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신고 영화관으로

국내 주택시장에서 아파트를 선택하는 패러다임이 다양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아파트가 자산가치 척도인 ‘입지’와 ‘가격’이라는 하드웨어에 집중했다면 최근 수요자들은 그 안에서 어떤 일상을 보낼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주거 경험’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고려하고 있다.

이른바 슬리퍼를 신고도 모든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슬세권’ 트렌드가 아파트 단지 내부로 수렴하면서 커뮤니티 시설이 아파트 경쟁력에 있어 핵심적인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단순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 집인지보다 그 안에서 어떤 삶을 누릴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슬세권’
트렌드

주택시장에서는 아파트 평면과 입지의 차별성이 상향 평준화되며 커뮤니티가 사실상 마지막 경쟁 요소이자 체감 가능한 차별화 포인트로 부각되고 있다. 단지 내에서 제공되는 생활의 질이 곧 가치로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근간에는 지난 2021년부터 2022년 절정에 이르렀던 코로나19 팬데믹이 있다. 당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주거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집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운동, 업무, 교육, 문화활동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공간으로 진화했다.

여기에 재택근무의 보편화와 1~2인 가구의 급증은 커뮤니티 시설의 활용도를 극대화했다. 좁은 개인 공간의 한계를 공용 커뮤니티라는 ‘확장된 거실’로 보완하려는 수요가 커진 것이다. 특히 맞벌이 가구 증가와 함께 ‘시간 절약형 주거’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며 외부 이동 없이 단지 내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완결형 구조가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파트 선택 기준 ‘커뮤니티’
체감 가능 차별화 포인트 부각

실제 희림건축·알투코리아·한국갤럽이 발표한 ‘2025~2026 부동산 트렌드’ 조사 결과는 이런 변화를 수치로 증명한다. 주택 결정 시 가장 고려하는 특화 요소로 ‘커뮤니티 시설’을 꼽은 응답자가 34%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이점으로 주목받아 왔던 역세권(22%)을 큰 차이로 앞질렀다.

소비자들이 ‘어디에 사느냐’ 못지않게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주택업계에 따르면 최근 분양 및 입주 중인 단지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시설이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다. 기존의 피트니스 센터와 골프연습장 같은 기초 시설을 넘어 스크린골프장, GX룸, 수영장, 사우나 등 체육시설은 더욱 대형화·고급화되는 추세다.

여기에 공유 오피스와 스터디룸, 독서실, 키즈카페, 게스트룸, 실버룸 등 생활 밀착형 시설이 대거 확충되고 있다. 최근에는 단지 내 영화관, 카페형 라운지, 코워킹 스페이스 등 복합 문화공간 개념까지 도입되며 아파트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일부 하이엔드 단지에서는 호텔식 로비와 라운지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입주민 전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고 있다. 고층부에 조망권을 활용한 스카이라운지를 조성하거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스카이 커뮤니티’는 프리미엄 단지를 상징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프리미엄 상징
필수적인 요소

커뮤니티 시설의 수준 차이는 실제 시장 데이터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단순히 입지가 좋다고 해서 집값이 오르는 시대는 지났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커뮤니티가 우수한 단지가 주변 시세를 견인하는 리딩 단지 역할을 수행한다. 서울 서초구 ‘래미안 원베일리’는 강남이라는 상급 입지에 더해 조식·중식·석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식당, 스카이브리지 카페, 전용 상영관 등의 시설로 주목받기도 했다.

서울 외곽권에서도 커뮤니티 경쟁력이 부각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들어서는 ‘래미안 엘라비네’는 골프연습장과 북라이브러리, 사우나, 피트니스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과 함께 스카이 커뮤니티를 적용하며 주목받고 있다. 해당 단지는 마곡지구와 인접한 입지에 더해 생활형 커뮤니티를 강화하며 서남권 신축 아파트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다.

경기 광명 ‘철산역자이’는 단지 내 수영장을 비롯한 대형 커뮤니티 시설을 적용해 상품성을 강화했으며, 오산 ‘세교 우미린 레이크시티’ 역시 실내 수영장과 스카이라운지, 게스트하우스를 도입하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대구 수성구 ‘수성범어W’가 차별화된 커뮤니티 시설로 눈길을 끌었다. 해당 단지는 스카이라운지와 피트니스, 커뮤니티 시설 등을 갖춘 하이엔드 단지로 수요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충북 청주 흥덕구 일대 ‘힐스테이트 청주센트럴2차’는 체육시설과 생활형 커뮤니티를 갖춘 대단지 아파트로 주목받기도 했다.

자존심 건
특화 설계

커뮤니티 시설에 차별화를 도모한 주요 단지는 분양시장과 가격 부분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경기 과천시 ‘디에이치 아델스타’는 약 100m 높이의 스카이브리지와 스카이라운지, 게스트하우스 등 차별화된 커뮤니티 시설을 갖춘 점을 경쟁력으로 어필해 1순위 청약에서 평균 52.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경기 평택 ‘호반써밋 고덕신도시 3차’는 공공택지 내 공급과 함께 다양한 생활형 커뮤니티 시설을 갖춘 점이 부각되며 1순위 청약에서 평균 82.3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전북 전주 ‘에코시티 한양수자인 디에스틴’은 단지 내 다양한 생활·여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평균 85.39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비수도권 청약시장에서도 높은 수요 집중을 보여줬다.

