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현실판 하니’ 왕서윤

국내 여자 중 가장 빠른 중2 소녀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고작 중학생이다. 한창 자랄 나이인 14세. 왕서윤이 대학부와 실업팀 언니들을 모두 따돌리고 올해 국내 여자 100m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스포츠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같은 나이라 현실판 ‘달려라 하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일 전라남도 목포종합운동장 육상경기장. 여자 중학생 여덟명이 날렵하고 가벼운 몸에서 긴장을 덜어내려 온몸을 두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다.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 3일 차, 여자 중등부 100m 결선이 치러지기 직전이다.

타고난
유연성

ENG 카메라 기자가 1번 레인부터 순차적으로 각 선수를 촬영하며 소개한다. 그때마다 긴장한 얼굴들이 잠깐씩 풀어지며 수줍으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나온다. 영락없는 중학생이다. 그중에서도 6번 레인에 선 12번 선수가 제일 눈에 띈다. 두 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그리며 웃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준비 시간을 모두 소진하기까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긴장을 푼다. 신호에 따라 스타팅 블록에 두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땅을 짚는다. 딱! 신호총 소리에 상체를 편 선수들이 일제히 결승선을 향해 쏟아진다.

초반에는 비슷하게 달려 나가는 것 같더니 50m 라인을 지나자마자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양팔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뒤꿈치가 허벅지에 닿을 듯 무릎이 빠르게 구부러지는 선수, 왕서윤이다. 매 초 격차가 벌어지더니 마침내 왕서윤이 결승선을 밟는다.

내달리던 속도를 바로 줄이지 못해 한참 트랙을 뛰던 왕서윤이 기록판을 확인한다. 11초83. 눈이 휘둥그레진 왕서윤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으나 웃음까지는 감추지 못한다. 마침내 트랙에 멈추어 선 그가 동료 선수를 껴안는다.

여자중등부 100m 결선에서 왕서윤이 11초83을 기록하며 부별 한국기록(종전 11초88)을 경신했다. 2009년 이후 17년 만에 갈아치운 기록으로, 이번 대회 여자 일반부(성인) 100m 1위에 오른 김주하 기록인 11초87보다 0.04초 앞섰다.

왕서윤은 서울체육중학교 2학년으로, 최근 두 차례 개인 종목에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무서운 성장세라는 평이 뒤따르는 이유다. 2위는 권제희(언남중, 12초22), 3위는 김아인(광주체중, 12초46)이 차지했다. 두 선수 기록 역시 만만찮다는 점에서 한국 단거리 육상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많아졌다.

왕서윤은 경기를 마치고 “날씨가 좋지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12초대 기록을 예상했는데, 11초대에 진입하며 부별 한국 기록을 경신하게 돼 매우 기쁘다”며 “가르쳐 주신 코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도 이 기록을 넘어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윤여춘 육상 해설위원은, 당일 “왕서윤 선수가 우리나라 시즌 고등학교, 대학교, 일반부 전부 다 (포함)해서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며 한국 육상계에 신예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이 기록은 어떻게 보면 굳어진 기록이다. 깰 수 없을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012년 11월생인 왕서윤은 만 나이로 13세5개월이다. 1m63㎝ 키로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다. 체육 교사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운동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여동생과 남동생 역시 증산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날씨 좋지 않고 컨디션 좋지 않은데…
성인 선수들 모두 제치고 최고 기록

왕서윤이 처음 육상 기록판에 이름을 들이민 때는 지난 2023년이다. 증산초 4학년 때 취미로 육상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중 1년 만에 100m 공식 대회에서 13초13 기록을 썼다. 추가로 1년이 더 지난 6학년 때는 12초82를 기록했다.

서울체중에 진학한 이후에는 단거리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지난해 4월에는 춘계전국초중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여자중학교 1학년부 100m 결승에서 12초33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11초94로 본인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했다. 육상계에서는 단거리 선수가 이토록 빠른 기간 안에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이례적’이라 평한다.

