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노파는 담배를 깊이 빨아 한숨과 함께 훅 내쉬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금도 몰라. 그 바다 밑의 탄광 속에서 죽지 않고 만약 살아 있다면 음, 내가 끌려간 곳도 역시 일본이었어. 처음엔 일본의 큰 공장에 취직시켜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고 속였지. 전국 각지에서 나처럼 끌려온 처녀애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난 혹시라도 일본 땅에 닿아 고향 오빠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과 희망 속을 헤매고 있었어. 하지만 그 이상스런 열차는 계속 북쪽으로만 달려가더군. 추위에 떨며 황량한 산야를 지나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에 도착했어. 속은 거였지. 그렇지만 아직 한가닥 소망은 끝내 놓지 않았어.”
한가닥 소망
“희망이 없다면 그런 땅에서는 아마 죽고 말겠지요.”
“그런데 마침내 촛불 같은 작은 소망까지도 꺼져 버렸어. 그 촛불이 소망을 꺾을 수 없는 나머지 내 맘속에 생겨난 환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다 짓밟혀 버리고 말았어.”
“만주 땅에서요?”
“그 당시 만주는 일본군 천지였어. 젊은 사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어 모아 놓았으니…가장 강렬한 욕구와 위안이 뭐였겠어, 응?”
“….”
“그래서 우리 조선 처녀애들이 그들의 성노리개가 되었단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치 내 여윈 몸 위로 탱크가 지나가는 기분이었지. 고향 오빠가 저 멀리 시퍼런 바다 건너 어느 굴속에서나마 살아 있으리란 작은 희망도 서서히 꺼져 버렸어.”
세찬 밤바람이 허름한 가건물의 함석지붕을 날려 버릴 듯 흔들고 낡은 창문을 덜컹거리게 했다.
“난 내 몸뚱이가 시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아갔지. 일본 놈들은 마치 시간屍姦을 하는 미치광이 같았어. 히히 웃으며 시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놈도 없지 않았지 뭐야.”
“누님, 쐬주 한잔 드시고 얘기하세요.”
“난 강제로 끌려갔고 처녀를 잃었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내가 큰돈이라도 벌러 간 화냥년인 양 얘기하더라구. 하지만 우리들은 친일파와 일본 경찰에 속아 강제로 끌려갔을 뿐야. 돈은 무슨 돈!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적은 깡보리밥과 다꾸앙을 먹으며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시달렸어. 병이 들어도 치료해 주지 않고 골방에 팽개쳐 두었다가 죽으면 황량한 골짝에 던져 버렸지. 그뿐인 줄 알아? 마루타 부대에 끌려가서 산 채로 생체실험 도구나 되는 경우도 많았대. 그 당시 이광수나 김활란 등 유명한 친일파들이 나서서, 남자들에겐 징용이나 징병을 감언이설로 권유하고 우리 같은 여자들에겐 정신대에 가입하여 대일본의 황군들을 위해 즐겁게 위안을 해주라고 열띤 강연을 하기도 했어. 아마 니놈들도 내가, 우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강제였든 반강제였든 자발적으로 갔든, 우리는 모두 화냥년이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어. 사람이 아닌 어떤 괴물이랄까? 세월이 바뀌어 나라를 되찾았는데도 지금은 미군부대 옆에 붙어살며 양색시나 양갈보란 소릴 듣고 있지. 걔들 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년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대부분 가난에 찌든 나머지 서울로 올라왔다가 속아서 여기까지 흘러든 경우가 많아”.
“강제로 납치된 애들도 있지만, 대체로 무허가 직업소개소 같은 데 갔다가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온 것이겠지. 일단 여기 들어오면 나가기가 싶지 않은 게 문제야.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이 없어. 오히려 요주의자로 찍히고, 업소에서 고용한 깡패놈들한테 죽도록 얻어맞으니까. 대한민국의 국법은 여기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해. 우리나라 대통령마저도 미군에 대해선 큰나라 상전처럼 대하니까 말야. 결국엔 논바닥 속의 미꾸라지나 지렁이마냥 스스로 살아내라는 얘기일 뿐.”
