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1991년생 성호씨(가명)가 직장을 그만둔 시기, 그와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 1961년생 은상씨(가명)는 오래 해오던 일에서 은퇴 시점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유럽 섬나라 한 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부자가 함께 이국땅에서 보낸 스물한 개 밤사이. 30년, 한 세대 차는 좁혀졌을까?
아들 성호씨는 4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막 나와 방황하던 시기였다. 한동안 “조직이 잘되면 나도 잘되는” 것이라 여기며 몸과 마음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조직과 사람에게 걸던 기대를 놓게 됐다. 그는 “동력 엔진이 꺼져버렸다”고 표현했다.
60년대생
평생직장
아버지 은상씨는 젊어서부터 영업 일을 해왔다. 지방 출장이 잦아 집을 며칠씩 비우는 일이 왕왕 있었다. 성호씨는 어렸을 때 젊은 아버지가 무슨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일하는 아버지를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듯하다고 했다.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부자는 여행을 떠났다. 성호씨는 몇 번인가 이미 여행한 곳이었기에 익숙한 그 섬에 아버지와 가고 싶었다. 여행하면서 부자는 여행지에도, 날씨에도, 서로에게도 더 익숙해질 수 있었다.
1961년, 소련(현 러시아)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에서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군정이 시작됐다. 아버지 은상씨는 그해에 태어났다. 1950년 6‧25 전쟁을 마무리한 이후 국가 재건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은상씨는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옷핀으로 찔러 달고 국민학교에 갔다. 손수건은 콧물을 닦는 용도였다. 각이 진 가방을 둘러메고서였다. 두 개 버클이 달렸고, 만화 주인공 그림이 붙어 있었다. 가방이 없는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춤에 차기도 했다.
고무신을 신고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내달려 등교했다. 겨울이면 석탄과 솔방울을 넣어 난로를 땠다. 조개탄이나 땔나무를 쓰는 학교도 있었다. 난로 위에는 반 아이들 도시락을 포개 얹었다. 덕분에 전자레인지와 보온도시락이 없어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골목마다 친구들이 한가득했다. 1970년대에는 국민학교 입학생 수가 90만명대 후반이 기본이고, 100만명을 넘기기도 했으니까. 누구와도 이웃이 될 수 있고, 아무하고라도 놀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있는 냇가에 나가 멱을 감기도 했고, 흙바닥에 도형을 그려 넣고 ‘비석 치기’도 했다. 반공 만화책과 소년 잡지가 책상 서랍에서 뒹굴었고, 다 읽고 나면 훌륭한 딱지 재료가 됐다. 딱지와 구슬은 주머니와 책가방에 늘 있었다.
1980년대, 대학 진학률은 10%대 초반이었으니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갔다면 반정부 시위를 했을 확률이 높았다. 졸업 때 원서만 넣으면 취직할 수 있던 황금기였다. 20대가 된 은상씨는 영업 일을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은상씨 또래들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은상씨가 태어난 해로부터 31년이 지난 1991년. 냉전이 완전히 끝나고 소련이 붕괴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중단됐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했다. 지방선거로 기초의회 의원을 뽑았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해에 은상씨는 아들 성호씨를 봤다.
아버지 30대 때 IMF 사태 발발
아들 30대 때 코스피 7800 입성
1990년대를 휩쓸던 이들은 386세대로도 불렸다. 30대 나이, 80번대 학번, 1960년대생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은상씨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 시기 386급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생긴 조어였다. 이들 세대 명칭은 10년 단위로 486, 586으로 업그레이드됐다.
30대 후반이 된 은상씨가 일에 익숙해질 즈음이던 1997년.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이 급감했다. IMF에 20억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했던, 이른바 IMF 사태다. 크고 작은 기업이 줄도산해 망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직장인이 실직자가 됐다.
2000년대, 10대가 된 성호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일로 자주 집을 비웠다. 성호씨는 그 시절 아버지를 “밖에서 일하고, 힘든 건 혼자 감당하고, 집에서는 내색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곧 가장이고, 가장의 일은 스스로 버텨내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성호씨는 “아버지 세대는 30대일 때, ‘어른이 돼야 한다고 하니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일을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무얼 좋아하는지 깊이 고민하는 대신 주어진 일을 해내는 분위기가 강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맡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버틴 듯하다는 얘기였다.
성호씨는 아버지의 30대를 “기혼, 유자녀, 자가, 안정적인 직장이 꽤 당연한 기준처럼 여겨지던 세대”였으리라 짐작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고 감당하기 위해 말 못 하고 묵묵히 견뎌야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마 성호씨를 비롯한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잡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테다. 그때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듯.
초등학교에 입학한 성호씨 또래는 2000년이 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들이 남긴 말들이 반복됐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휴거’를 빌미로 교인을 끌어모았다. 그해 12월31일, 사람들은 정말 세계가 멸망할지 궁금해했다.
놀랍게도 다음 날에도 평소와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다만 21세기에 진입했을 뿐이었다.
그 시기 성호씨는 초등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타자 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은 디스크를 컴퓨터 본체에 넣어 간단한 게임도 했다. 컴퓨터 기술은 급진전했다. 성호씨 또래는 윈도우95도 사용했다. 급식이 시작된 학교도 있었다. 도시락을 싸더라도 보온 용기에 담을 수 있었다. 기름으로 때는 난로 위에는 도시락 대신 주전자가 올라갔다.
90년대생
환승 이직
성호씨는 1981년부터 1996년까지 태어난 이들을 묶는, 밀레니얼세대에 포함된다. 따라서 Z세대와 함께 MZ세대에도 포함된다. MZ세대는 아직까지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대로 회자되고 있다. 오죽하면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서점에서 <90년생이 온다>라는 제목을 단 책이 불티나게 팔렸겠는가.