왕서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유연성이다. 보통 단거리 경기에서는 폭발적 스퍼트로 승패가 갈리는데, 그가 연출하는 경기 장면에서는 출발 이후 속도에 긴장감이 붙는다. 스퍼트에서 아낀 힘을 막판까지 끌어내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왕서윤은 힘으로 뛰지 않는다. 800m 선수처럼 리듬과 유연성을 앞세운다. 따라서 폭발적인 스퍼트 없이도 후반까지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말 그대로 상당히 부드럽다. 어깨에도 힘이 전혀 안 들어가고. 부드러운 유연성이 있어야만 기록이 자꾸 단축된다”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한국 단거리에서 이런 선수는 없었다. 미국 선수 앨리슨 펠릭스(2012 런던올림픽 200m 금메달리스트)를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왕서윤을 지도하는 이강민 코치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며 왕서윤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만들어낸 기록”이라고 칭찬했다. 덧붙여 “스타트 후 가속 구간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부드럽다”며 “천부적인 재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코치는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다. 한번 집중하면 몰두해서 꼭 이뤄낸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즐기면서 훈련을 한다. 미래가 기대된다”고도 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성장기인 점을 고려해 근력 운동을 제한하는 등 훈련량을 조절하고 있다. 현재 왕서윤은 주중 방과 후 3시간, 토요일 5~6시간 정도를 훈련 시간으로 쓰고 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훈련 중독형 선수는 아니’라고 한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훈련하는 자기 주도형 훈련을 운영한다고. 성격도 밝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후배 관계도 좋고 팀 적응력도 뛰어나다. 경기 때마다 동료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실감할 수 있다.

체육인의 피
신기록 행진

김건우 KBS 스포츠 해설위원은 “왕서윤의 재능은 10년에 한 명 정도 나올 수준”이라며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기록이 느는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했다. 윤 해설위원 역시 “잘 성장해 고등학생이 되면 한국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왕서윤을 응원했다.

이번 제55회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신기록 행진이 이어졌다. 한국 신기록 2개, 대회 신기록 3개가 쏟아졌다. 그중 하나는 왕서윤이 쓴 것이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는 나마디 조엘진(예천군청)이 10초19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여자 단거리 경기에서 왕서윤이 돋보였다면, 남자 단거리에서는 단연 조엘진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는 한국 육상 단거리 기대주로 꼽힌다.

조엘진은 이 대회 첫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 10초19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종전 대회 기록(10초22)보다 0.03초 앞당겼다. 지난해 실업 육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개인 최고 기록(종전 10초23)까지 경신했다.

참고로, 남자 100m 한국 기록은 김국영이 2017년 6월 코리아오픈 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세운 10초07이다.

다만 조엘진은 이어진 준결선에서 10초22를 기록해 결선 진출에 성공했으나, 불안정한 날씨로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결선 출전은 포기했다.

그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 14일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에서 열린 요시오카 그랑프리 남자 100m에서 개인 최고 기록(10초23)으로 1위에 올랐고, 이번 대회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 밖에도 남자 중등부 창던지기에서는 김정윤(울산 서생중)이 69m62로 한국 기록을 경신했다. 남자 고등부 원반던지기에서는 손창현(구미 금오고)이 53m89로 대회 신기록을 썼다.

여자부에서도 기록 깨기가 이어졌다. 여자 중등부 100m 허들에서 이하늬(부산 대청중)가 14초28로 27년 만에 대회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암울한 육상계
날아든 희소식

특히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상혁(용인시청) 등도 기대감을 모은다. 이들은 차세대 스타로까지 불리고 있다. 이 코치는 “한국 육상에서 남자, 여자 선수 모두 상승세를 탄 것 같다”며 “지도자들도 조금씩 변화했다”고 평했다.

또 “이전에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최근 몇 년 새 훈련에 대한 고민, 외국의 훈련법 등을 같이 나누며 공부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회상했다.

한때 100m 여자 한국 기록 보유자 이영숙은 기록 단축이 어려운 한국 육상계를 진단한 바 있다. 아시안게임 메달권 기록이 지난 30여년간 약 0.5초 전후로 단축됐음에도 한국 기록은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얇은 선수층이었다. 이영숙은 “선수층이 얇아 벽을 깨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수 선수를 향한 격려와 유망주 발굴이 더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한국 육상계는 이번 목포 대회에서 이 우려를 종식할 열쇠를 찾을 수 있을 테다.

