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수평선을 넘고 사방이 어둑해지면, 뱃길을 가리키는 등대의 불빛이 어김없이 밝아진다. 육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어둠을 가르며 방향을 알려주는 이 빛은 선박들을 안전하게 이끄는 나침반이다.
하지만 매일 밤 당연한 듯 켜지는 이 불빛 이면에는 고립을 견뎌내는 누군가의 노동이 자리하고 있다. 가족의 위급한 병환이나 애틋한 경조사 소식에도 기상 악화로 뱃길이 끊기면 꼼짝없이 섬에 머물며 묵묵히 장비를 점검하고 기기를 관리해야 하는 이들.
뱃길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육지와의 단절을 감내하는 전문 직업인, 바로 항로표지관리원이다. 하루 두 번 몽돌해변의 바닷길이 열려야만 닿을 수 있는 남해안의 절경, 경남 통영 ‘소매물도 등대섬’은 이들의 땀방울이 진하게 밴 현장이다. 거친 남해의 해상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뱃길의 길목을 지켜내는 관리원들의 일상이 바로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사라진 이름 ‘등대지기’
세간에서는 육지와 격리된 섬에서 등대를 관리하는 이를 흔히 ‘등대지기’라 부르며 고독과 낭만의 대명사로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 명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기’라는 단어에 과거 단순 노무직을 일컫거나 특정 직업군을 낮잡아 부르는 뉘앙스가 배어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항로표지관리원’이 이들의 정확한 공식 명칭이다. 과거 등대관리직으로 분류되던 이들은 2023년 8월 해양교통시설직으로 직렬이 통합되며 그 전문성을 더욱 확고히 인정받았다. 마산지방해양수산청 소속 관리원들은 단순히 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인 등대 상주 근무, 점검선을 이용한 무인 표지 관리, 그리고 육상에서의 행정 실무를 2년 주기로 순환하며 종합적인 해상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
기술이 발전해 장비가 현대화됐지만, 거친 해상 환경에서 무인 자동화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기는 어렵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섬에서는 낙뢰와 태풍 등 예측 불가능한 기상 악화가 일상이며, 염분을 짙게 머금은 해풍으로 기계에 크고 작은 고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상 조치에 나서야 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몫이다. 아무리 최첨단 기기라 할지라도 등대가 빛을 잃지 않으려면 매일같이 시설을 점검하고 보수하는 이들의 땀방울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섬에서의 교대 근무와 책임감
소매물도 항로표지관리소 근무는 최정호 소장과 신중현·이찬기 주임의 교대제로 유지된다. 유인등대에는 총 3명의 항로표지관리원이 배정돼 섬 안의 관사에서 생활한다. 2명이 주말이나 휴일 없이 12시간씩 맞교대를 서는 동안 남은 1명이 육지로 나가 휴식을 취하는 방식이다. 마산지방해양수산청 관할 유인 표지의 경우, 10일을 연속으로 현장에서 묵고 나서야 5일의 휴무가 주어지는 일정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이 촘촘한 순환 일정은 바다의 변덕 앞에 종종 무력해진다. 풍랑주의보 등 기상 악화로 뱃길이 끊기면 가족의 위급한 병환이나 경조사에도 섬에 갇혀 발만 구를 수밖에 없다. 열흘 남짓 지낼 식량과 생필품 일체를 근무자가 직접 배에 싣고 들어가 매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수고로움 역시 이들이 온전히 짊어져야 할 현실적인 고충이다.
최근 온라인상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등대 근무가 '직장 상사 스트레스 없이 적막한 곳에서 조용히 일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밈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현장의 현실은 이런 환상과 거리가 멀다. 일상적인 고립감과 무기력증을 견뎌야 하는 것은 물론, 빗물을 모아 정수해 써야 하는 열악한 환경 탓에 피부 질환을 앓는 일도 허다하다.
특히 소매물도처럼 개방형 해양문화공간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고충이 배가된다. 하루 세 번씩 관광객 전용 야외 화장실을 청소하고 버려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일부터, 무성하게 자란 잔디를 깎고 바닷길 물때나 배편을 묻는 민원 전화 응대까지 모두 관리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시설 유지보수라는 본연의 임무에 과중한 부가 업무가 더해지고 신규 공무원의 낮은 보수 체계가 맞물리다 보니, 여유로운 근무 환경을 기대하고 입사했던 젊은 직원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섬을 떠나는 일이 잦다.
바다의 이정표를 지키다
첨단 위성항법장치(GPS)와 레이더가 보편화된 시대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교차 검증은 여전히 안전 항해의 기본 원칙이다. 기상 악화나 전파 교란, 예기치 못한 시스템 오류 등으로 전자 기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위급 상황은 대형 선박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첨단 장비가 먹통이 된 절박한 순간, 선원들이 방향을 확인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바로 등대다. 최신 내비게이션 시대에도 도로 위에 직관적인 이정표가 필수적이듯, 등대는 변수 많은 바다 위에서 가장 확실한 이정표인 셈이다.
현장의 관리원들은 등대 불빛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어민들을 만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뭍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항로표지관리원들이 수행하는 일상적인 노동은, 어두운 바다를 건너 귀항하는 이들을 무사히 뭍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소매물도의 밤바다를 밝히는 빛은 이들의 헌신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를 비추며 제 자리를 지킨다.
일요시사=천재율 기자(1000jae@ilyosis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