10년이 더 흘러 2010년대, 은상씨는 50대가 됐다. 2007년에 아이폰이 보급되며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은상씨는 회사에서는 높은 직급으로 승진했다. 20대 때 컴퓨터를 배울 기회가 있었기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업무에 활용할 수 있었다.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20대가 된 성호씨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만 가도 취직은 떼어놓은 당상이던 시절도 있다던데, 성호씨 세대는 거기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토익 점수와 학점을 높이고, 가능한 한 빠르게 취직하려고 노력했을 테다.
은상씨가 보기에 아들 세대는 출발선부터가 다른 듯하다고 했다. 은상씨가 20대일 때는 삶의 방향이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난 상태였지만, 성호씨 세대에게는 “결혼도, 직장도, 사는 방식도 예전처럼 하나의 방식으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성호씨 세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계속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봤다.
은상씨는 “선택지가 많은 건 분명한데, 그만큼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계속 판단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우리 때는 길이 좁아도 따라가면 됐다. 지금은 길은 많아졌지만,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를 더 어려워하는 듯하다”고도 했다.
50대 아버지는 아들을 독립시키고, 자신은 은퇴 준비를 해야 했다. 20대 아들은 진로를 결정해 일을 찾고,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새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해야 했다.
은상씨가 살아온 60년과 성호씨가 살아온 30년을 따라 걸어, 이윽고 2020년대에 당도했다. 성호씨는 결혼해 독립했다. 아내는 있지만 아이는 없다. 일하면서 버티던 것들이 기억력이 나빠지는 등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아웃이었다. 퇴사를 결심했다.
은상씨는 이런 아들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선뜻 승낙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테다.
386세대
MZ세대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달랐다. 아버지는 섬 역사를 공부했고, 아들은 동영상 촬영 장비를 꼼꼼히 챙겼다. 섬 날씨는 자주 흐렸고, 그래서 부자는 자주 쉬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낙심한 적은 별로 없었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얼마나 떨어져 있어도 밤이면 두 사람은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트레킹하며 정상에 올랐을 때 산 아래에서 안개가 빠른 속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험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성호씨는 아버지와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근처에 있던 외국인 여행자에게도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아들은 아버지를 말렸다.
성호씨는 그 순간을 이렇게 얘기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감각, 그건 예전 세대가 가진 이웃 간의 정일 테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괜한 간섭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생겼다. 우리는 현지인도 아니고 그의 체력이나 컨디션을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돕다가 오히려 불편함이 생기는 상황에 대한 불안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지나오며 사회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여행하며 세대 차이를 느낀 적도 있었을까. 성호씨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렇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한 시간씩 산책을 다녀오시곤 했는데, 한번은 두 시간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고 보니 핸드폰을 두고 나가서 숙소를 못 찾은 거였다.
“아버지는 워낙 호기심이 많으셔서 여행하며 이곳저곳 돌아다니셨다. 동네가 복잡해 길을 잃으시기도 했다. 집 앞 편의점에 가면서도 핸드폰과 이어폰을 챙기는 우리 세대와 달랐다.”
성호씨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웃음이 나기도 하고 묘하게 든든하기도 했다고. “내비 없이 종이 지도로 지방 맛집을 찾아다니던 생존력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밥을 먹으며 성호씨가 은상씨에게 “나, 앞으로 잘할 수 있겠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은상씨는 “진인사대천명”이라며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오래도록 유지됐던 직업이 사라지고, 또 예전에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직업이 수도 없이 생기는 시대, 그래서 자꾸만 이직하는 1990년대생에게 은상씨의 대답은 어떻게 들릴까.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출장 등 일하면서 아버지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로 나누다 보니,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해진 길 묵묵히 걷던 1960년대생
여러 갈래 길 고민하는 1990년대생
성호씨는 아버지와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아버지를 너무 당연하게 여긴 듯해 조금 죄송하다.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와 소소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 새삼 깨달았다”고도 했다.
“한동안 사회가 말하는 정답을 따라갔다. 대학, 취업, 안정적인 직장…. 그러다 퇴사하고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더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보통’이라고 말하는 기준에서 벗어날 용기도 없었다.” 30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호씨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기 전 인생에서 큰 고비 하나를 겪었다.
바로 진로에 대한 고민과 결정이다.
“지금 30대는 아버지 때와는 조금 다르다. 결혼도, 출산도, 집도, 직장도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사실상 포기에 가깝다. 내 선택이 정말 내 삶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는 건지 계속 묻게 된다. 아버지 세대가 ‘믿음을 가지고 계속 해보려는’ 마음이었다면, 지금 나는 ‘해봐도 잘 모르겠다’ 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성호씨 태도는 응당 1990년대생이 가지고 있을 거라 여겼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불안에 가까웠다.
성호씨는 여행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다. “아버지를 볼 때 복합적인 감정이 생긴다. 존경스럽고, 감사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하다. 다행히 여행에서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존경과 안도감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를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나는 그 시간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온 성호씨는 AI가 기존 업무를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의 영역이라 믿어온 일들이 조금씩 AI로 대체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처음엔 그저 기술이 발전했으려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일을 바라보는 관념이 흔들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호씨는 아버지 세대가 믿어온 일의 방식과 지금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일의 방식, 더 나아가 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관 사이에 꽤 큰 간격이 생겼음을 실감한다.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냐는 질문에는 당황했다. 그러면서 “변화가 많아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중심에 두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 보려 한다”고 답했다.
진인사대천명
집중하는 태도
“고민 속에서 붙잡게 된 말이 바로 아버지에게 들은 ‘진인사대천명’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받아들이는 것. 그게 내가 찾은 나름의 답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성호씨는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함께 걸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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