대한육상연맹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코치는 “연맹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실 것”이라며 “유망주 선수들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국을 대표해 성장할 수 있는 선수로 만들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코치는 또 “어린 선수들이 일찌감치 국제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면서 “지난해 몇몇 선수들과 함께 해외로 나가서 훈련하고 돌아왔다. 선수에게는 물론, 지도자인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경험을 쌓아 국제 경쟁력을 더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재능 있는 신예 선수들이 등장했고,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이 이들을 잘 이끌며 한국 육상의 미래를 다시 쓰고 있다.

이제 왕서윤이 넘어야 할 산은 국내 기록 보유자 이영숙이다. 현재 안산시청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4년에 여자 100m 한국 기록 11초49를 수립했다. 왕서윤의 이번 기록과는 0.34초 차이. 단거리에서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지만, 왕서윤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코 비현실적인 간격도 아니다.

11초83서 0.34초 앞당기면 한국 기록
세계 신기록 10초49까지 1초34 남아

이영숙은 왕서윤과 비슷한 시기인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단거리 육상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 3관왕을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4년부터 10여년 뒤인 1994년까지 여자 100m 종목 한국 신기록을 일곱 차례나 갈아치웠다. 전국체전 여자 100m에서 11연패를 달성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 여자 100m에서 동메달(12초10)을 목에 걸었다. 그는 해당 종목 마지막 한국인 메달리스트다. 이후 4년 뒤에는 서른이 넘은 나이로 한국 기록(11초49)을 무려 2차례나 수립했다.

이영숙이 세운 1994년 제48회 전국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100m 결선 및 같은 해 열린 후쿠오카 국제슈퍼육상경기대회에서 세웠던 ‘11초49’ 한국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왕서윤은 지금보다 0.34초 이상 더 빨라져야 이 기록을 깰 수 있다.

왕서윤이 한창 성장 중인 중학생이라는 점, 성장세가 가파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영숙이 낸 기록도 따라잡으리란 기대감이 쏟아지고 있다. 왕서윤을 지켜봐 온 이 코치는 “지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경기 경험을 더 쌓으면 내년 정도면 성인 여자 100m 한국 기록에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기록을 다시 쓰고 나면, 왕서윤은 이어서 세계 신기록에 도전할 수 있다. 100m 여자 세계 신기록인 10초49는 미국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가 썼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선발전에서 나온 기록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선수도 닿지 못했다.

당시 풍속 계측 오류 논란 등이 있었기에 이 기록을 깨기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때 함께 세운 200m 기록 21초34 역시 같은 이유로 요지부동이다. 자메이카 선수 셸리 앤 프레이저 프라이스, 일레인 톰슨 헤라 등이 초를 줄였지만, 0.1초 차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육상 전문가들은 조이너가 세운 기록을 “다른 시대의 기록”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신기록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곧 다가올 일이라는 뜻일 수도 있을까. 냉정한 트랙 위 승부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가장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기록은 여자 800m로, 43년째 붙박이다.

체코 선수 야르밀라 크라토츠빌로바가 1983년에 800m 1분53초28, 난공불락이라 할 만한 기록을 써냈다. 2024년 파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킬리 호지킨슨(영국)이 24년 만에 실내기록을 깨고, 실외기록도 1분54초61까지 따라잡았지만, 아직도 한참 남았다.

세계 향해
전력 질주

왕서윤은 과연 ‘붙박이’ ‘요지부동’ ‘독보적’ ‘다른 시대의 기록’ ‘난공불락’ 등으로 수식할 법한 단거리 육상 기록을 깨나갈 수 있을까. 이번 목표 대회를 기준으로 왕서윤과 함께 트랙 위를 달리며 초를 줄여나갈 어린 선수들에게도 기대가 실리고 있다.

