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삼의 맛있는 정치> 4·19 혁명과 자유당 정권 몰락의 전말

1960년에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의 해였다. 4·19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자유당 정권을 종식한 의거였다.

집권 자유당은 후보로서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이승만 현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차기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3·15 부정선거

자유당은 1959년 초부터 전면적인 선거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시·읍·면장 임명제를 도입해 득표에 유리한 인사를 임명할 길을 만들고, 자유당 중앙조직위원회에 특수조직책을 두고 이들을 정부 각 부처의 국·과별로 특수임무를 수행토록 보임할 수 있도록 했다.

3월에는 개각으로 경찰과 지방공무원의 총수 격인 내무부 장관에 이기붕 의장과 사적으로 친밀한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곧 7개 도의 도지사를 경질했다.

6월에는 일찌감치 전당대회를 거쳐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공식화했다(민주당에선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후보 선정 문제가 혼미에 빠져있었다. 11월26일에야 전당대회서 조병옥(구파), 장면(신파)을 후보로 선정했다).


11월, 자유당은 본격적인 선거 대책을 세우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자유당 중앙당은 거액의 선거자금을 모으기로 하고 목표액을 50억환으로 책정, 재무부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 및 굵직한 기업체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여 거의 70억환을 확보했다.

최인규는 경찰 인사이동을 단행해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전국 시·읍·면 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 매주 1회씩 회합해 득표 공작을 점검토록 하고 동시에 득표 매수 자금을 살포했다.

최인규는 군수와 경찰서장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 직접 나가 “어떤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고 우선 당선시켜 놓고 봐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는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 대업 수행을 위해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및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훈계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지령한 부정선거 방법은 ▲유령 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한 자유당 후보의 85% 득표 등이었다.

이를 위해 자유당은 당 차원서 관권과 금권을 동원해 폭력배, 연예인, 청년단체, 노동조합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부정선거에 투입하기로 했다.

한편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는 신병 치료 차 1960년 1월29일 미국으로 갔는데 민주당은 조 박사의 형편을 고려해 조기 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농번기를 피한다는 구실로 선거일을 3월15일로 공고했다. 그런데 조 박사는 불행히도 2월15일 현지서 사망했다.


조 박사의 사망으로 대통령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의 당선 확정으로 기울었고,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옮아갔다. 자유당으로서는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정권 유지 여부가 결정되는 사태를 좀 더 예민하게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만 85세로 언제 유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데다, 이기붕과 장면과의 대결서 이기붕의 승리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 같은 상황서 자유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 전략을 수정 없이 강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가 잇달아 일어났다. 과거에도 제2대 총선 이래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가 있어 왔지만 3·15 선거에서는 부정선거 계획과 실행의 정도가 예상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광태의 수준이었다.

야당의 유세장에 선거권도 없는 고등학생이 참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시키는  등의 행태로 이들의 항의 시위가 대구, 대전 등지서 일어났다. 3월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는 민주당 간부가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에 긴급 소집된 민주당 확대간부회의는 ‘부정 및 불법 사태를 엄하게 다스려달라는 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채택하는 한편, 전 국민에게 부정선거 거부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거 포기였는데 3·15 선거는 치르기도 전에 이미 끝난 셈이었다. 3·15 선거투표는 야당 측이 거의 방관한 상태서 이뤄졌으며, 민주당은 이날 오후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닌, 선거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한 뒤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개표가 시작되자 이승만,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조작돼 나온 지역이 속출했고, 이런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최인규에게 득표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최종 집계는 총투표자 1000여만명 중 이승만 960여만명으로 88.7% 득표, 이기붕 830여만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투·개표 상의 공공연한 조작 행위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이날 오후, 마산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 표출됐다.

3·15 마산 시위와 김주열 학생의 주검

민중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민중들 사이에 분노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노의 공감이 형성돼있다고 할지라도 촉발 요인이 없으면 행동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인위적으로 촉발 요인을 조작하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민중에 의한 집합행동이면 우연히 생긴 촉발 요인에 의해 봉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운수(運數)라고 할 수도 있고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4·19 혁명은 마산서 촉발됐다. (선거 당일)사전투표한 투표함이 넘어져 투표지가 쏟아지는 데 항의하는 유권자들과 정부 측 관리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선거 무효를 외치는 유권자들로부터 격렬한 데모가 발생했다.