같은 지역 내 전주 ‘에코시티 더샵 4차’도 피트니스 센터와 사우나, 스터디 라운지 등 학습·생활 특화 커뮤니티를 도입해 1순위 청약에서 191.2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지방시장에서도 커뮤니티 경쟁력이 흥행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했다. 경남 창원에 공급된 ‘창원 센트럴 아이파크’는 스카이라운지와 대형 커뮤니티 시설 등을 앞세워 1순위 청약에서 평균 706.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수요가 집중됐다.

건설사들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형 건설사들은 ‘커뮤니티 특화 설계’를 브랜드 자존심을 건 전쟁터로 삼고 있다. 과거 조경이나 외관에 공을 들였다면, 이제는 입주민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공략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대표적으로 입주민 맞춤형 주거 서비스 ‘H 컬처클럽’을 도입해 커뮤니티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단지 내 영화관과 도서관, 피트니스, 수영장 등 대형 시설을 갖추는 것은 물론, 전문 업체와 협업해 북큐레이션, 운동 프로그램, 문화 콘텐츠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단지 내서 대부분 생활
‘확장된 거실’ 수요↑

DL이앤씨는 ‘C2하우스’를 통해 커뮤니티와 주거 공간의 유연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입주민의 생활 패턴에 따라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커뮤니티 역시 업무·교육·여가 기능을 복합적으로 결합해 ‘확장형 주거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물산은 ‘래미안’만의 프리미엄 조식 서비스를 비롯해 사물인터넷 기반의 통합 플랫폼을 통해 커뮤니티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입주민 전용 애플리케이션 ‘홈닉’을 통해 커뮤니티 시설 예약과 이용 관리가 가능하며 인공지능 기술을 결합해 생활 패턴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흐름은 중견 건설사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브랜드 경쟁력에서 밀리는 중견사들은 대형사 못지않은 수영장이나 대규모 도서관을 전면에 내세워 청약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패턴 분석
프로그램

업계에서는 커뮤니티 경쟁력이 향후 주택시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단지 내에서 제공되는 생활 경험과 서비스의 질이 수요자의 선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입주민의 일상 전반을 아우르는 ‘생활 인프라’로 기능하며 단지의 브랜드 가치와 자산가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주택시장에서는 커뮤니티의 구성과 운영 수준이 단지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에는 커뮤니티가 지역 사회와 연결되는 거점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공유오피스, 문화공간, 교육시설 등 다양한 기능이 결합돼 아파트는 일정 부분 외부와 소통하는 ‘생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앞으로는 전문 운영사와 연계해 커뮤니티의 질을 유지하는 경쟁이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며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입주민의 이용 패턴을 분석하고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커뮤니티 시설을 극대화한 분양 단지.

▲안양 에버포레 자연& e편한세상= DL이앤씨는 경기 안양 동안구 관양동에 ‘안양 에버포레 자연& e편한세상’을 분양한다. 단지는 총 2개 블록, 지하 2층~지상 최고 18층, 9개동 총 404가구로 구성된다. 전용 타입별 가구 수는 A1블록은 ▲95㎡A 32가구 ▲95㎡B 6가구 ▲95㎡C 10가구 ▲95㎡D 12가구 등 60가구, A2블록은 ▲84㎡A 72가구 ▲84㎡B 70가구 ▲84㎡C 51가구 ▲84㎡D 151가구 등 344가구로 구성된다.

해당 단지의 커뮤니티 시설로는 피트니스, 라운지카페, 멀티룸, 게스트하우스 등 입주민의 여가를 위한 다양한 공간이 블록별로 상이하게 조성될 예정이다. 특히 라이프스타일 맞춤 플랫폼 ‘C2 하우스’ 혁신 설계와 e편한세상의 프리미엄 조경 브랜드인 ‘드포엠(dePoem)’을 적용해 경쟁력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고덕국제신도시 수자인풍경채 1·2단지= BS한양과 제일건설은 경기도 평택시 고덕국제화계획지구 P2패키지 사업으로 조성되는 ‘고덕국제신도시 수자인풍경채 1·2단지’를 분양한다. 고덕국제신도시 2개 블록에 2개 단지, 총 1126가구 규모로 조성되며, 1단지는 지하 2층~지상 25층, 총 670가구 규모로, 2단지는 지하 2층~지상 23층, 총 456가구로 조성된다.

단지의 커뮤니티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구성됐다. 피트니스·골프연습장 등 운동시설과 함께 공유 오피스(1단지)·작은도서관·주민카페가 마련된다. 각 단지에는 잔디광장과 테마숲·수경 시설이 어우러진 대형 중앙광장이 조성되고, 순환 산책로도 마련해 쾌적함을 더했다.

▲메트로시티 자산 데시앙= 태영건설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일원에 공급하는 대단지인 ‘메트로시티 자산 데시앙’을 분양한다. 단지는 지하 2층~지상 33층, 총 12개동, 1250가구 규모로 조성된다. 이 가운데 전용 59~84㎡, 739가구가 일반분양 물량으로 공급된다.

단지는 피트니스 센터와 실내 스크린 테니스장, 실내 골프연습장, 탁구장 등 다양한 운동시설을 비롯해 사우나(남·여), 프라이빗 영화관, 뮤직 스튜디오 및 노래방 등 문화·여가 공간이 함께 조성된다. 여기에 스터디룸과 카페형 도서관 등 학습 공간과 맘스클럽, 키즈플레이 등 육아 특화 시설 및 생활 편의를 높이는 부대시설도 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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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