기량 좋은 선수는 준비됐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볼트 같은 선수가 나오기까지, 역량 있는 선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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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눈’ 오세훈 차기 대선 로드맵

‘태풍의 눈’ 오세훈 차기 대선 로드맵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오세훈 서울시장이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참패했다. 국민의힘의 수도권 참패 기류 속에서 홀로 승리한 오 시장은 국민의힘에 불어올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과연 오 시장은 성공적인 시정과 국민의힘 체질 개선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은 6·3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지난 4일 오전 개표 결과, 국민의힘은 광역자치단체장 기준 서울·대구·경북·경남 등 4곳 수성에 그쳤다. 전반적으로 전통적인 지지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수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졌잘싸’ 최소 수성 이로써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상 첫 5선에 성공했다. 오 시장은 48.94%를 득표해 48.34%를 득표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원오 후보를 가까스로 물리쳤다. 방송사들의 출구조사에서는 정 후보가 오 시장을 약 5% 앞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개표 후 13시간이 지난 시각부터 정 후보를 역전해 신승을 거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3월 이후 역동적으로 중앙정치에 개입했다. 공천 과정에서는 후보 등록을 거부하면서 ‘윤 어게인’에 기반한 강경 보수 노선을 유지하려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이어 당에 절윤(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 선언을 요구했고, 국민의힘은 의원총회를 개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에 반대한다”는 등 절윤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오 시장은 당과 거리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 시장이 후보 등록을 거부하면서 요구했던 것 중 하나는 혁신 선거대책위원회 설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오 시장은 한동안 당의 상징색인 빨간색이 아닌 흰색 점퍼 차림으로 현장을 누볐다. 그는 장 대표의 지원 유세를 거절하기도 했다. 지난 4월 진행된 국민의힘 서울시당 필승결의대회와 지난달 12일 진행된 서울시당 선대위 발대식 모두에 장 대표를 초청하지 않았다. 오 시장이 장 대표의 지원 유세를 거절한 취지는 “마음은 고맙지만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오 시장은 지난 3월27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저도 장 대표를 모시고 싶다. 변신한 모습으로 지원 와 주시길 촉구한다”며 “국민의힘 자체가 중도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오 시장은 서울시당을 배경으로 서울 내 자치구를 둔 의원들과 함께 선대위를 구성해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리고 5선에 성공했다. 오 시장의 승리는 정치학적으로 정치의 개인화 현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정치의 개인화는 정당 등 집단적 배경이 아닌 정치인 개인의 리더십 등 이미지가 정치 과정의 핵심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전통적인 지지 세력 외엔 국민의힘이라는 브랜드가 호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권자는 국민의힘과 오 시장을 분리해서 평가한 후 오 시장을 지지했다. 국민의힘이라는 정당 브랜드가 오 시장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 시장은 당과 거리를 두면서 개인 지지 기반이 잠식되는 것을 최대한 막은 셈이다. 지방선거와 함께 진행된 경기 평택을 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유의동 후보가 승리했다. 유 후보는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의 지지 선언 외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언론이 주목한 핵심은 더불어민주당 김용남 후보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의 갈등·상호 폭로였다. 유 후보의 승리는 범여권의 내분 속에서 어부지리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뒤베르제 법칙에 따르면, 단순다수대표제와 소선거구제는 양당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 후보와 조 대표가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유 후보를 상대로 여유 있게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참패 속 홀로 선 오…당과 거리 두고 5선 신승 유 어부지리·한 자력 생존…장동혁 책임론 불씨 하지만 두 후보가 화합하지 못하면서 평택을 선거구도는 다당제로 전개됐다. 김 후보와 조 대표가 각각 일정한 경쟁력을 가진 채 분열했기 때문에 범여권 지지자의 표심은 사실상 양분됐다. 반면 자유와혁신 황교안 후보는 김 후보와 조 후보만 한 경쟁력을 갖지 못해 유 후보의 표를 결정적으로 잠식하지는 못했다. 김 후보·조 후보·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 등 진보 성향 범여권 후보들은 각각 28.77%·27.44%·2.95%를 득표했다. 