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없는 학교’ 현장체험학습 기피 실태

김밥도 설렘도 사라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최근 초등학교 현장에서는 봄철이면 당연하게 여겨지던 풍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운동장에 줄지어 선 관광버스도, 들뜬 표정으로 도시락을 챙기는 아이들도 예전만큼 보기 어려워졌다. 현장체험학습이 ‘교육 활동’보다 ‘사고 책임’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학교는 체험학습을 하나 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살아나는 듯했던 학교 현장체험학습이 다시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수학여행과 현장체험학습이 취소·축소되며, 숙박형 체험학습은 사실상 사라지는 분위기다.

그리운 풍경
점점 사라져

서울시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했거나 계획 중인 서울 초·중·고교는 전체 1331곳 가운데 407곳(31%)에 그쳤다. 코로나19 이후 회복 흐름이 이어지던 2023년 86%(1150곳), 2024년 74%(984곳), 2025년 58%(773곳)과 비교하면 가파른 감소세다.

수학여행 등 숙박형 체험학습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올해 숙박형 체험학습을 계획한 서울 지역 학교는 전체의 18% 수준인 242곳에 불과했다. 초등학교는 특히 더 낮았다. 서울 초등학교 가운데 숙박형 체험학습을 계획한 곳은 3% 수준에 그쳤다.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이미 ‘안 가는 분위기’가 굳어지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는 재작년부터 모든 학년의 현장체험학습을 사실상 중단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교외 체험학습 여부를 두고 학부모 설문조사를 진행했지만, 올해는 아예 ‘교내 프로그램 진행 여부’를 중심으로 의견을 수렴했다.

또 다른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대신 교내 안전체험 프로그램과 학급별 활동으로 학사일정을 대체했다. 울산 지역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해 울산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하지 않은 초등학교는 76곳이었다.

올해 역시 68곳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일부 학교는 학급별로 따로 체험학습을 진행하거나, 안전체험관 등 비교적 위험 부담이 적은 기관 방문만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울산의 한 초등학교는 올해 학교 단위 현장체험학습 대신 학급별 소규모 활동 방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학교 차원의 대규모 이동 대신 담임교사 재량에 따라 가까운 기관을 방문하는 수준으로 축소했다. 체험학습을 가더라도 최대한 통제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려는 것이다.

특히 학년이 낮을수록 미실시 비율이 높았다. 일부 학교는 체험학습 자체를 취소하고 학교로 찾아오는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고 있다.

‘속초 사고’ 이후 달라진 학교 분위기
초등학교 10곳 중 4곳 “체험학습 취소”

현장체험학습이 위축되기 시작한 건 지난 2022년 강원 속초 현장체험학습 사망사고 이후다. 당시 강원 춘천의 한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속초의 한 테마파크로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사고는 테마파크 주차장에서 발생했다. 학생들이 버스에서 내려 이동하던 과정에서 한 학생이 후진하던 버스에 치여 숨졌다.

사고 이후 검찰은 버스 기사뿐 아니라 담임교사와 보조 인솔 교사까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교사들이 학생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담임교사에게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학생들이 대열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또 버스가 임시 정차 상태였던 만큼 차량 이동 가능성 역시 예측 가능했다고 봤다.

반면 보조교사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학생 안전관리와 관련한 명확한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은 교육 현장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버스 기사 과실로 발생한 사고인데 왜 담임교사까지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반발이 쏟아졌다. 이후 항소심에서는 일부 판단이 달라졌다.

2심 재판부는 담임교사의 업무상 과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사망 결과에 대한 책임을 교사에게 전적으로 묻는 것은 과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금고 6개월의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집행유예는 유지되지 않았고, 교사는 교직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교육계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들은 “결국 유죄는 유죄”라는 반응을 보였다. 선고유예로 교직 유지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법원이 교사의 형사 책임 자체를 인정했다는 점이 현장에 더 큰 메시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실제 판결 이후 교사 커뮤니티와 교원단체 게시판에는 “이제 누가 현장체험학습을 가려고 하겠느냐” “사고 한번이면 전과자가 될 수 있다”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고인 취급을 받는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속초 사고 이후에도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판결이 이어졌다. 지난 1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전남의 한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현장체험학습 중 발생한 사망사고와 관련해 인솔 교사들에게 금고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당시 특수교육 대상 학생이 체험활동 도중 선착장 인근 바다에 빠져 숨졌는데, 재판부는 교사들이 충분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지나친 요구
과도한 책임

하지만 교사들은 “학생 수십명을 인솔하는 상황에서 모든 돌발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 초등교사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학생들, 신호등, 차량 흐름까지 동시에 봐야 한다”며 “교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모든 변수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교사는 “학생들이 갑자기 뛰어나가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고가 발생하면 결국 교사 개인의 과실 여부부터 따지는 구조 자체가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교원단체들은 특히 이런 판결이 반복되면서 학교 현장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사고가 났을 때 형사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경기 지역 학교들 사이에서는 ‘버스를 오래 타는 일정’ 자체를 줄이는 분위기다. 경기 오산의 한 초등학교는 이미 체험학습 버스와 입장권 예약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갑작스럽게 계획을 철회했다. 위약금 부담 가능성까지 있었지만 학교 측은 결국 체험학습을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학교 관계자는 “교사들 사이에서 ‘괜히 갔다가 문제 생기면 어쩌냐’는 분위기가 커졌다”고 말했다.

