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주년 기획 - 우리 30대는 지금…> ②벼랑 끝에 걸치다

뜻을 세우는 ‘이립’의 고민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과거에는 “조금 늦더라도 결국 자리 잡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때 한국 사회는 30대를 ‘성장의 시기’로 여겼다. 직장을 잡고, 가정을 꾸리고, 자산을 형성하며 삶을 안정시키는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의 30대는 다르다. 반복되는 취업 실패와 불안정한 노동, 치솟는 집값이 기본인 경쟁 사회 속에서 삶을 하나둘씩 포기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 내 집 마련은 물론 미래에 대한 기대감 자체를 내려놓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청년세대는 ‘3포세대’로 불렸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의미했다. 이후 포기하는 대상이 늘어나면서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 꿈과 희망까지 내려놓는다는 의미의 ‘N포세대’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벌어도 불안
놀아도 불안

그러나 최근 청년세대를 설명하는 분위기는 이보다 더 무겁다. 몇 가지를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와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새롭게 등장한 표현이 ‘사회적 로그아웃’이다. 극심한 경쟁과 취업난,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관계와 미래 계획을 하나씩 줄여나가다 결국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30대 청년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을까. 근본적인 문제는 단연 ‘취업’이다. 최근에는 이른바 ‘쉬었음 청년’을 둘러싼 논란이 사회적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방송인 장동민이 한 방송에서 “취업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청년들이 대기업 사무직만 원한다고 지적하면서다. 이에 대해 청년층 사이에서는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실제로 국가데이터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쉬었음’ 상태인 2030세대는 71만7000명으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원래 ‘쉬었음’은 통계상 비경제활동인구를 분류하기 위한 행정 용어였다.

그러나 최근 ‘쉬었음 청년’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낙인처럼 소비되기 시작했다. 일을 안 하는 청년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쉬었음’이라는 표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취업 관련 게시판에는 “이력서를 수백장 넣고도 떨어진 사람을 그냥 쉰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억울하다” “쉬는 게 아니라 버티는 중”이라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쉬었음’ 청년은 취업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는 게 아닌 버티는 중”
낙인찍힌 ‘쉬었음 청년’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2030세대 쉬었음 인구 가운데 83.4%는 과거 취업 경험이 있었다. 특히 절반 가까이는 최근 1년 안에도 일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구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 진입했다가 다시 밀려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청년층이 노동시장을 떠나는 이유 역시 단순하지 않다. 최근 1년 내 일을 그만둔 청년들의 주요 퇴직 사유로는 ‘작업 여건 불만족’ ‘임시·계절적 일 종료’ 등이 꼽혔다. 실제 청년층 사이에서는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 반복되는 야근과 조직문화 피로감 등이 누적되며 “버틸 수 없는 일자리”에 대한 거부감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현상을 개인 의지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취업 시장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지만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청년들은 끊임없이 스펙과 경험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층이 취업 시장에서 느끼는 좌절감의 가장 큰 배경에는 고용 시장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에는 취업이 늦어지더라도 결국 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첫 직장에 들어갈 기회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실제 청년층 사이에서는 “신입이 들어갈 자리가 사라졌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기업들이 경력직 중심 채용으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사회 초년생이 경력을 쌓을 첫 기회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침체와 비용 부담 속에서 기업들은 교육이 필요한 신입보다 즉시 실무에 투입이 가능한 인력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청년층이 취업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3포세대서
N포세대로

실제로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6년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의 고용률은 43.7%로 전년 동월 대비 1.6%포인트 하락했다. 청년 고용률은 24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0년대 후반 이후 가장 긴 감소 흐름이다. 청년 취업자 수 역시 감소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문제는 일자리 숫자가 줄어든 것만이 아니다. 청년층이 선호하던 전문직과 기술직 영역까지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최근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취업자는 11만5000명 급감하며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 연구개발과 엔지니어링, 전문기술 분야까지 위축됐다.

이는 인공지능(AI)의 영향도 크다. 최근 AI의 발전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불안도도 높아졌다. 실제로 많은 일자리가 AI로 대체되면서 “지금 준비하는 직무가 몇 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30대 직장인들 역시 고민이 크다. “AI 시대에도 내 직무가 살아남을까?” “지금의 선택이 10년 뒤에도 유효할까?” 같은 현실적인 고민들이다. 과거처럼 평생직장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는 의미다.

고용시장의 불안은 자연스럽게 청년층의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 ‘청년 삶의 질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층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5점에 그쳤다. OECD 국가 가운데 하위권 수준이다. 청년층 3명 중 1명은 정신적·육체적 탈진 상태인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번아웃의 가장 큰 원인은 ‘진로 불안’이었다.

특히 30대 초반은 청년층 가운데 일자리 만족도와 소득 만족도가 가장 낮은 집단으로 나타났다. 사회 진입 이후에도 안정감을 얻지 못한 채 끊임없는 불안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청년층 사이에서 반복되는 “열심히 살아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말 역시 이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경력직만 선호?
길 잃은 신입들

실제 최근 취업난을 겪고 있는 30대들 사이에서는 스스로를 ‘실패자’처럼 느낀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수년간 시험과 취업 준비를 반복하다 뒤늦게 노동시장에 진입하더라도 불안정 계약직이나 저임금 노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반복되는 실패 경험은 결국 청년들의 삶 전체를 바꾸고 있다. 30대의 삶은 취업 이후 결혼과 출산, 내 집 마련로 이어지는 게 마치 하나의 공식과 같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공식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됐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30대 미혼율은 53.4%로 집계됐다. 30대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다. 2000년 13.4% 수준이었던 30대 미혼율은 24년 만에 약 4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서울의 30대 미혼율은 62.8%로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남성의 경우 미혼 비율이 68.3%까지 올라갔다.

