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IP 기반’ 콘텐츠 성공 공식

<유미>는 되고 <독자>는 왜 안 되나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유미가 성공했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유미의 세포들> 시즌3가 최종회 시청률 2.5%로 막을 내렸다. ‘윰록 커플 케미’ ‘하트 피버 타임’ ‘응큼세포’ 등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화제가 됐다. 웹툰 기반 드라마로서 원작 훼손 논란 없이 세 시즌을 거쳐 잘 마무리된 최초 사례가 됐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공감’이었다. 배우 김고은도 극 중 유미와 또래이고 비슷한 삶의 결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다. 그 공감대를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유미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생 같은 친근한 인물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반짝이는 지점도 있다. 그런 결을 잘 살려내고 싶었다.”

공감하는
반짝이는

2021년 첫 시즌을 선보인 이후, 최근 세 번째 시즌을 마무리하며 <유미의 세포들>을 완결 지은 이상엽 감독이 한 말이다. 이 감독은 원작 웹툰이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과 ‘그 안에 반짝이는 지점’이 키워드다.

시즌 세 개를 거치는 동안 유미는 조금씩 더 성장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유미는 그토록 바라던 작가가 되고, 과거보다 성숙한 연애도 할 수 있게 된다. 매 시즌 바뀌는 건 유미 남자친구다. 시즌1 구웅에서 시즌2 유바비로, 다시 시즌3 신순록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애담에서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 원작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인 웹툰 <유미의 세포들>은 작가 이동건이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했다. 초반부터 흥행했다. 특히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서 콘텐츠가 업로드되는 수요일과 토요일, 1위 자리를 놓지 않았다.

원작 웹툰 인기 비결은 역시 ‘여잘알(여자 마음 잘 아는)’ 작가가 말아주는 알콩달콩 로맨스였다. 이동건은 남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심을 파악하고 담아내는 실력이 특출났다. 웹툰만큼 작가도 인기를 얻더니, 덤으로 ‘무빙건’이란 별명도 얻었다. 작가 이름 앞 두 자인 ‘이동’을 ‘무빙(moving)’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렇듯 웹 기반 콘텐츠는 오랜 기간 작가와 팬이 소통하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 오랜 기간 연재한 <유미의 세포들>은 그림체가 꾸준히 달라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미의 세포들> 팬이라면, 성장하는 유미는 물론, 그 주인공을 그려나가는 작가도 응원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로도 세 시즌이 구성되면서 시청자들은 유미와 드라마와 감독이 성장하는 모습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 시즌을 본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시즌을 기대하는 예비 시청자가 됐다.

<유미의 세포들>은 원작과 드라마를 구분할 것 없이 두 가지 모두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연애담을 그려낸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만 느낄 수 있는 설렘, 중간에 소소한 경험을 함께 쌓으며 서로에게 물드는 안정감, 서서히 마음이 닫히고 헤어지기를 결심하기까지 겪는 실망감. 어쩌면 뻔한 이야기뿐이다.

고민과 번뇌는 현실에서만도 벅차
애초에 강한 먼치킨 주인공 선호

그렇다면 <유미의 세포들>은 이 뻔한 이야기에 어떻게 흥미를 덧붙이고 독자와 시청자를 끌어당겼을까. 그 비결은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연애담 안에서, 그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었다. 제목 그대로 ‘유미의 세포들’이 3D 캐릭터로 등장해 본분에 맞게 유미 내면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귀엽게 담았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남자 주인공 신순록 세포인 ‘응큼세포’와 ‘혀세포’가 극에 재미를 더하는 데 한몫했다. 유미를 담당하는 PD 순록이 ‘침착하고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짐작했던 만큼, 공룡보다 거대한 응큼세포와 혀세포가 첫 키스를 계획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은 그림으로만, 캐릭터로만 전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적 변화를 재치 있게 담았다. 주인공 윰록 커플에게 ‘하트 피버 타임(일시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이 폭발하는 상태)’이 찾아오는 순간을 담기에 매우 적절한 기법이었다 할 만하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보다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현재 웹소설 시장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는 작품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을 꼽을 수 있다. 아쉽게도 동명 영화 <전독시> 손익분기점은 약 600만명가량이었으나, 여기에서 한참 부족한 100만명 수준으로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유미의 세포들> 웹툰은 이달 기준 내려받기 3842만여회를 기록했다. <전독시> 웹소설은 이 수치의 예닐곱 배인 2억5880만회를 기록하고 있다.

