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용산은 원래 한이 많은 땅이었다.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채 민족의 혈맥인 듯 눈물인 듯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가까이 바라보며 희비애락을 함께 한 긴 세월…용산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 가치가 높았으므로 한반도가 외적에 침략당할 때면 늘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차압되었다.
암부처럼
고려시대 말엽엔 몽골군에 의해 병참기지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 후기에 나라가 어지럽던 땐 중국 청나라 군이 대규모로 주둔했으며, 한일 병합 뒤론 일본군이 전격적으로 주둔해 와 온 나라를 마구 유린했다.
그리고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고 쫓겨나자마자 곧장 미국 군대가 들어와 진을 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소불위적으로 위세를 떨치며 기지를 점점 확대해 나갔다.
주한미군은 좁은 남한 땅 전지역에 걸쳐 무려 100여 곳의 기지를 갖고 있다. 전국토의 요소마다 주한미군이 있는 셈이다.
서울 외에 동두천, 의정부 뺏벌, 파주 용주골, 인천 부평, 평택, 군산 아메리카 타운 등이 잘 알려진 곳이지만 각 지방에서도 미군은 노른자위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부산의 하야리아 부대, 대구의 병참기지, 강원도 춘천, 원주, 영월, 충청도 대전, 천안, 경북 왜관, 경남 진해, 마산, 김해, 전남 광주뿐만 아니라 제주도 모슬포까지 온 국토에 걸쳐 어마어마한 미군기지가 육신의 암부처럼 퍼져 있었다.
미군의 무책임한 자연 파괴와 오염으로 인해 금수강산은 점점 병들어 갔다.
특히 전북 군산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을 파괴하고 들어선 아메리카 타운은 박정희 정부가 주도해 건설한 거대한 미군 향락 위안 천국이라고 들었다.(주한미군은 현재 평택에 미국 육군 역사상 최대급이요 미군 해외시설 중 최고급이라는 ‘캠프 험프리스’를 거의 한국 돈으로 짓고 있다. 한반도 분단 해소 또는 긴장 완화에 대한 고려는 별로 없이 미군만의 계산대로 밀어붙이는 셈이다. 또한 그러면서도 용산기지를 완전히 반환하지 않고 일부 주둔을 계속함으로써 용산민족공원 건설을 반토막나게 하고 있다-지은이 주)
“형, 클리프란 저 친구는 대체 어떤 놈이야?”
청운이 미군 장교를 흘낏 살펴보며 피에로에게 물었다.
“응, 내 팬이지.”
피에로는 능청스레 대꾸했다.
“뭐? 농담이겠지.”
“흥, 너 날 무시하니?”
“형이 무슨 인기 배우라구 팬이 다 있겠어?”
“아냐, 이 친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기 땜에, 나 자신보다는 내 연기 속에서 슬쩍 보이는 독특한 정서와 미학에 공감한 거야. 그래서 하버드 대학을 다니다가 미군에 입대해 한국으로 날아온 거래.”
“음, 그럼 한국말도 알겠네? 혹시 내가 아까 미국을 욕한 것도 알아들었을까?”
“모르지. 하지만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냥 넘겼을 거야.”
“왜?”
“한국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거든.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미국과 한국의 관계와 그 진실을 알고 싶대.”
“그런 취지에서 자기네 부대 내부를 이렇게 구경시켜 주는 걸까?”
“모르지 뭐. 근데 얜 지금 홀의 어떤 계집애한테 열을 올리고 있어. 중매 좀 잘 서 달라고 이러는지도 몰라. 헤헷.”
“그 여자가 누군데?”
“붉은 여우.”
“늘 진홍색 춤옷을 입고 나오는 그 여자 말이야?”
“응, 그 댄서…헌데 걔는 얘가 싫은 모양이야.”
“왜?”
“그걸 내가 어찌 알겠어.”
“좀 특이하긴 하더라.”
침략 때 늘 외국 군대 주둔지
무소불위적 위세로 기지 확대
“히히, 너도 좀 관심이 있냐?”
“관심은 무슨….”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해. 어린 나이에 요런 복마전에 들어와 어쨌든 꼿꼿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돈을 꽤 벌 텐데 낭비도 않는다는 소문이야.”
“나름대로 무슨 꿈이 있는 모양이겠지.”
“모르지. 고향 집에다 많이 송금한다는 얘긴 들리더군.”
“암튼 싫어하는 놈에게 강제로 몸을, 마음을 희롱당한다면, 여자든 남자든 무척 괴로울 거야.”
청운은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느 흑인 병사에게 쫓기던 그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날 그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그녀는 한 여인이 아닌 외국 군인에게 욕망의 대상인 암컷으로 취급돼 자칫하다간 한 주먹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짐승의 신세가 되어야 했을까.
1945년 초가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군은 항구도시인 부산과 인천을 통해 한국 땅으로 들어왔다. 승리에 취한 그들은 술과 여자를 찾았다.
그리하여 얼마 후 인천 부평에 첫 미군 기지촌이 들어섰다. 양색시들 중 일부는 이전에 일본군을 받던 위안부 출신이었으며, 일부는 가난에 찌든 하층민의 딸들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한반도 북쪽의 일본군 기지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전선에도 배치되었었다.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마다 처녀 수를 할당했는데, 처음엔 큰돈을 벌게 해준다며 은근히 꾀다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땐 강제로 납치해 끌고 갔다-지은이 주)
6.25 전쟁을 거치며 미군 기지촌과 양공주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집과 가족을 잃고 난민이 된 여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미군을 좇아다녔다.
부대 주변에서 기생하던 양색시들은 미군이 훈련을 위해 깊은 산속으로 이동할 때면 이른바 ‘담요부대’를 만들어 뒤따랐다.
어둠이 내려 군의 작전 훈련이 끝나는 즉시 그녀들은 푸른 군용 담요 한 장을 으슥한 땅바닥에 깐 채 밤이 깊도록 계속 야수 같은 이국 사내들의 욕망을 받아냈다.
남북한 간의 피어린 동족상잔이 일단 끝나고도 미군은 이 땅에 계속 주둔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무장인력을 강화하고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건 실상 남한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고 자기네의 욕망을 더욱 더 확장할 만한 군사적 요충지를 마련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결코 실없이 남을 도와주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다.(하하, 요즘도 그걸 믿는 바보가 있을까? 어린애도 이젠 속지 않으련만….)
미군이 완전히 이 땅에 터를 잡고 앉은 1960년대는 기지촌의 호황기였다. 수많은 농촌 처녀들과 도시 빈민가 소녀들이 동족 남성과 사랑해 혼인하지 못하고 이국의 병정들에게 몸을 바쳐야 했다.
10만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전국 각지의 기지촌에서 미군들에게 몸을 팔아 목숨을 이어갔다. 국내에서 매춘은 공식적으로 불법이었으나 기지촌인 100여 곳은 특별 매춘 지역으로 지정됐다.
동두천은 최대의 기지촌으로서 일명 리틀 텍사스라고 불렸다.
매춘 지역
박꽃이 핀 정겹던 초가집은 울긋불긋한 원색의 간판을 단 클럽에 밀려나고, 맑은 물을 떠먹던 박 바가지는 맥주 캔으로 바뀌었으며, 댕기 땋은 수줍은 처녀들이 살던 마을은 일시에 양갈보의 소굴로 타락해 버렸다.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년도가 밝아오면 사람들은 왠지 희망을 지니게 된다. 특히나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가는 빈민들은 속으로나마 더 큰 소망을 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