후일 밝혀졌지만 최인규 내무 장관은 발포를 명령했다. 이날 발포로 9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정부는 부정선거란 빨갱이들에 의한 거짓 선동이며 데모도 빨갱이들의 전략적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마산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자유당 정부는 뭔가 불안했던지 23일, 최인규를 내무 장관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홍진기 법무부 장관을 앉혔다.

운수라고 할까? 섭리라고 해야 할까? 3·15로부터 27일 후인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3·15 당시 실종자로 처리됐던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생 김주열군의 시체였다. 눈에 최루탄이 박히고 온몸에 돌을 매단 끔찍한 시신의 모습은 사진만 봐도 경찰이 쏜 최루탄을 눈에 맞아 절명한 사체를 누군가가 바다에 유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16만명의 마산 시민 가운데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보도된 사진과 기사를 접한 전국의 국민은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인식이 일순간에 전류처럼 전율했다.

가장 먼저 반응에 나선 이들은 서울 소재의 중·고 및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교와 타교를 가림 없이 사발통문해 “학생들은 더 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연합 시위를 갖겠다”며 날짜를 4월19일로 잡았다.

학생들은 미리 약속한 중앙청 앞 태평로에 집결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무대는 일체의 반응 없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경무대 입구인 효자동 좁은 길은 삽시간에 수백, 수천으로 보이는 사상자가 뒹구는 지옥으로 변했다.