총 512화로 연재한 <유미의 세포들>에 비해 <전독시>는 매일 연재하는 장편인 만큼, 더욱 반응 지표가 빠르게 상승했을 것이다. <전독시>는 본편만도 552화에 외전(속편)까지 합하면 1000화를 넘기니, 콘텐츠 분량만으로도 거의 두 배다.

그렇다 해도 <전독시> 인기 지표는 <유미의 세포들>을 말 그대로 월등하게 뛰어넘는다. 본편 인기를 업고 가는 2차 콘텐츠 특성을 고려하면, 영화 <전독시>가 흥행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전독시>는 10년 넘게 연재된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전편을 읽은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안효섭 분)가 그 소설대로 펼쳐지는 가상현실 속에서 소설 주인공 유중혁(이민호 분)을 비롯한 동료들과 롤 플레잉 게임을 하는 것처럼 움직이며 살아남는 과정을 다룬다.

웹소설 <전독시>는 전형적인 ‘남성향’이다. 남성이 주로 보기에 남성향이라고 부르는 것 같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독시> 팬층은 여성 독자도 일정 부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남성향이란, 연애사는 대체로 쏙 빠진, 성장하는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르를 일컫는다.

남성향
먼치킨

<전독시>는 웹소설 최신 트렌드를 총망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시기로 회귀하기, 낯선 인물에게 빙의하기, 특정 시점에 환생하기 등을 뜻하는 ‘회빙환’은 한동안 유행하는 남성향 웹소설을 이끄는 중심축으로 작용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회빙환’이 뜨는 이유는 간단하다. 노력해도 무언가를 쉽게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해 나만 아는 정보를 토대로 마음먹은 대로 성장하며 성공 판타지를 실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웹 콘텐츠를 스낵 컬처(Snack culture)라 부른다. 요즘 독자와 시청자는 짧은 시간에 가볍게, 간편하게 이야기를 스크롤하고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좌절하고 고민하고 번뇌하는 일상은 현생만으로도 버겁고, 그래서 족하다.

<전독시>는 여기에 ‘먼치킨’이라는 주인공 특성을 추가한다. 먼치킨에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국내 판타지물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한 캐릭터’를 뜻한다. 주인공은 등장할 때부터 이미 회빙환으로 습득한 정보로 완성형에 가까운데 압도적으로 강하기까지 하다.

윗세대 인기 웹소설로 꼽히는 <나혼자만 레벨업>에서 주인공은 근육 하나 제대로 못 쓰는 나약한 하급 헌터 지위에서 시작한다. 게임을 할 때처럼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희열을 얻는 독자가 많았기에 그때는 그런 주인공을 앞세워도 유행을 탈 수 있었다.

<전독시>가 나오던 시기는 그때와 달라졌다. 독자들은 나약한 주인공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 그 짧은 사이도 참지 못했다. 독자 구미에 플롯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애초에 강해야 했고, 계속해서 그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주저하거나 위험에 처하는 순간도 견디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나약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콘텐츠가 업로드되자마자 댓글을 달았다. ‘고구마’라고.

영화 <전독시>야말로 고구마 백만개를 먹는 듯한 목 막히는 설정으로 이뤄졌다. 주인공은 극 초반 퇴근길에 사람들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출입문을 오래도록 잡아둔다.

사이다
고구마

김병우 감독은 “착하다기보다는 어디서라도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독자’”를 구상했다고 하던데, 여기서부터 잘못됐다. <전독시> 웹소설 팬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절대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주인공을 갈망한다. 그 장면은 역시 고구마다.

조연들도 마찬가지. 주인공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동료들, 그리고 이들을 연민으로 돕는 대신 격려하는 독자가 서로 신뢰를 쌓고 ‘김독자 컴퍼니’를 이루는 소설 속 과정은 온데간데없다. 영화에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는 이야기만 남았다.

인물 설정만 목 막히는 게 아니다. 플롯 구성도 매한가지다. 방대한 시리즈물 중에서도 고증된 인기를 자랑하는 <스타워즈>는 에피소드별로 매우 분명한 결론을 향해 줄거리가 달리게 하고, 일련의 사건들 역시 잘 짜인 판 안에서 귀결된다.

영화 <전독시>는 매회 카타르시스와 다음 회차에 대한 궁금증을 담는 웹소설 특유의 설정을 버리지 못했다. 대신 이어지지 않는 사건 속에 인물들을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해서는 세계관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고유한 영화 줄거리를 갖지도 못하게 됐다.

