시 오랫동안 그런 공간이었다. 정권이 출범하면 인재들이 모였고 선거가 다가오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지방선거와 총선은 청와대 인사들이 정치적 체급을 키우는 대표적인 무대였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국 정치인의 목표는 선거를 통한 독자적 권력 확보였다.

청와대는 목적지가 아니라 더 큰 정치로 가기 위한 경유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권력의 무게중심이 선거 현장에서 국정 운영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외교, 안보와 산업정책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국가를 설계하는 능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선거가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국정 운영과 전략 설계가 권력이 되고 있다.

정치의 공식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있다. 그는 충남도지사라는 정치적 기회도 있었고 최근에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두 번 모두 대통령 곁에 남았다. 겉으로 보면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의 흐름을 길게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남았기 때문에 더 큰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된 셈이다.

강훈식은 충남을 대표하는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충남 아산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당 내에서도 꾸준히 차세대 주자로 거론돼 왔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충남지사 선거에 도전할 가능성을 높게 보기도 했다. 지역 기반과 인지도, 정치 경험을 고려하면 충분히 현실적인 시나리오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방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했다.

충남도지사는 결코 작은 자리가 아니다. 충청권을 대표하는 광역단체장이며 대권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정치인들이 광역단체장을 발판으로 전국적 정치인으로 성장해 왔다. 충남도지사에 당선된다면 충청권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다. 누구라도 욕심낼 만한 정치적 기회였다.

하지만 강훈식은 다른 길을 택했다. 지역 권력보다 중앙 권력을 택했고 지방 행정보다 국가 운영을 택했다. 충남도청보다 대통령실을 택했고 선거보다 국정 설계를 택했다. 당시에는 아쉬운 결정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단순한 잔류가 아니었다. 권력의 방향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읽은 선택이었다.

과거 정치에서는 지방선거 출마가 성장의 공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AI와 반도체, 저출산과 지방 소멸, 미중 경쟁과 공급망 재편 같은 국가적 과제가 정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지역 행정보다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경험이 더 큰 자산이 된다.

강훈식은 누구보다 먼저 그 변화를 읽은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일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강훈식 비서실장이 차기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검토됐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사실상 내정 단계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고 강훈식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남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총리 인선 결과에 주목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비서실장으로 남았느냐는 점이다.

총리는 대통령 다음의 국가 지도자다. 국정을 총괄하고 각 부처를 조정하며 정부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는다. 정치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이며 국가 경영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강훈식에게도 총리는 분명 큰 기회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결국 그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계속 일하게 했다.

그 단서를 8일 열린 이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을 대체 불가성에서 찾겠다는 의미다. 앞으로의 국정 운영 역시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역량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도 대체 불가를 추구하고 사람도 대체 불가를 요구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훈식은 대통령실 안에서 사실상 대체 불가 비서실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 대통령실을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국정 전반을 조율하는 전략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총리보다 후임 비서실장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웠을 수 있다.

실제로 집권 2년 차는 어느 정부에게나 가장 중요한 시기다. 국민은 이제 비전보다 성과를 요구하고 정권은 국정 운영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 대통령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국정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할 적임자가 강훈식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그의 유임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신뢰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종종 직급이 높아지는 것을 승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은 직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국가 운영을 설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총리는 바꿀 수 있지만 집권 2년 차 국정 운영을 책임질 핵심 참모는 쉽게 바꾸기 어렵다. 이번 인선은 바로 그 현실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선거가 권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정 설계가 권력을 만든다. 국가 전략을 세우고 정책을 조율하며 정부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이미 승부가 결정된다. 선거는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선거 전문가보다 국가 경영 전문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강훈식은 지금 충남도지사도 아니고 총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곁에서 대한민국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 있다. 국정 성과가 쌓일수록 그의 정치적 가치 역시 함께 커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재명정부가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는다면 그는 그 성과를 함께 만든 핵심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의 힘이다.