문제는 단순히 결혼 시기가 늦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비율 자체가 낮아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 ‘인구동태패널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32세 미혼 남성 가운데 3년 뒤 결혼한 비율은 15.5%에 불과했다. 불과 몇 년 전 같은 연령대에서 나타났던 비율보다 크게 낮아진 수치다.

여성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청년층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혼인률은 자산 수준이나 안정적인 직장과 연관이 있었다. 실제 최근 혼인 증가세를 살펴보면 특정 계층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혼인 건수는 일부 반등했지만, 증가를 주도한 건 대졸 이상 고학력층과 사무직 종사자였다. 반면 저소득·저학력 계층에서는 결혼 의향 자체가 낮게 나타났다. 부모 지원 여부와 안정적인 직장, 자산 수준에 따라 결혼 가능성이 갈리는 ‘결혼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취업난·불안정 노동에 결혼도 포기
30대 미혼율 24년 만에 4배나 증가

청년층 역시 결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으로 ‘소득’과 ‘주거비 부담’을 꼽는다. 실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조사에서도 청년들이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안정적인 소득이었다. 반대로 월평균 소득이 낮은 청년층에서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특히 수도권 청년층의 부담은 더 크다. 높은 집값과 전세 대출 부담 속에서 결혼과 출산은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 청년은 “혼자 살아도 버거운데 둘이 어떻게 사느냐는 생각이 먼저 든다”며 “결혼은 하고 싶고 아이도 좋아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1인 가구 증가 역시 이런 흐름과 맞물린다. 지난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6.1%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30대 비중도 빠르게 늘고 있다.

혼자 사는 삶이 일시적 과도기가 아니라 하나의 일반적인 생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조사에서는 청년 1인 가구 상당수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과거처럼 “언젠가는 결혼하겠지”라는 인식 자체가 약해지고 있는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청년층이 점점 더 사회적 고립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지고 관계 유지 비용까지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인간관계 역시 축소되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서도 1인가구의 인간관계 만족도는 전체 평균보다 낮게 나타났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더 심화됐다. “힘들 때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응답도 증가했다.

취업난과 고용 불안, 관계 단절이 장기화되면서 청년층 정신 건강 역시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30대 자살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지난해 기준 청년층 극단적 선택 비율은 인구 10만명당 24.4명으로 집계됐다. 연령별로는 30~34세가 가장 높았다. 청년층 내에서도 30대 초반은 2009년 이후 줄곧 20대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취업난과 장기 구직, 불안정 노동이 누적되며 우울과 번아웃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혼율 역대급
자살률 최고치

해당 문제는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청년층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안정적인 노동 환경과 주거, 사회적 안전망이 함께 구축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렵다. 정부 역시 최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나라에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국가적 수치”라며 극단적 문제를 개인 책임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imshar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달라진 청년 문화

“술 안 마셔요”

최근 청년 세대는 인간관계와 소비, 여가 방식 전반에서도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음주 문화 변화다. 과거 청춘과 회식, 인간관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술 문화가 빠르게 약화하면서 주류업계 전체가 구조적 위기를 호소할 정도다.

실제 최근 몇 년 사이 MZ세대를 중심으로 ‘소버 라이프(Sober Life)’와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술에 취하는 대신 맨정신의 컨디션과 건강, 자기 관리를 중시하는 흐름이다.

예전에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각자 편한 만큼만 마시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대학가에서도 술자리 대신 보드게임 카페나 일반 카페에서 모임을 갖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실제 통계도 이를 보여준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주류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20대의 음주 빈도와 음주량은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월평균 음주 빈도와 하루 평균 음주량 모두 감소세다.

주류 소비 감소는 업계 실적으로도 직격탄이 되고 있다. 롯데칠성음료와 하이트진로 등 주요 주류 기업들은 최근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특히 맥주 판매량 감소 폭이 크다. 일부 기업은 분기 적자까지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경기침체만이 원인이 아니라 “술 자체를 덜 마시는 구조적 변화”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실제 전국 주점 수 역시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회식 문화가 약해진 데다 고물가까지 겹치면서 술집 폐업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가 상권 역시 과거 같은 활기를 찾기 어려워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주류업계는 생존 전략 자체를 바꾸고 있다. 기존처럼 “많이 마시는 술” 대신 “가볍게 즐기는 술”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저도주, 제로슈거, 무알코올 제품이 잇따라 출시되는 이유다.

대표적으로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계속 낮아지고 있다. 과거 20도 안팎이 일반적이던 소주는 이제 15도대 제품까지 등장했다. 과일향 리큐르와 RTD(즉석음용주류), 논알코올 맥주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이는 주류 소비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과거처럼 집단 속에서 취하기 위한 음주보다 “내 취향에 맞게 가볍게 즐기는 소비”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청년층 소비 패턴 변화는 다른 산업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술 소비는 줄어드는 반면 운동·러닝·헬스·식단 관리·독서·뷰티 등 이른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실제 헬스장과 스포츠웨어, 건강식품, 뷰티 시장은 최근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청년층 사이에서는 “자기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청년 세대 가치관 변화로 해석한다. 미래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건강과 자기 관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됐다는 것이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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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