마치 큰돈이라도 벌러 간 것처럼
친일파·일본 경찰에 속아 강제로
청운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들어 쭉 들이켰다. 그는 생각했다.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군. 북파공작원과 기지촌의 양색시라는 존재들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자의반 타의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난이나 굶주림 탓에 상경했다가 사악한 거짓말에 속아서 지옥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지.
집에서 쫓겨난 여자애들은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돈에 현혹되긴 했지만 나를 포함한 이 쌍놈 쌍년들은 뭔지 몰라도 자기가 나라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거지. 북파공작원들은 물색관에게 속고 양공주들은 직업소개소나 포주 협회에 속은 거랄까. 흐흐, 한미친선 관광협회 같은 데서 정기적으로 유명 인사를 초빙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여러분은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는 국군 장병들보다 더 소중한 애국자라고 은근히 추켜세우면서 세뇌시키는 강연을 하고 있으니 우스워. 그래도 그런 말에 슬픈 위안을 받은 사람도 아마 있을 거야.
하지만 결국은 일시적인 환몽이었을 뿐 병마와 죽음이 아직은 젊은 몸뚱이를 차압해 버리면 지옥의 구덩이로 빠져들고 말지. 그러면 국가의 약속도 자신의 의지력도 아무 소용없이 한갓 폐기물이 되고 말아. 그들은 인간 소모품에 불과해. 무엇보다 그들이 더욱 비슷한 건 같은 나라 사람들로부터 괴물 취급에 사갈시된다는 거야. 좀 가련한 인간으로 여겨 줄 만도 하건만 대체 왜 그렇게 괄시를 하는 걸까?’
청운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백발 노파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군이 물러가자 우리 같은 여자들도 질긴 성노예의 쇠사슬에서 풀려날 줄 알았지. 하지만 현실은 너무 암담할 뿐이었어. 일단 서울까지 겨우 살아서 내려왔지만, 그런 꼴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가 있나, 돈 한푼이 있나, 무슨 다른 기술이 있나? 결국 다시 시궁창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흐흣, 일본군 위안부가 이번엔 미군 위안부로 변한 셈이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실감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피에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욘석아?”
“일본 식민지 시대는 호랭이 담배 피던 조선 왕조 무렵의 일이잖아요. 지금 현대는 대한민국 세상인데…너무 옛날처럼 느껴져서 착각인 듯 혼란스러워요. 어찌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욘석아, 그건 네놈이 무식해서 그래. 내가 왜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겠냐?”
“그게 아니라.”
“일본과 미국, 일본군과 미군이 뭐 생판 다른 것 같어? 1945년에 해방되자마자 바로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왔어. 너희들에겐 천지 차이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그놈이 그놈이야. 외국 병정들에게 시달린 건 비슷하단 얘기지. 사실상 쪽바리가 물러가고 양코배기들이 들어온 건 스물 네댓 해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야.”
“그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우리 누님의 인생이 그토록 기구했다니.”
“많은 여자들이 놈들의 폭행으로 인해 죽었고 지금도 죽어 가고 있지. 이렇게 겨우 살아 오긴 했지만, 나도 꿈인지 생시인지 때때로 분간이 잘 안 돼.”
“며칠 전에 살해당한 아가씨는 꽤 착실했다지요?”
지옥 구덩이
“그래, 여기도 자주 왔었는걸. 몸 팔아 번 돈을 알뜰히 모아 고향 부모집에 보내 주곤 했지. 그렇게 착한 애가 왜 그토록 섬뜩하게 죽음을 당해야 하는 걸까?”
셋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쭉 마셨다.
“직접 거둬 키우셨다는 고아 남매들은?”
청운이 물었다.
“뭐, 둥지를 떠나갔으니 재주껏 살고 있겠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