반면 유 후보는 34.83%를, 황 후보는 6.19%를 득표했다. 이 때문에 유 후보는 다수 대결 구도 속 승자가 될 수 있었다. 평택을 결과는 뒤베르제 법칙의 기계적 효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줬다. 단순다수대표제에서는 1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의석을 차지한다. 유 후보는 34.83%를 득표하는 데 그쳤지만, 범여권 후보들이 분열하면서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범여권 후보의 분열은 뒤베르제 법칙이 기대하는 심리적 효과인 사표 방지를 위한 유력 후보 결집 효과 실현을 방해했다. 따라서 유 후보의 승리는 국민의힘의 조직적 승리라기보다, 범여권 분열과 단순다수대표제의 기계적 효과가 맞물린 결과에 가까웠다. 부산 북구갑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도 민주당 하정우 후보를 물리치고 신승했다. 이로써 한 전 대표는 오 시장과 함께 자력으로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지난 2월 한 전 대표 제명을 주도했던 장 대표 등 당권파는 매우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것이다. 통상적인 정치적 관례대로라면 선거에서 대패한 당 대표 등 지도부는 일괄 사퇴의 길을 걷는다. 이후엔 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돼 당의 혼란을 수습한 후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일각에선 선거 이전부터 “장 대표는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 3일 SBS 선거 방송에 출연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나는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자유한국당 패배를 예고하는 출구조사 발표를 듣는 즉시 사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가 장 대표가 억울해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로는 “상당수 후보들이 장 대표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장 대표로서는 할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지난 4일에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장 대표를 강제로 사퇴시킬 수단은 사실상 없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따르면, 청년 최고위원을 포함한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4명 이상이 사퇴하거나 궐위되면 지도부가 무너진 것으로 간주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된다. 치열한 혈투 치명적 내상 국민의힘 선출직 최고위원은 신동욱·김민수·양향자·김재원·우재준 최고위원이다. 이들 중 신동욱·김민수·김재원 최고위원은 전반적으로 장 대표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 물론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장 대표의 거취를 어떻게 결정할지에 따라서 신 최고위원과 김재원 최고위원은 유동적인 결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 친윤계로서는 장 대표를 섣불리 사퇴시켰다가 오 시장이 당권 장악까지 시도하는 더 큰 강풍을 맞이할 수도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동안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사퇴시킨 후 신 최고위원을 얼굴로 내세울 수도 있다”는 설이 돌아다녔지만, 말 그대로 설로 끝났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가 충돌했던 지난 1~2월에도 충돌했던 핵심 요소는 절윤 등 노선 변경 여부였을 뿐, 장 대표의 거취는 아니었다. 인위적인 지도부 붕괴는 사실상 어렵다. 최고위 자체가 장 대표에겐 벙커로 작용하기 때문에 장 대표가 버티면 끌어낼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대구·경북·경남을 수성했기 때문에, 대체로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구 친윤계는 참패 속에서도 당내 발언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반대로 대구에서 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45.05%를 득표하는 등 핵심 지역 기반 대구에서도 예전과 다른 정치적 정서가 확인됐다. 따라서 구 친윤계로서는 “지역 기반 수성을 위해 당에 변화를 줘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과 “장 대표가 관례대로 사퇴해야 한다”는 판단이 교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하마평에 올랐던 신 최고위원 등 대안 인물을 찾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옹립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국민의힘은 ‘윤 어게인’ 정서를 등에 업은 강경 보수 세력과 영남권에 기반을 둔 구 친윤계가 양대 축을 형성한 과두적 구조에 가깝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과두제의 철칙’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과두제의 철칙은 “조직이 커질수록 민주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미헬스가 지적했던 근거는 ▲관료화와 분업 ▲대중의 무관심과 무능력 ▲지도부의 권력 독점 등이었다. 이 중 국민의힘에 작용하는 것은 관료화와 권력 독점이라고 할 수 있다. 관료화로 인해 지도부에 권력이 집중되고, 지도부는 권위 유지를 위해 정보·자원을 통제한다. 구 친윤계 대안 옹립? 그간 구 친윤계는 “당의 이익보다 자신의 권력 자산을 보존하려고 한다”는 비판적 평가를 받아왔다. 