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주년 기획 - 우리 30대는 지금…> ①1996년·2026년 그들이 사는 법

시대는 달라도 걷는 길은 하나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1991년생 성호씨(가명)가 직장을 그만둔 시기, 그와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 1961년생 은상씨(가명)는 오래 해오던 일에서 은퇴 시점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유럽 섬나라 한 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부자가 함께 이국땅에서 보낸 스물한 개 밤사이. 30년, 한 세대 차는 좁혀졌을까?

아들 성호씨는 4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막 나와 방황하던 시기였다. 한동안 “조직이 잘되면 나도 잘되는” 것이라 여기며 몸과 마음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조직과 사람에게 걸던 기대를 놓게 됐다. 그는 “동력 엔진이 꺼져버렸다”고 표현했다.

60년대생
평생직장

아버지 은상씨는 젊어서부터 영업 일을 해왔다. 지방 출장이 잦아 집을 며칠씩 비우는 일이 왕왕 있었다. 성호씨는 어렸을 때 젊은 아버지가 무슨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일하는 아버지를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듯하다고 했다.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부자는 여행을 떠났다. 성호씨는 몇 번인가 이미 여행한 곳이었기에 익숙한 그 섬에 아버지와 가고 싶었다. 여행하면서 부자는 여행지에도, 날씨에도, 서로에게도 더 익숙해질 수 있었다.

1961년, 소련(현 러시아)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에서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군정이 시작됐다. 아버지 은상씨는 그해에 태어났다. 1950년 6‧25 전쟁을 마무리한 이후 국가 재건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은상씨는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옷핀으로 찔러 달고 국민학교에 갔다. 손수건은 콧물을 닦는 용도였다. 각이 진 가방을 둘러메고서였다. 두 개 버클이 달렸고, 만화 주인공 그림이 붙어 있었다. 가방이 없는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춤에 차기도 했다.

고무신을 신고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내달려 등교했다. 겨울이면 석탄과 솔방울을 넣어 난로를 땠다. 조개탄이나 땔나무를 쓰는 학교도 있었다. 난로 위에는 반 아이들 도시락을 포개 얹었다. 덕분에 전자레인지와 보온도시락이 없어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골목마다 친구들이 한가득했다. 1970년대에는 국민학교 입학생 수가 90만명대 후반이 기본이고, 100만명을 넘기기도 했으니까. 누구와도 이웃이 될 수 있고, 아무하고라도 놀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있는 냇가에 나가 멱을 감기도 했고, 흙바닥에 도형을 그려 넣고 ‘비석 치기’도 했다. 반공 만화책과 소년 잡지가 책상 서랍에서 뒹굴었고, 다 읽고 나면 훌륭한 딱지 재료가 됐다. 딱지와 구슬은 주머니와 책가방에 늘 있었다.

1980년대, 대학 진학률은 10%대 초반이었으니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갔다면 반정부 시위를 했을 확률이 높았다. 졸업 때 원서만 넣으면 취직할 수 있던 황금기였다. 20대가 된 은상씨는 영업 일을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은상씨 또래들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은상씨가 태어난 해로부터 31년이 지난 1991년. 냉전이 완전히 끝나고 소련이 붕괴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했다. 지방선거로 기초의회 의원을 뽑았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해에 은상씨는 아들 성호씨를 봤다.

아버지 30대 때 IMF 사태 발발
아들 30대 때 코스피 7800 입성

1990년대를 휩쓸던 이들은 386세대로도 불렸다. 30대 나이, 80번대 학번, 1960년대생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은상씨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 시기 386급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생긴 조어였다. 이들 세대 명칭은 10년 단위로 486, 586으로 업그레이드됐다.

30대 후반이 된 은상씨가 일에 익숙해질 즈음이던 1997년.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이 급감했다. IMF에 20억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했던, 이른바 IMF 사태다. 크고 작은 기업이 줄도산해 망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직장인이 실직자가 됐다.

2000년대, 10대가 된 성호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일로 자주 집을 비웠다. 성호씨는 그 시절 아버지를 “밖에서 일하고, 힘든 건 혼자 감당하고, 집에서는 내색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곧 가장이고, 가장의 일은 스스로 버텨내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성호씨는 “아버지 세대는 30대일 때, ‘어른이 돼야 한다고 하니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일을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무얼 좋아하는지 깊이 고민하는 대신 주어진 일을 해내는 분위기가 강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맡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버틴 듯하다는 얘기였다.

성호씨는 아버지의 30대를 “기혼, 유자녀, 자가, 안정적인 직장이 꽤 당연한 기준처럼 여겨지던 세대”였으리라 짐작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고 감당하기 위해 말 못 하고 묵묵히 견뎌야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마 성호씨를 비롯한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잡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테다. 그때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듯.

초등학교에 입학한 성호씨 또래는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들이 남긴 말들이 반복됐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휴거’를 빌미로 교인을 끌어모았다. 그해 12월31일, 사람들은 정말 세계가 멸망할지 궁금해했다.

놀랍게도 다음 날에도 평소와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다만 21세기에 진입했을 뿐이었다.

그 시기 성호씨는 초등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타자 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은 디스크를 컴퓨터 본체에 넣어 간단한 게임도 했다. 컴퓨터 기술은 급진전했다. 성호씨 또래는 윈도우95도 사용했다. 급식이 시작된 학교도 있었다. 도시락을 싸더라도 보온 용기에 담을 수 있었다. 기름으로 때는 난로 위에는 도시락 대신 주전자가 올라갔다.

90년대생
환승 이직

성호씨는 1981년부터 1996년까지 태어난 이들을 묶는, 밀레니얼세대에 포함된다. 따라서 Z세대와 함께 MZ세대에도 포함된다. MZ세대는 아직까지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대로 회자되고 있다. 오죽하면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서점에서 <90년생이 온다>라는 제목을 단 책이 불티나게 팔렸겠는가.