과거에는 떠난 자가 승자였다. 더 큰 선거에 나가고 더 높은 자리를 얻는 사람이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국가를 설계하고 국정을 조율하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만드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강훈식은 충남도지사의 길도 있었고 총리의 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모두 대통령 곁에 남았다. 필자는 그가 총리가 되지 못했던 것보다 대통령 곁에 남았던 시간을 더 중요하게 기억하고 싶다. 떠나는 정치가 아니라 남는 권력, 그것이 바로 강훈식이 보여준 새로운 권력 공식이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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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믿음이죠”라고. 피해자들은 2년여 동안 수십억원을 뜯기면서도 차용증은 물론 사업계획서 같은 문서 한 장 보지 못했다. 그나마 명함에도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서울의 한 보험사 소회의실. 처음에 3명이던 피해자가 2시간 뒤 1명 더해져 총 4명이 됐다. 몇 명은 과거 학습지 회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몇 명은 현재 보험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의 접점은 최모씨라는 한 여자였다. 이들 모두 최씨를 만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뜯겼다. 4명에게서만 20억원 가까운 돈이 흘러나갔다. 클래식한 사기 수법 최씨의 사기 행각은 광범위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헬스케어 제품 판매 직원 등 각각의 피해자 그룹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느낄 때쯤에서야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피해자 수가 70~80명, 피해액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 대략적인 수치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한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씨의 정체는 모호했다. 최씨가 일부 피해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기업/개인 세금 처리 대행’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한 피해자는 “최씨는 기업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세무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계속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을 세무 관련 전문직으로, 배우자는 외교관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명품 옷, 외제 차 등은 최씨를 ‘돈 많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용했다. 실제 최씨를 만났던 몇몇 피해자들은 ‘(집에) 가정부가 있었다’ ‘가정부에게 LA 갈비 세트를 줬다’ ‘(최씨와 그 가족이) 블랙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급 카페에서 비싼 디저트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씨의 배경에 흔들리던 피해자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드는 데는 건 주변 동료, 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한 동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말에 피해자들은 최씨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질릴 정도로 권했다.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피해자가 대부분 ‘여초 직장’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파악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학습지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보험사로 같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몇몇이 최씨와 얽히면서 지인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판이 커졌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불법 다단계’ 방식이다. 한 변호사는 “굉장히 클래식한 방식의 사기”라고 표현했다. 최씨의 배경과 언행, 동료와 지인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그때부터 홀린 듯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간단했다. ‘(돈을) 일주일 쓰는 대신 이자를 1% 주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일주일 동안 빌려주면 이자로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피해자는 일주일 뒤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100만원을 받게 된다. 한 피해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예 선이자를 떼고 빌려 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1억원이면 9900만원만 빌려주는 식으로, 원금을 돌려받으면 100만원을 번 셈이 된다. 한남동 아파트 ‘상류층’ 행세 동료, 지인 부추김에 거액 투자 처음 한두번은 이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금이 들어와야 할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이자까지 끊겼다. 원금과 이자를 달라는 요구에 최씨는 이자 비율을 높이면서 추가로 돈을 넣으라고 권했다. ‘돈을 더 넣으면 이자로 10%를 주겠다’는 식이다. 피해자마다 이자 비율은 달랐지만 대략 5~10%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해 주면 월 수수료로 0.8%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최씨의 말대로라면 카드로 100만원을 긁었을 때 수수료로 8000원이 발생한다. 당연히 카드 결제액이 커질수록 수수료도 많아진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카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몇몇은 카드를 새로 발급까지 받아 최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결말은 같았다. 카드 대금은 쌓여가고 수수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한도 때문에 사용이 막히니까 리볼빙을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루는 서비스다. 당장 변제 부담은 덜하지만 잔액에 연이자가 15~19%가량 붙는다. 눈 깜짝할 새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상품이다. 이자나 수수료는커녕 원금도 못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피해자들은 결국 최씨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보험설계사 등 피해자 7명은 지난해 12월 최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해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 등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7명 외에도 피해자가 3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 5명은 주범 최씨, 모집책 차모씨, 이모씨, 박모씨, 그 외 김모씨 등이다. 피해자 7명과 접점이 가장 적은 김씨를 제외하고 4명의 피고소인만 놓고 보면 역학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차씨와 이씨, 박씨 등이 최씨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7명의 피해액은 26억8700만원에 달한다. 나머지 피해자 3명의 피해액까지 합치면 28억8000만원으로 불어난다. 이들은 계좌이체, 카드 결제 등의 방법으로 최씨 등에게 돈을 보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1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가운데서도 A씨의 피해액은 확인된 것만 약 17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7명의 전체 피해액(27억원) 중에 63%가 A씨의 몫인 셈이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이자 비용은 별도다. 이 돈까지 합치면 A씨의 피해액은 약 23억원까지 늘어난다. A씨는 차씨를 통해 최씨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보험사에서 5년간 동료로 지냈다. 홀린 듯이 돈 보냈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었다. 그는 “죽도록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2024년 초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라’는 차씨의 부름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A씨는 인근의 카페에서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최씨를 만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차씨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A씨는 “처음 만난 최씨는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차씨는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차씨가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원금은 보장된다. 나도 2억을 벌었고 두 달 뒤에 추가로 1억을 번다’고 말하니 솔깃했다. 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차씨가 신나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차씨는 A씨에게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기도 했다. 