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육체를 지나 영혼을 울리는 듯한 묘미가 있었다. 면발 위에 김치를 얹어 한입 후루룩 빨아 먹으면 잠시나마 세상의 번민을 잊고 평화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어쩐지 모르지만 혹시 백발 마귀할멈이 국수 속에 어떤 마약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갯소리마저 떠돌 정도였다. 백발 할멈은 그냥 빙긋 웃을 뿐이었다.
백발 할멈
청운의 생각에, 국물은 멸치와 무 그리고 마늘 따위를 오래도록 정성껏 달여낸 것이고, 면이 감칠맛나는 건 잘 익은 김치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여자들, 특히 아메리칸 드림에 푹 빠진 애들은 잘 처먹으면서도 짐짓 고양이처럼 콧살을 찌푸리며 무시하곤 하는 것이었다.
또한 손님이 많아 좀 기다리다가 그냥 갈 땐, 달콤한 포도를 따먹지 못한 채 돌아서는 여우가 신 포도라고 비아냥거리듯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발 노파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청운은 투명한 소주를 한잔 마시고 나서 칼국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속이 짜릿해지며 세상만사의 번민이 한 발짝 물러섰다. 설거지를 마친 백발 노파가 쟁반에 과메기와 김 따위를 담아 들고 왔다.
“아이구, 누님 뭘 이런 것까지…자, 여기 앉아서 세월을 함께 보냅시다요. 헤헤.”
피에로가 너스레를 떨었다.
“욘석아, 너 먹으라고 가져온 게 아녀. 이미 알딸딸한 꼴이구먼 그려.”
“무대 막간에 공짜로 나오는 술 한두 잔 빨았을 뿐인데 뭘 그래요, 히히.”
“공짜 술 좋아하덜 말어. 그것 땜에 죽는 놈들 많어.”
청운은 술잔을 또 비우곤 과메기를 찢어 고추장에 푹 찍은 후 천천히 씹었다. 숱한 기억들이 부풀어 오르며 뇌리를 괴롭혔다.
악몽 같은 추억…부모에게 버림받은 배고픈 거지. 지옥의 노예 같았던 선감원 생활…감언이설로 엄마를 꾀어 꼭두각시로 만든 사이비 종교 단체에 잠입했다가 붙잡혔던 일…
북파공작으로 훈련받고 침투되는 과정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본 인간의 잔인함과 참혹한 주검들…
그런 기억들은 마치 머릿속에 든 괴상한 폭발물처럼 언제라도 터져 버릴 듯 위협적으로 사람의 정신을 억압했다.
청운은 젊은 기운에 의지해 짐짓 대범하게 웃곤 했지만, 내심으론 언제 자신도 모른 채 괴물로 변해 자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곤 했다.
언론에 보도되진 않았으나, 실제로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로 퇴출된 사람들 중엔 생활고뿐만 아니라 육신의 고통스런 후유증과 정신적 공황을 견디다 못해 미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많았다고 한다.
‘만일 정신이 착란되면 인간은 누구라도 환청을 듣고 산 사람에게서도 시체 냄새를 맡고 환상을 보며 떨게 될 거야. 그들만의 죄는 아니지. 혹시 신은 알까?’
청운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사내 녀석이 너무 촐랑거려도 꼴불견이지만, 얼굴에 수심이 너무 깊어도 별루야. 자, 잔을 들고 송년횐지 망년횐지 한번 건배해 보자구.”
백발 노파가 제안해 셋은 투명한 유리잔을 서로 부딪쳤다.
“오늘을 위하여 건배!”
피에로가 합죽이 김희갑처럼 웃으며 흥얼거렸다.
“과거를 위해서도 건배.”
백발 노파가 한마디 보탰다.
“그럼 미래를 위해서도….”
청운도 껴들었다. 세 사람은 잔을 비우고 나서 함께 웃어댔다.
“얘들아, 면발 밑에 떡국도 숨겨 놨걸랑. 새해 떡국이라 생각하고 미리 좀 먹어 보더라구.”
“역시 누님 센스가 최고랑게. 이미 자정이 넘었으니 뭐 새해라고 해도 되겠네요. 헤헤.”
“떡국 먹고 나이 값이나 좀 하거라, 욘석아!”
지옥 같았던 선감원 생활
잔인하고 참혹한 북파공작
“누님은 어딘지 보살님 같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님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혹시 어머니나 친할머니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 게 아닐까?”
청운이 한마디 거들었다.
“글쎄, 뭐 엄마 얼굴도 모르니까. 세상의 모든 엄마가 어머니로 보이기도 하지. 나비의 엄마, 송아지의 엄마, 사자의 엄마, 병아리 엄마 닭 등…헤헤, 그래서 우리 누님은 어머니 같은 보살님이란 말이죠 뭐.”
“흥, 하지만 내겐 애기가 없었어.”
“전엔 아드님과 따님이 있다고 하시더만?”
“걔들은 내가 거둬 키운 애들인데 커서는 나비나 나방처럼 다 훨훨 날아가 버렸지.”
“오, 그럴 리가…누님은 젊었을 땐 더 복스럽고 귀엽게 보였을 인상인데, 결혼도 않고 애도 낳지 않았다니 충격인데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술이나 마셔.”
“그래도 그렇지, 참 안 그러니, 구름아?”
구름은 청운의 별명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슬슬 흔들었다. 백발 노파는 소주잔을 들어 쭉 들이키더니 흐흣 하고 웃었다.
문 밖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창문을 덜컹덜컹 흔들었다.
“나도 귀엽고 예쁘고 복스런 애를 낳고 싶었지. 하지만 소망일 뿐 그럴 수가 없었단다.”
“왜요?”
백발 노파는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소주를 또 한잔 마셨다.
“첫사랑이던 고향 오빠가 일본으로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지. 강제징용이라 카던가. 군함도라는 외딴 바위섬으로 끌려가 나두 후에 딴 사람한테 들은 얘기지만 암석을 뚫고 탄광 속으로 수십 길이나 내려가선 석탄 따윌 켜내 왔대. 지옥 같지 않았을까. 바다 밑의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려.”
“헤헤, 우리 욕쟁이 누님에게도 순정의 첫사랑이 있었구나. 설마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진 않았겠쥬?”
“욘석이 또 광대 같은 소릴 뇌까리는군.”
그녀는 주먹을 들어 피에로의 이마에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곤 불을 붙였다.
천천히 내뿜는 연기가 그녀의 시름인 양 공기 속에 떠돌았다.
“그분은 일본에서 돌아가셨나요?”
청운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녀, 몰라. 그땐 일본 놈들 세상이라 알려주지도 않았어. 그러고 얼마 후엔 나도 끌려 갔으니까.”
“어디로요?”
피에로가 물었다.
“욘석, 넌 귀동냥으루 대강 들어 알고 있을 텐데 내숭을 잘두 떠는구나, 응?”
비극적 인생
“아뇨, 난 몰라요. 설령 들었다고 하더라도 난 그걸 하나의 풍문으로, 머릿속에서 한국 사람들의 어떤 인생 드라마로 음미해 볼 뿐, 본인의 말을 직접 듣기 전엔 구체적인 한 사람의 체험으로 믿지 않아요.”
“녀석, 제법 연설까지 하는군.”
“그래서 어찌 됐어요?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궁금증이 생기는군. 들어 보고 가슴이 뭉클해질 만한 요소가 있으면 내가 각색해서 무대에 올리겠어요. 헤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