10년이 더 흘러 2010년대, 은상씨는 50대가 됐다. 2007년에 아이폰이 보급되며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은상씨는 회사에서는 높은 직급으로 승진했다. 20대 때 컴퓨터를 배울 기회가 있었기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업무에 활용할 수 있었다.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20대가 된 성호씨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만 가도 취직은 떼어놓은 당상이던 시절도 있다던데, 성호씨 세대는 거기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토익 점수와 학점을 높이고, 가능한 한 빠르게 취직하려고 노력했을 테다.

은상씨가 보기에 아들 세대는 출발선부터가 다른 듯하다고 했다. 은상씨가 20대일 때는 삶의 방향이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난 상태였지만, 성호씨 세대에게는 “결혼도, 직장도, 사는 방식도 예전처럼 하나의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성호씨 세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계속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봤다.

은상씨는 “선택지가 많은 건 분명한데, 그만큼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계속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우리 때는 길이 좁아도 따라가면 됐다. 지금은 길은 많아졌지만,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를 더 어려워하는 듯하다”고도 했다.

50대 아버지는 아들을 독립시키고, 자신은 은퇴 준비를 해야 했다. 20대 아들은 진로를 결정해 일을 찾고,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새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해야 했다.

은상씨가 살아온 60년과 성호씨가 살아온 30년을 따라 걸어, 이윽고 2020년대에 당도했다. 성호씨는 결혼해 독립했다. 아내는 있지만 아이는 없다. 일하면서 버티던 것들이 기억력이 나빠지는 등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아웃이었다. 퇴사를 결심했다.

은상씨는 이런 아들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선뜻 승낙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테다.

386세대
MZ세대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달랐다. 아버지는 섬 역사를 공부했고, 아들은 동영상 촬영 장비를 꼼꼼히 챙겼다. 섬 날씨는 자주 흐렸고, 그래서 부자는 자주 쉬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낙심한 적은 별로 없었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얼마나 떨어져 있어도 밤이면 두 사람은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트레킹하며 정상에 올랐을 때 산 아래에서 안개가 빠른 속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험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성호씨는 아버지와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근처에 있던 외국인 여행자에게도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아들은 아버지를 말렸다.

성호씨는 그 순간을 이렇게 얘기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감각, 그건 예전 세대가 가진 이웃 간의 정일 테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괜한 간섭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생겼다. 우리는 현지인도 아니고 그의 체력이나 컨디션을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돕다가 오히려 불편함이 생기는 상황에 대한 불안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지나오며 사회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여행하며 세대 차이를 느낀 적도 있었을까. 성호씨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렇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한 시간씩 산책을 다녀오시곤 했는데, 한번은 두 시간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고 보니 핸드폰을 두고 나가서 숙소를 못 찾은 거였다.

“아버지는 워낙 호기심이 많으셔서 여행하며 이곳저곳 돌아다니셨다. 동네가 복잡해 길을 잃으시기도 했다. 집 앞 편의점에 가면서도 핸드폰과 이어폰을 챙기는 우리 세대와 달랐다.”

성호씨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웃음이 나기도 하고 묘하게 든든하기도 했다고. “내비 없이 종이 지도로 지방 맛집을 찾아다니던 생존력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밥을 먹으며 성호씨가 은상씨에게 “나, 앞으로 잘할 수 있겠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은상씨는 “진인사대천명”이라며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오래도록 유지됐던 직업이 사라지고, 또 예전에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직업이 수도 없이 생기는 시대, 그래서 자꾸만 이직하는 1990년대생에게 은상씨의 대답은 어떻게 들릴까.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출장 등 일하면서 아버지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로 나누다 보니,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해진 길 묵묵히 걷던 1960년대생
여러 갈래 길 고민하는 1990년대생

성호씨는 아버지와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아버지를 너무 당연하게 여긴 듯해 조금 죄송하다.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와 소소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 새삼 깨달았다”고도 했다.

“한동안 사회가 말하는 정답을 따라갔다. 대학, 취업, 안정적인 직장…. 그러다 퇴사하고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더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보통’이라고 말하는 기준에서 벗어날 용기도 없었다.” 30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호씨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기 전 인생에서 큰 고비 하나를 겪었다.

바로 진로에 대한 고민과 결정이다.

“지금 30대는 아버지 때와는 조금 다르다. 결혼도, 출산도, 집도, 직장도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사실상 포기에 가깝다. 내 선택이 정말 내 삶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는 건지 계속 묻게 된다. 아버지 세대가 ‘믿음을 가지고 계속 해보려는’ 마음이었다면, 지금 나는 ‘해봐도 잘 모르겠다’ 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성호씨 태도는 응당 1990년대생이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불안에 가까웠다.

성호씨는 여행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다. “아버지를 볼 때 복합적인 감정이 생긴다. 존경스럽고, 감사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하다. 다행히 여행에서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존경과 안도감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를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나는 그 시간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온 성호씨는 AI가 기존 업무를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의 영역이라 믿어온 일들이 조금씩 AI로 대체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처음엔 그저 기술이 발전했으려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일을 바라보는 관념이 흔들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호씨는 아버지 세대가 믿어온 일의 방식과 지금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일의 방식, 더 나아가 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관 사이에 꽤 큰 간격이 생겼음을 실감한다.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냐는 질문에는 당황했다. 그러면서 “변화가 많아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중심에 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 보려 한다”고 답했다.

진인사대천명
집중하는 태도

“고민 속에서 붙잡게 된 말이 바로 아버지에게 들은 ‘진인사대천명’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받아들이는 것. 그게 내가 찾은 나름의 답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성호씨는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함께 걸어나갈 것이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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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