4·19로 사망한 인원은 186명, 부상자 1409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초등학생 6명, 중학생 24명, 고등학생 39명, 대학생 24명, 일반인 87명 등 179명이었으며, 경무대 입구서 피격됐다. 서대문 소재의 이기붕 자택 인근서도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발포는 홍진기 신임 내무 장관이 명령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집권 자유당이 정권 유지를 하기 위해 정부를 앞장세워 부정선거를 계획, 실행하다가 국민으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혀 급기야 다수의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살상까지 감행하면서 정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더 이상 정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자유당의 권력 유지는 불가능해졌다. 같은 달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이렇게 4·19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명삼 대기자
<hntn11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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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97년 말 국가부도 상황이 벌어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자본금 수천억원, 국책은행을 뒷배로 둔 대형 증권사들도 고꾸라졌다. ‘절대 망할 리 없다’던 회사의 붕괴는 3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피해자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산업증권 ‘파산의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10월2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공성진 의원이 한국산업증권(이하 산업증권) 파산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공 의원은 “산업증권이 IMF 위기 시에 불·탈법적으로 강제 파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산업증권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자본금을 100% 출자해 설립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1인 대주주였던 셈이다. 망하지 않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산업증권이 파산에 이르는 과정서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 의원은 ▲산업증권 해산 과정서 이사회와 재정경제부의 허가 여부 ▲산업증권을 파산으로 끌고 간 1041억원 ▲개인명의의 계좌 ▲개인 계좌를 통해 한국산업선물로 흘러간 54억원 등에 대해 질의했다. 1998년 산업증권 해산 이후 10년 만에 당시 상황이 국감에 언급되면서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개인명의의 계좌를 통해 오고 간 자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MB(이명박)정부 들어 처음 열린 국감서 산업증권 파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언론은 이전 정부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충현 전 산업증권 채권관리팀장은 여전히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외환위기 당시 좌파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범죄적 구조조정과 부정부패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나라와 국민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겼다”고 일갈했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에 근무하다가 산업증권 설립과 동시에 이직했다. 그는 산업증권이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이고 ‘강제파산’ ‘사기파산’ 의혹을 제기한 제보자, 산업증권강제퇴출피해대책위원장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로 26년을 보냈다. 그사이 소송서 패소했고 법적 시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을 놓지 못한 상태다. 산업증권에 근무했던 직접 피해자와 가족 등이 일한 간접 피해자들은 “IMF 사태였다고 해도 산업증권이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을 고객으로 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라 산업자본 조달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산업증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망했다. 400여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문제는 1997년 12월 IMF 사태 이후 1998년 해산, 1999년 파산 선고 때까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여럿 나온 점이다. 특히 청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개인명의 계좌를 통해 자금이 움직인 증거가 나왔다. 이 구의원이 가지고 있는 71개의 이른바 ‘비밀 통장’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산업금융 채권의 원활한 소화 및 국제업무 특화’를 목적으로 1991년 4월 설립됐다. 산업은행이 100%를 댄 초기 자본금은 1500억원에 달했고 1992년 11월 1000억원, 1998년 3월 1500억원을 증자해 1998년 7월25일 해산 당시 산업증권의 자본금은 4000억원에 이르렀다. IMF 사태로 증권사 강제 퇴출 산업은행 1인 대주주로 안정성↑ IMF 사태로 휘청이긴 했지만 산업증권은 명예퇴직, 임금 반납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산업은행 역시 산업증권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증자하는 등 위기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산업증권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구의원과 지방 지점에 있던 김영수(가명)씨는 “회사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산업은행에 새 총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특히 언론을 통해 ‘산업증권 연내 폐쇄’가 발표되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객과 채권자들은 동요했고 예금인출을 서두르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신규영업도 줄어들었다. 영업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1998년 7월 산업은행은 산업증권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해산결의를 진행했다. 이후 1999년 2월 산업증권의 청산인은 ‘부채 초과 및 지급불능’을 이유로 파산선고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3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업증권은 파산했다. 연내 폐쇄 발표부터 파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는 노동조합과의 퇴출 위로금 규모를 합의하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산업증권의 노조위원장과 산업은행의 대표이사, 부총재 등이 퇴출 위로금으로 24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기로 구두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서 해산이 결정됐다. 당시 산업증권 대구지점서 근무하던 김영수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명예퇴직으로 나간 직원들은 20개월치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산업증권이 망한 이후 나간 직원들은 퇴직금 수준의 돈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업증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2010년 5월 산업증권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피해자를 모아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전 산업은행 총재와 부총재, 산업증권 청산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증권 파산 과정서 피고들의 불법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해 피해자(직원)가 생겼으니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취지다. 수장 바뀌고 급변한 기류 이 구의원은 “먼저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가 적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파산 신청의 원인이 된 자본잠식 상황은 조작됐고 1041억원의 대지급도 실제 진행됐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증권 해산결의 이후 만들어진 수십여개의 개인명의 계좌와 이를 통한 자금흐름은 사기파산, 강제파산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산업증권 청산인 명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파산선고신청서를 보면 ▲지급불능 ▲채무초과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1500억원에 달하는 산업은행의 유상증자, 대규모 인원 정리, 조직 슬림화 등 자구 노력에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점도 명시했다. 