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오히려 일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힘들 경우가 많았다.
지배인은 클럽 여주인의 8촌 오빠이자 정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는 쿠데타로 집권해 독재 철권통치를 계속하는 박 대통령을 위대한 영도자로 찬미하며, 자신도 그런 식으로 종업원들에게 권력을 휘둘렀다.
눈에 거슬리면 위협과 폭력을 다반사로 행사하는 한편 당근을 써서 구슬리기도 했다.
위대한 영도자
동두천 최대 수준인 블루문에서 쫓겨나면 다른 곳에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므로 다들 쉬쉬하며 참아 넘겼다.
청운은 자신이 무담시 욕설을 듣고 인격 모욕을 당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왠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처사를 받는 것 또한 마치 자기가 그런 더러운 토악질 앞에 선 듯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소개해 준 피에로 형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내가 죽는 건 겁나지 않지만, 그 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지.’
그러면서 씩 웃곤 했다. 어쨌든 자신이 말끔히 정돈한 자리에 새 손님이 앉아 가져다 준 술을 음미하며 뭔지 모를 얘기와 함께 미소 지을 땐 잠깐이나마 노동의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지옥의 구덩이는 있는 법이었다. 청운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은 주방에 들어설 때였다. 그것도 밤 11시가 넘어 손님도 대부분 눈맞은 여자와 함께 팔짱을 낀 채 사라지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미군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만 안주는 별로 대단한 걸 시키지 않기에 평소에도 주방은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었다.
스물 네댓 살쯤 돼 보이는 주방장은 지배인보다 더 심한 박통 숭배자이자 극단적인 친미주의자였다. 늘 걸치고 다니는 하얀 야구 모자와 티셔츠엔 양키 팀 마크와 미국 성조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한 번씩 꼭 미친 듯이 미국과 미군을 향해 욕을 퍼붇곤 했다. 그럴 때면 입가엔 허연 침거품이 풀풀 생겨났다.
물론 자신의 아방궁인 작은 주방에서 소리는 잔뜩 억누르고 증오심은 펄펄 끓이며 쥐새끼처럼 내는 소음이라 바깥에 들키진 않았지만 과연 그가 친미주의자인지 미친 녀석인지 종잡을 길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곱슬머리에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한 것을 보면 조금쯤 트기 같기도 한데 본인은 파마 머리라고 주장한다.
혹시 미군 아비가 어린애에게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다가 상처와 배신감만 남긴 채 아메리카로 줄행랑쳐 버린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장은 불그죽죽한 입술 새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개새끼. 암캐 엉덩이나 쫒아다니는 양키 놈들. 흥, 그래봤자 흰둥이나 검둥이나 결국 같은 짐승일 뿐이야. 킬킬.”
청운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어이, 너무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좀 쉬라구.”
아마도 또 찬장 속에 숨겨둔 시바스 리갈을 이따금 꺼내 찔끔찔끔 마신 모양이었다. 지배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놈이 청운에겐 마치 주방이라는 소궁궐의 왕처럼 군다.
“씨발, 인생이 도대체 뭐야?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왜 막느냔 말이야, 응? 내가 뭐 아주 대단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닌데 말씀이야. 낄낄, 대체 넌 무슨 재미로 사는지 꽤 궁금해. 인생엔 목적이 있어야지, 낄낄.”
“주방장 형은 그 뭐…이상스런 목표를 향해 잘 나가고 있나요?”
“후후, 그럼 오늘도 또 한 년 조질 거야. 야, 너도 한번 껴 볼래?”
청운은 씩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짜식, 꺼벙이 같으니.”
청운이 그동안 살펴본 그는 변태성이 농후했다. 미식가에다 찰나적인 향락주의자로 사는 건 자유라 치더라도, 여자들의 속옷을 훔쳐 냄새를 맡다가 갈기갈기 찢는다거나, 화장실 문 밑의 틈새로 상체를 잔뜩 구부린 채 훔쳐보며 악마적인 미소를 짓는 꼴을 보면 만정이 다 떨어졌다.