화성의 한 초등학교 역시 외부 지역 체험학습 대신 학교 주변에서 도보 이동이 가능한 장소를 다시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사들은 버스 이동이나 장거리 일정 자체를 위험 요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과밀 학교일수록 체험학습을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충남 지역에서는 학생 수가 많은 학교들을 중심으로 현장체험학습과 수학여행을 학사일정에서 빼기도 했다.

학생 수가 많은 학교들은 체험학습을 편성하지 않은 반면, 비교적 학생 수가 적은 학교들은 현장체험학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 수가 많을수록 이동과 안전관리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울타리 안
오직 공부만

특히 저학년일수록 체험학습 기피 현상은 더 뚜렷했다. 돌발 행동 가능성이 높고 통제가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 일부 학교에서는 1학년 전체 체험학습을 아예 취소하거나 교내 행사로 대체하기도 했다.

숙박형 체험학습 대신 도보 이동이 가능한 근거리 활동으로 대체하거나, 학교 내부 프로그램으로 방향을 바꾸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체험학습 대신 강당이나 체육관에서 외부 강사를 초청한 프로그램으로 학사일정을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교육 현장에서는 “예전에는 학생들을 모아 어떻게 더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지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사고를 줄일지부터 고민하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사들에게는 현장체험학습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도 큰 부담이다. 체험처 선정, 사전 답사, 버스 계약, 보험 가입, 안전 계획서 작성, 학부모 동의서, 안전교육 자료 준비, 비상 연락망 구축, 안전 요원 배치, 일정표 관리, 식사 및 숙소 확인 등 대부분의 행정 절차를 교사가 직접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준비를 하더라도 사고 발생 시 책임을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지난해 개정된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학교안전법)은 교직원이 안전조치 의무를 다한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도록 규정했다.

문제는 ‘안전조치 의무를 다했다’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어디까지 해야 안전조치를 다한 것으로 인정되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교육부가 배포한 현장체험학습 운영 매뉴얼에는 교통 안전, 식사, 화재 예방, 시설 점검 등 수십개 항목의 체크리스트가 포함돼있다. 활동 유형에 따라 점검 항목은 80~90개 가까이 늘어나기도 한다. 교사들은 “기준이 구체화될수록 오히려 나중에 책임을 따질 근거만 더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내놓고 있다.

교사들의 부담이 커진 건 최근 들어 학부모 민원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도 한몫했다. 예전에는 일정이나 준비물 정도를 문의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체험학습 과정 전반을 실시간으로 관리·감시하려는 학부모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사고 한번이면 교사는 전과자”
책임·민원·행정 부담에 급감

실제 한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해 달라는 요구가 나왔고, 또 다른 학교에서는 “왜 제주도가 아니라 서울로 가느냐” “왜 1박2일만 가느냐”는 민원이 제기됐다.

현장체험학습 직전 “아이 도시락을 교사가 직접 준비해 달라”는 요구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한 교사는 “출발 직전에 학부모 전화가 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다”며 “결국 내가 먹으려고 산 김밥을 학생에게 주고 나는 점심을 굶었다”고 토로했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체험학습 비용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 학부모가 중학교의 수학여행 안내문을 공개했는데. 강원도로 떠나는 2박3일 일정에 1인당 60만6000원이 책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에는 우등버스 이용료, 숙박비, 식비, 체험 프로그램 비용 등이 포함돼있었다.

논란은 빠르게 확산됐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수학여행 비용이 지나치게 비싸다” “예전에는 훨씬 저렴했다” “학교가 리베이트를 챙기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현직 교사들은 “현재 수학여행 구조를 전혀 몰라 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다.

현재 수학여행은 공개경쟁 입찰 방식으로 여행사를 선정하고,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진행된다. 교사 개인이 비용 구조를 임의로 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학생·학부모 요구 수준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유스호스텔 단체 숙박이나 대형 식당 백반 형태 식사는 학부모 만족을 얻기 어려워졌고, 상대적으로 쾌적한 숙소와 식사, 체험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학교에서는 “왜 4인실이냐” “왜 리조트 수준이 아니냐” “식단이 부실하다” 등의 민원이 이어지기도 했다. 교사들은 “요구 수준은 계속 높아지는데, 적은 비용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결국 현장에서는 “안전하게 가는 방법”보다 “아예 가지 않는 선택”이 가장 리스크 없는 선택이 됐다.

추억 없는
학교 생활

정부는 최근에서야 체험학습 위축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교사 면책 범위를 검토하기로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에서 현장체험학습 위축 문제와 관련해 “혹시 구더기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장독을 없애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학부모들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학생들이 추억과 사회성 경험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 역시 적지 않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A씨는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이동하고 생활하면서 배우는 게 분명 있는데 그런 경험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다”며 “안전을 이유로 모든 활동을 접는 게 맞는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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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