반면 이 구의원은 결산보고서와 회계법인이 청산 가치 기준으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해산일 기준(1998년 7월25일) 자산이 부채보다 약 100억원가량 많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에게 변제해도 돈이 남는 만큼 파산이 아니라 청산 형태로 종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청산이 아닌 파산의 방식을 택했다. 청산은 재산관계를 정리해 이를 분배하는 절차를 뜻한다. 파산은 회사의 총 재산을 총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절차다. 파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산업증권이 청산으로 마무리됐다면 산업은행은 유일한 대주주로서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리면서 산업은행은 대주주이면서 채권자가 됐다. 산업증권의 파산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041억원’의 존재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에 빌려준 단기자금으로 파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돈이다. 산업증권은 1998년 7월28일 ‘1998년 7월25일자로 회사 해산을 결의하고 청산 절차를 진행하던 중 1998년 7월27일 교환에 회부된 어음(금액 1041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 조치를 당했다. 자체 자금 조달도 어려우니 추가 자금 지원을 부탁한다’고 산업은행에 요청했다. 의문점 많아 국감서 다뤄 산업은행은 이 돈을 산업증권 대신 갚았다(대지급). 다시 말해 산업증권이 산업은행에 빌린 돈을, 산업은행이 산업은행에 갚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업은행이 대지급한 1041억원은 산업증권의 채무로 잡혔다. 이 과정서 부채가 자산보다 늘어나면서 산업증권 파산의 원인, 채무초과 상태가 됐다. 실제 회계법인이 작성한 1998년 10월31일 기준 산업증권의 부채는 2190억원, 자산은 1950억원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240억원 많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산업증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40억원이 산업증권 파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폭풍은 400명이 넘는 산업증권 직원에게 미쳤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이 대지급했다는 1041억원이 실제 거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증권은 대지급 요청문서 ‘산업증권 청산 절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라고 기술했고 현금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돼있지만 실제로 산업은행은 산업증권에 1041억원을 신규 지원한 사실이 없고 내부 문서에도 신규 추가지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파산 절차 과정서 ‘사후관리대지급금’으로 1041억원을 파산채권으로 신고해 2009년 5월 기준 파산채권의 100%를 돌려받았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손해도 없이 대신 지급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이다. 1041억원의 진실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법원의 허가로 산업증권 메인 전산 서버가 파기된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증권 청산 절차 과정서 개설된 통장은 실물로 존재한다. 이 구의원은 71개의 통장을 산업증권 전 직원에게 전달받아 보관해 왔다. 이 구의원은 해당 계좌들을 통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이 움직였고 일부는 사용처도 불분명하며 최후의 사용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또 있다. 산업증권과 같은 날인 1998년 7월25일 청산 절차에 들어간 한국산업선물(이하 산업선물)에 송금된 54억원의 성격이다. 산업선물은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금융 선물거래를 위해 설립됐다. 파산으로까지 이어진 산업증권과 달리 산업선물은 1998년 정상영업이 시작되기 전에 청산 종결 처리됐다. 그런 회사에 1998년 8월11일 개인 명의의 계좌서 54억원이 이체된 것이다. 이 구의원은 “산업선물은 자본금 100억원의 회사로 산업은행 해산 당시 정식으로 영업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1998년 5월 산업증권 연내 폐쇄 발표가 난 상태서 산업선물에 54억원이라는 거액을 입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7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된 통장은 모두 개인 명의로 돼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계좌 명의자 가운데 2명이 산업증권에 대한 특별검사(1998년 7월25일~8월11일)에 투입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검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직원 400여명 한순간에 길거리로 법적 판단 끝났어도 문제 제기 중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피고 측은 “1998년 당시 고객예탁금은 한국증권금융주식회사에 별도로 예치 관리되는 현행 제도와 달리 증권회사의 고유재산과 구분해 관리되지 않았다”며 “금감원(피고)은 특별검사 기간 중 고객예탁금을 안전하게 고객에게 반환되는 것을 보장하는 적법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금융회사 파산이 일어난 것은 1998년 이전에 없던 일로 제도가 미비했고 방법을 찾던 중 금감원 검사역의 개인 명의를 이용, 계좌를 개설해 이를 고객예탁금 관리 용도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계좌를 개설했던 2명의 검사역 가운데 1명은 금감원에, 또 다른 1명은 증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명의 계좌와 관련해서는 2008년 국감서도 다시 한번 언급된 바 있다. 국감서 공 의원은 2명의 금감원 검사역 외 계좌를 만든 또 다른 개인 명의자에게 “누구의 지시로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당 인물은 “금융감독검사국 직원들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공 의원이 거듭 “산업증권의 자금을 개인, ○○○(명의 당사자)의 이름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해당 인물은 “감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피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총 주식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이른바 1인 회사의 경우에는 주주총회 소집 절차를 밟지 않거나 총회를 개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1인 주주에 의해 의결이 있었던 것으로 주주총회의사록이 작성됐다면 그 내용의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의는 유효하므로 해산결의가 무효라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이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해산결의 절차가 적법하고 유효한 이상 근로자에 대한 해고도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또 소송을 제기한 시기가 사건 발생일 이후 10년이 경과된 상황이라 손해배상채권 시효가 소멸됐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구의원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적인 판단은 끝난 셈이다. 정치적 이유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구의원은 2012년 법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 구의원이 용산 대통령실에 넣은 청원은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 등을 거쳐 금감원으로 이송된 상태다. 이 구의원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면 인수합병, 매각 등의 방식을 써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1인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산업증권을 없애버렸다.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치적인 목적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정부가 산업증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고르면서 429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