그의 원대한 목표는 평생 동안 여자를 1000명 이상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 실적을 표시하기 위해 자그마한 스크랩북에 공략한 여자의 음모를 한 올씩 수집해 넣고 관련 사항을 메모해 둔 것을 청운에게 비밀스레 보여 주며 자랑스레 낄낄거리기도 했다.
갑자기 기도 놈이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좆나게 배고프네. 형, 라면이나 하나 끓여 주슈.”
“얄마, 내가 니 종이냐? 쟤한테 고개 꾸벅 숙이고 부탁해 보렴.”
“쓰벌, 형이 약을 탔는지 이젠 중독돼서 형이 끓인 라면이 아니면 못 먹겠어.”
“미친 새끼.”
그러면서도 주방장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청운은 개수대에 쌓여 있는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형, 수고스럽지만 일단 면을 삶아서 국물을 버린 다음에 스프와 고추장을 넣어 좀 비벼 줘.”
“왜?”
“일단 그렇게 좀 해줘. 기름기가 몸에 안 좋다니까 뭐.”
종업원들에게 위협과 폭력
다들 쉬쉬하며 참아 넘겨
“조 새끼, 또 좆에 감기 걸렸구만. 야. 청운아, 잘 알아 둬라. 저런 놈은 삶을 요리해 먹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음부에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청운은 대꾸하지 않고 설거지만 묵묵히 계속했다.
“형, 기뻐해. 오늘 밤 그년이 독수공방이라는 정보를 알아냈어.”
“음, 그런데 독종인데 잘 될까?”
“까짓것, 제 아무리 도도한 년이라도 주사 한 방이면 땡이지 뭘.”
“음, 헌데 난 잠든 공주를 그러긴 싫단 말야. 반항하다가 할딱거리는 맛이 있어야지. 흐흥.”
“이따, 그건 그때 가서 또 조치를 하면 되지 뭘 그래.”
“음, 하긴 맛난 걸 먹으려면 목숨이라도 걸고 모험을 해야겠지.”
“그럼, 닳고 닳은 일반 양갈보가 아니라 붕장어같이 싱싱한 댄서인걸.”
“근데 니 좆이 독감에 걸렸으니 난 사실 좀 꺼림칙해.”
“그게 뭔 대단한 걱정이야. 정 겁나면 형이 먼저 꽂으면 되잖아.”
“하긴 뭐 아무튼 감쪽같이 끝내야 해. 그런데 그년은 왜 하필 빨강색을 그렇게 좋아한다니?”
“정열적이고 좋은데, 왜?”
“두어 가지 의미가 있지. 열정뿐만 아니라 피와 살인….”
“걱정 마. 벗겨 놓으면 하얀 알몸뚱이가 한결 요염할 테니까.”
청운은 귀를 곤두세웠다. 놈들이 공모해서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성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떤 여인을 해치거나 죽이는….
그때 주방장이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날카로운 회칼을 마치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권총을 돌리는 듯 휘리릭 내돌린 후 청운의 복부에 갖다 댔다.
“만약 좀전에 한마디라도 들은 말이 있다면 잊어버리고, 없다면 아예 상상하지도 마. 까딱 씨부렸다간 확 쑤셔 버릴 테니까.”
놈은 눈알을 부라리며 입술로만 히죽 웃었다. 청운은 한숨을 쉬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기도 녀석과 주방장 놈은 미군들에겐 슬슬 기면서도 클럽의 동족인 종업원이나 여자들에겐 은근히 위세를 떨었는데, 그건 그들이 지배인의 조종을 받는 똘마니 정보원이기 때문이었다.
작별의 멜로디
디스크자키의 영업 종료 방송에 이어 작별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기도 놈이 휘파람을 불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청운은 재빨리 청소를 하는 한편 신경을 곤두세워 주방 쪽에 주의를 집중했다. 빈 접시와 컵을 들고 가 작은 구멍으로 밀어넣으면서 슬쩍 주방 안쪽을 살펴보니 두 놈은 노란 양주를 마시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놈들이 뭔지 쑥덕거리며 홀로 나오더니 바람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청운은 하던 일을 놓아두곤 곧장 뒤쫒았다. 며칠 전에 들어온 상철이란 얘한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