이쯤 되니 누구 하나 이 영화를 선뜻 반기지 못한다. 원작 웹소설을 읽지 않은 관람객은 지루한 내레이션으로 처리된 세계관 설명에 친절이 빠져 있다고 답답해한다. ‘성좌’나 ‘도깨비’나 ‘코인’은 다 뭔 말인가, 싶었을 테다. 웹소설을 읽은 관람객은 꼭 잃고 싶지 않은 부분에서만 고증을 빼먹거나 어설프게 처리해 버렸다며 화를 냈을 테다.

1편 안에서만이라도 끝장을 본 맥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구한다는 계몽은, 요즘에 와서는 너무 고루하다. 노력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갑갑한 현실에서 도피한 사람들이 잠깐 스며드는 롤 플레잉 게임을 김 감독은 못 알아봤다.

영화 한 편을 관통하는 감정이 차라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통쾌함’이었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성향 웹소설을 영상으로 2차 가공한 작품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됐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사내 맞선> <폭군의 셰프> 등 최근 흥행작은 모두 <유미의 세포들>처럼 로맨스를 줄거리로 삼는 여성향 소설과 웹툰을 IP로 활용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고구마만 백만개 먹이는 플롯 전개
청량한 사이다 같은 승리 장면 부족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 특성상 10부작 이상 긴 호흡으로 감정선을 끌고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고증이 필요한 설정도 그다지 많지 않기에 각색하기에도 어려움이 덜하다. 웹툰이 원작이라면, 특유한 설정 신에서만 상상력을 발휘해 CG를 덧입히면 그만이다. 비용 절감에도 탁월하겠다. 어쩌면 드라마여서 가능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작품으로는 영화 <좀비딸>을 들 수 있다.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이 원작이다. 관객 수가 무려 <전독시> 다섯배다. 좀비, 말하는 고양이 등 허구 설정은 조금 어설프게 연출하거나 생략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추구하는 장르가 드라마이자 코믹인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남성향 웹소설은 그저 2차 콘텐츠로 생산하기 어려운 IP에서 그치는 걸까. 이쯤 되니 조만간 넷플릭스에서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힌 <나혼자만 레벨업>이 궁금해진다. 회차별로 강한 완결성을 갖는 웹소설 고유 플롯은 회차별로 연속성을 이어가는 강한 흡입력으로 연출될 수 있을까. 영상미를 덜 운운하면서도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을까.

<전독시>보다는 훨씬 세계관이나 설정이 간결하기에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지 않은 이들이라도 접근하기 쉬울 테다.

<이끼>가 개봉한 지 15년이 지났다. <신과 함께-인과 연>이 개봉한 이후로는 7년이 흘렀다. 웹툰과 웹소설 콘텐츠 재생산은 상당수 이뤄졌다. 이제 영화판과 OTT 시장은 웹툰과 웹소설 등으로 이미 검증이 이뤄진 작품을 다루고 안정감을 느끼는 데 익숙하다. 어쩌면 <전독시>는 그런 차원에서 흥행이 보증된 작품이라 단정한 채 제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팀 버튼은 원작 소설을 토대로 영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소설 <큰 물고기>에서 태어난 영화 <빅 피쉬>. 아동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 앨리스>를 모태로 삼고 상영한 동명 영화 시리즈. <슬리피 할로우>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 버튼이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원작만큼 좋은, 혹은 원작을 넘어서는 영화가 탄생하곤 했다.

버튼은 영화와 글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는다. 상황이나 설정에 덧붙여진 설명과 자잘한 에피소드는 과감하게 쳐낸다. 남은 공간에는 상상보다 밝거나 어두운 색상, 차갑거나 따듯한 감각을 덧입힌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시간과 공간이 상상보다 선명하게 흐르도록 영화를 구성한다.

버튼이 소화하는 텍스트는 새로운 영상으로 거듭난다. 원작과 다른 결말을 그리거나 새로운 설정을 덧입히는 데도 거침이 없다. 이 과감한 제작 방식을 지탱하는 기둥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기존 콘텐츠에 대한 ‘완전한 소화’다. 버튼이 원작자가 글을 쓸 때보다 더 많이 고민했던 흔적이 영상에 고스란히 남는다.

이게 바로 원작보다 버튼이 만든 영화를 더 좋아하는 팬이 존재하는 이유다.

글과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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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과 웹소설을 영상화한 2차 콘텐츠 제작 방식은 아직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태 창이 뜨는 게임 설정과 ‘땅강아쥐’ ‘어룡’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 판타지를 표현하는 방식은 시도가 늘어감에 따라 지속 발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 틈새를 줄여가기까지 원작 IP를 향한 진지한 고민과 완전한 소화가 우선시돼야 할 것은 물론이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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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