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성공 공식이 있다. 더 큰 기회가 오면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청와대를 나와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을 거쳐 단체장이 되고, 다시 더 큰 선거에 도전하는 사람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권력은 선거를 통해 확대된다고 믿었고 정치인의 가치는 얼마나 큰 선거에 나가느냐로 측정됐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남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주목받았다.
청와대 역시 오랫동안 그런 공간이었다. 정권이 출범하면 인재들이 모였고 선거가 다가오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지방선거와 총선은 청와대 인사들이 정치적 체급을 키우는 대표적인 무대였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국 정치인의 목표는 선거를 통한 독자적 권력 확보였다.
청와대는 목적지가 아니라 더 큰 정치로 가기 위한 경유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권력의 무게중심이 선거 현장에서 국정 운영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외교, 안보와 산업정책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국가를 설계하는 능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선거가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국정 운영과 전략 설계가 권력이 되고 있다.
정치의 공식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있다. 그는 충남도지사라는 정치적 기회도 있었고 최근에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두 번 모두 대통령 곁에 남았다. 겉으로 보면 기회를 놓친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의 흐름을 길게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남았기 때문에 더 큰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된 셈이다.
강훈식은 충남을 대표하는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충남 아산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당 내에서도 꾸준히 차세대 주자로 거론돼 왔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충남지사 선거에 도전할 가능성을 높게 보기도 했다. 지역 기반과 인지도, 정치 경험을 고려하면 충분히 현실적인 시나리오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방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했다.
충남도지사는 결코 작은 자리가 아니다. 충청권을 대표하는 광역단체장이며 대권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정치인들이 광역단체장을 발판으로 전국적 정치인으로 성장해 왔다. 충남도지사에 당선된다면 충청권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다. 누구라도 욕심낼 만한 정치적 기회였다.
하지만 강훈식은 다른 길을 택했다. 지역 권력보다 중앙 권력을 택했고 지방 행정보다 국가 운영을 택했다. 충남도청보다 대통령실을 택했고 선거보다 국정 설계를 택했다. 당시에는 아쉬운 결정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단순한 잔류가 아니었다. 권력의 방향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읽은 선택이었다.
과거 정치에서는 지방선거 출마가 성장의 공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AI와 반도체, 저출산과 지방 소멸, 미중 경쟁과 공급망 재편 같은 국가적 과제가 정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지역 행정보다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경험이 더 큰 자산이 된다.
강훈식은 누구보다 먼저 그 변화를 읽은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일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강훈식 비서실장이 차기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검토됐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사실상 내정 단계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고 강훈식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남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총리 인선 결과에 주목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비서실장으로 남았느냐는 점이다.
총리는 대통령 다음의 국가 지도자다. 국정을 총괄하고 각 부처를 조정하며 정부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는다. 정치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이며 국가 경영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강훈식에게도 총리는 분명 큰 기회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결국 그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계속 일하게 했다.
그 단서를 8일 열린 이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을 대체 불가성에서 찾겠다는 의미다. 앞으로의 국정 운영 역시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역량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도 대체 불가를 추구하고 사람도 대체 불가를 요구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훈식은 대통령실 안에서 사실상 대체 불가 비서실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 대통령실을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국정 전반을 조율하는 전략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총리보다 후임 비서실장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웠을 수 있다.
실제로 집권 2년 차는 어느 정부에게나 가장 중요한 시기다. 국민은 이제 비전보다 성과를 요구하고 정권은 국정 운영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 대통령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국정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할 적임자가 강훈식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그의 유임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신뢰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종종 직급이 높아지는 것을 승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은 직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국가 운영을 설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총리는 바꿀 수 있지만 집권 2년 차 국정 운영을 책임질 핵심 참모는 쉽게 바꾸기 어렵다. 이번 인선은 바로 그 현실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선거가 권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정 설계가 권력을 만든다. 국가 전략을 세우고 정책을 조율하며 정부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이미 승부가 결정된다. 선거는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선거 전문가보다 국가 경영 전문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강훈식은 지금 충남도지사도 아니고 총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곁에서 대한민국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 있다. 국정 성과가 쌓일수록 그의 정치적 가치 역시 함께 커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재명정부가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는다면 그는 그 성과를 함께 만든 핵심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의 힘이다.
과거에는 떠난 자가 승자였다. 더 큰 선거에 나가고 더 높은 자리를 얻는 사람이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국가를 설계하고 국정을 조율하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만드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강훈식은 충남도지사의 길도 있었고 총리의 길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모두 대통령 곁에 남았다. 필자는 그가 총리가 되지 못했던 것보다 대통령 곁에 남았던 시간을 더 중요하게 기억하고 싶다. 떠나는 정치가 아니라 남는 권력, 그것이 바로 강훈식이 보여준 새로운 권력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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