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6·3 지방선거 유세가 한창 열기를 뿜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세 현장에 등장했다. 지지자들은 “보수의 상징이 돌아왔다”고 환호했지만, 많은 시민들에게 그 장면은 환호보다는 피로와 불안을 안기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극적 결말의 당사자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단순한 개인 행보를 넘어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역사적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탄핵은 특정 진영의 정치적 공격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인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심각하게 훼손됐고, 국민은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 권력을 견제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아픈 상처이자 동시에 시민의 힘을 보여준 역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탄핵의 책임 당사자가 다시 선거 유세 현장에 등장해 특정 정당과 후보를 지원하는 모습은, 국민적 반성과 역사적 성찰이 과연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문을 남긴다.
더 큰 문제는 보수 정치가 여전히 미래 비전보다 과거 인물 의존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지방선거는 지역 발전과 생활 행정을 논의하는 자리다. 교통, 주거, 복지, 산업, 청년 정책 같은 현실 문제가 중심이 돼야 한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선거 프레임은 또다시 진영 대결과 감정 정치로 흘러가고 있다. 후보의 정책 능력보다 ‘친박’(친 박근혜) 여부가 관심을 받고, 지역 현안보다 과거 탄핵 서사가 반복된다. 이는 유권자 수준을 과거의 향수 정치에 묶어두겠다는 심산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박 전 대통령 개인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정치 지도자는 퇴장 이후에도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보여야 한다.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처럼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적 혼란을 초래한 지도자가 은퇴 후 자숙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는 실패한 권력조차 끊임없이 상징 소비의 대상이 된다. 정치권 역시 이를 적극 활용한다. 이는 정치가 정책 경쟁이 아니라 팬덤과 감정 동원 중심으로 변질됐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성훈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의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결단”이라는 공식 입장 발표는 이 같은 해석에 힘을 싣는다. 박 단장은 “국민의힘에 투표해 달라는 메시지”라며 “박 전 대통령은 이번에 보수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 지지층은 박 전 대통령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법적 판단과 헌정 질서를 부정한 채 피해자 서사를 반복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정치 지도자라고 해서 법 위에 존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평가받아서도 곤란하다.
만약 탄핵과 국정 농단의 역사적 의미를 흐리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어떤 권력자도 책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망각 위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을 기억하고 제도를 개선할 때 발전한다.
단발성 1회 유세가 아닌 다수로 예정돼있는 것도 짚어볼 문제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칠성시장(지난 23일), 충남 공주 산성시장 및 충북 옥천, 이장우 대전시장 후보 선거사무소(지난 25일)를 방문했으며, 부산 기장시장(오는 27일 예정), 원주중앙시장 및 횡성로터리 굉장(오는 28일) 등 주요 격전지를 찾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쯤되자 일부 매체에선 ‘사실상 지방선거의 국민의힘 선대위원장’이라는 보도까지 등장했다.
앞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역풍을 맞아 어려웠던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선전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선 피습했으나 ‘강한 이미지’가 부각돼 압승을 거뒀다. 이후 2010년 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 보수 진영이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2012년 총선 및 대선에서도 실질적으로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하면서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던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같은 해 대선에서도 당선을 확정지으며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지방선거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과거 대통령의 깜짝 등장 이벤트가 아니다. 지금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너지는 지역경제를 어떻게 살릴지, 지방의 청년 유출을 어떻게 막을지, 고령화와 복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실질적 해법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여전히 강한 상징과 팬덤 동원에 의존한다. 이는 유권자를 정책 소비자가 아니라 감정 소비자로 취급하는 태도다.
박 전 대통령의 유세는 단순한 개인 정치 활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아직도 과거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책임 정치보다 진영 정치가 우선하고 있다는 현실의 단면이다. 탄핵이라는 헌정사의 중대한 사건을 경험하고도 정치 문화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같은 위기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는 결국 미래를 향해야 한다. 과거의 상처를 끊임없이 선거 자산으로 소비하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국민은 또다시 분열과 피로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특정 인물의 귀환에 환호할 것이 아니라, 왜 한국 정치가 여전히 과거 권력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냉정하게 질문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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