장 대표가 구 친윤계의 사퇴 공세에 맞설 수단은 당헌·당규가 벙커로 만든 지도부의 견고함밖에 없다. 영남을 수성했기 때문에 국민의힘에서는 역설적으로 큰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기반이 영남에 과도하게 집중돼있기 때문에 연이은 선거 패배라는 외부적 충격이 발생할수록 당내 권력구조 강화로 회귀하려는 관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구 친윤계에 대해서는 “당을 파벌·지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돼왔다. 서울시장 5선에 성공한 오 시장은 지금까지 구 친윤계와 장 대표 모두를 상대해 왔던 한 전 대표와는 다르다. 한 전 대표는 구 친윤계와 강경 보수 성향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가 국민의힘 복당 이후 당권 장악을 거쳐 대권에 도전할 것이란 예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전 대표의 복당은 역설적으로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 복당하더라도 국민의힘 내 소수 계파인 친한(친 한동훈)계 수장에 불과하다. 목표로 삼을 당권·대권 도전을 위해선 당내 구 친윤계의 거부감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따라서 한 전 대표는 당선돼 자력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태풍 속의 찻잔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사상 최초로 서울시장 5선에 사실상 자력으로 성공한 오 시장이야말로 태풍의 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장 대표는 당 대표직 유지와 생존이 급박하기 때문에 수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당 대표이기 때문에 자신의 노선을 변혁하려는 모순을 저지를 수도 없다. 따라서 국민의힘의 차기 권력구도는 오 시장과 구 친윤계가 여러 쟁점을 놓고 충돌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몇 달 안으로 결정해야 할 논점만 해도 ▲장 대표 등 지도부의 거취 ▲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여부 및 위원장 임명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개최 시점 등이며, 이것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최고위는 장 벙커…영남 기반 구 친윤도 셈법 복잡 복당 벽 마주할 한…‘오세훈계’ 편성 당 흔드나 국민의힘 내 수도권 거점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따라서 오 시장이 잔존한 수도권 내 비친한계 성향 중도보수계열 인사들을 규합해 오세훈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광역자치단체장이 직접 정당 대표를 맡기는 어렵다. 오 시장으로서는 오세훈계를 구성해 참신한 개혁 이미지를 표방할 수 있는 대리인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그 대리인으로, 친한계로 알려졌지만 서울시당위원장으로서 당권파와 겨뤄가면서 오 시장과 호흡을 맞춘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과 서울 내 험지인 도봉갑에서 당선돼 서울시장 선거전에서도 민주당 정 후보 저격 활동에 집중했던 김재섭 의원 등을 거론한다. 이에 맞서 구 친윤계는 전통적인 논리를 동원해 맞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16년 이후 영남권 중심 구 친윤계의 논리는 “수도권이야말로 늘 국민의힘 선거 패배의 원흉”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오세훈계가 새롭게 편성된다면, 사안에 따라 오세훈계와 친한계가 구 친윤계의 공세에 공동 대응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장 대표의 정치적 수명이 이 사태에 아예 참전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변수는 이번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용지 관리 논란에서 나올 수도 있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서울 송파구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일각에선 재투표까지 주장하고 있다. 당장 직면한 참패의 여파를 수습하고 당을 뭉치게 하는 데 있어서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위기를 통제 가능한 외부의 독립된 실체로 분리해 내부적 결집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경 보수 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민의힘에선 오히려 내부를 겨냥한 칼이 될 수도 있다. 섬세하게 다루지 못하면 부정선거론의 영향력이 당 안에서 강해질 수 있고, 역설적으로 장 대표의 영향력이 강해지도록 돕는 생명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대권에? 부정선거론과 장 대표의 영향력 유지가 겹쳐지면, 오 시장과 구 친윤계가 일시적으로 연합해 대응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민의힘에선 네 갈래 권력 투쟁인 ‘사국지’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크게는 영남·강경 노선과 수도권·확장 노선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를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대구·경북 중심 구 친윤계 ▲지도부란 벙커에 있는 친 장동혁계(당권파) ▲친 한동훈계 ▲무계파·수도권 중심 친 오세훈계 등으로 편성될 수도 있다. 계파의 세분화 가능성 중심에는 오 시장이 있다. 태풍의 눈이 된 오 시장은 과연 성공적인 서울시정 수행과 국민의힘 체질 개선에 성공할 수 있을까? 오 시장이 대권에 시선을 두고 있다면, 두 마리의 토끼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