카드 결제, 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최씨에게 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2024년 4월경부터다. A씨의 카드는 2024년 4월부터 8월, 지난해 2월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래처는 정유사, 명품관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동차 기름값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 주유 대금으로 결제됐다는 점이다. 2024년 4월, A씨의 카드가 처음 사용된 날짜에 ‘○○석유’라는 곳에서 1200만원이 결제됐다. 이후에도 1000만원 단위의 돈이 ‘○○상사’ ‘○○○ 에너지’ 등에서 사용됐다. 카드로 긁어놓고 이후에 현금으로 되돌려받는 ‘카드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최씨는 명품관에서도 총 7700만원을 긁었다. 이렇게 결제된 카드 대금은 3억6000만원에 달한다. 카드 대금과 수수료를 주겠다는 최씨의 말은 ‘공수표’였다. A씨는 “카드를 빌려준 쪽에서 돈을 넣어달라고 오히려 빌어야 했다. 몇 번을 요구해야 한번 돈을 넣어줄까, 말까였다. 한도가 막히면 다른 카드를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쳐 최씨로부터 입금된 돈은 2억원. 원금과 주기로 한 수수료를 계산하면 턱없는 돈이다. 결국 A씨는 카드 대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뜯겼다. ‘짧게 쓰고 줄게’라며 빌려 간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은 최씨가 이자 명목의 돈을 주지 못한 시기를 2024년경으로 기억했다. A씨 역시 2024년 4월에 처음 돈을 넣고 한 달 뒤부터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회사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돈이 묶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도 죽었나 ‘돈만 들어오면 A씨부터 챙겨줄게’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A씨가 매달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돈을 넣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A씨를 지배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번만 빌려주면’ ‘곧 돈이 들어온다’는 최씨의 말에 속아 A씨가 빌려준 돈은 15억5000만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이 전부 A씨 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A씨는 “동생, 부모님, 지인, 심지어 고객에게까지 돈을 빌렸다”고 털어놨다. 이 중 3억원가량은 집을 담보로 제3금융권에서 빌린 돈으로 즉, 사채다. 급하게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제시한 높은 이자율은 A씨의 목을 옥죄고 있다. A씨는 지금도 그 이자를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악랄한 수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최씨는 A씨가 보험설계사인 점을 이용해 그의 고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연결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대납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갚겠다며 A씨를 이용한 것이다. A씨는 해당 고객이 최씨와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 400만원이 넘는 보험을 2개 가입한 고객은 10개월 정도 보험료를 낸 뒤 사라졌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을 유치하면 전체 납입 기간에 대한 선수수료로 익월에 월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월 100만원, 20년 납기 보험을 든다고 하면 총 보험료 2억4000만원에 대한 수수료가 보험설계사의 몫이다. 능력에 따라 보험설계사의 연봉이 천차만별로 차이 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있다. 고객이 최소 25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설계사가 받은 월급은 ‘환수’ 조처된다. 보험설계사의 능력은 신규 고객 유치가 아니라 유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가까이 단 한 건의 환수 조처도 없던 A씨의 경력은 최씨로 인해 무너졌다. A씨의 동료이면서 피해자인 이들 역시 최씨, 차씨 등이 연결해준 고객이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환수 조처로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씨에게 넘어간 1억5000만원은 결정타였다. 그전까지 약 10개월간 돈을 보내지 않고 빚 독촉만 했던 A씨는 최씨에게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A씨에 따르면 최씨는 수표 다발이 찍힌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 1억5000만원의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1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돈 못 빌려주면 카드라도 내놔 주범 최씨 다른 사건으로 재판 5000만원만 마련해 갔던 A씨는 그 자리에서 고객에게 1억원을 빌려 최씨에게 건넸다. A씨는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A씨) 때문에 450억원을 출금 못하게 생겼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윽박질렀다. 최씨도 나서서 ‘빨리 어디에서라도 빌려봐’라고 계속 압박했다. 정말 내 책임이 될 것 같은 마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1억50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뼈까지 발라 먹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A씨는 최씨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A씨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속을 수 있냐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A씨도 피해자들도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피고소인 가운데 1명인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역시 최씨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그걸로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되짚어 보면 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소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돈 욕심에 시작했다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하니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유준 법무법인 LKB평산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웅덩이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웅덩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다시 말해 투자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사업체 같은 실체가 아예 없었다. 즉, 최씨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기망할 의도로 만났고 피해자들을 끌어들인 피고소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A씨 등에게 받은 돈을 투자 목적이 아닌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피고소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몇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통화가 연결된 김씨는 “최씨는 고소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걔도 사업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여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걔도 사기 피해자”라며 “가족하고도 사이가 틀어졌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안다. 나는 (최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씨 사건은 크게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있고 A씨 등의 고소 사건도 비슷한 유형이라 검찰 송치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또 다른 보험사 지점, 헬스케어 제품 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도 피해자가 있다. 이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최씨를 비롯한 중간 모집책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피해 금액이 크기에 이들은 형량이 높은 ‘특경법’에 걸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 사건으로 2명이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상태다. 최씨와 피해자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큰돈을 투자했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피고소인들은 이 여성이 원래 우울증을 앓았고, 남성은 지병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추가 피해자 더 나올 듯 과거 사기 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 사건의 진짜 공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돈을 뜯겼던 피해자가 원금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다. 사기 사건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에 비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영혼이 다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일전에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